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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May 14. 2016

동학, 잊지 않음을 가르치다(4)

4. 무궁토록 잊지 아니함 – 향아설위


수운 선생이 삼칠자 주문을 해석할 때, ‘영세(永世)’는 사람의 평생이라고 했다(永世者 人之平生也).


어찌 100년도 못 되는 한 사람의 평생을 ‘영세’라 하는가? 동학의 제례법인 ‘향아설위(向我設位)’가 그것을 설명해 준다. 익히 알려진 대로, 동학의 제례법인 향아설위는 조상에게 드리는 제사밥(상)을 ‘벽 쪽(저세상)’에 놓지 않고, 제사 지내는 내(後孫)가 앉은 ‘이쪽(이승)’에 놓는다. 이는 조상님(한울님)이 지금의 ‘나’에게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즉, 조상의 성령(性靈)이 나의 성령과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평생’은 무궁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나란 다음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운용의 맨 처음 기점을 ‘나’라고 말하는 것이니 나의 기점은 성천(性天)의 기인한 바요, 성천의 근본은 천지가 갈리기 전에 시작하여 이때에 억억만년이 나로부터 시작되었고, 나로부터 천지가 없어질 때까지 이때에 억억만년이 또한 나에게 이르러 끝나는 것이니라(無體法經 <性心辨>).”


향아설위 제사법의 요체가 바로 ‘불망’이기도 하다. 


“굴건과 제복이 필요치 않고 평상시에 입던 옷을 입더라도 지극한 정성이 옳으니라.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 굴건을 쓰고 제복을 입고라도, 그 부모의 뜻을 잊어버리고 주색과 잡기판에 나들면, 어찌 가히 정성을 다했다고 말하겠는가(不要屈巾祭服 以常平服而至誠可也 父母死後 着屈巾祭服而 忘其父母之意 出入於酒色雜技之場則 豈可謂致誠也哉, <向我設位>).


향아설위의 또 하나의 뜻은 우리가 일상에서 심고하고 식고(食告)하는 것이 곧 제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를 받들고 위를 베푸는 것은 그 자손을 위하는 것이 본위이니, 평상시에 식사를 하듯이 위를 베푼 뒤에 지극한 정성을 다하여 심고하고, 부모가 살아 계실 때의 교훈과 남기신 사업의 뜻을 생각하면서 맹세하는 것이 옳으니라(故奉祀設位爲其子孫而本位也 平時食事樣 設位以後 致極誠心告 父母生存時敎訓 遺業之情 思而誓之可也, <向我設位>) 

그리하여, 오늘날 ‘제사가 멸종되는 시대’에 천도교의 상기(喪期)는 ‘백년상’이 되며, 이때 백년은 ‘영세무궁(永世無窮)’의 뜻인 것이다. 


마음으로 백년상이 옳으니라. 천지부모를 위하는 식고가 마음의 백년상이니, 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 부모의 생각을 잊지 않는 것이 영세불망이요...(心喪百年可也 天地父母爲之食告曰 心喪百年 人之居生時 不忘父母之念 此是 永世不忘也 天地父母四字守之..., <向我設位>.)


다시 말하지만, 동학 공부의 요체는 ‘잊지 아니함’이다. 그 잊지 아니함은 부모님의 은혜를 잊지 아니함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그래도 부모님을 잊지 않고 길이 모시는 길이 끊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제 우리 도유는 이미 천지부모를 길이 모시는 도를 받았으나, 처음에 부모의 도로써 효경하다가 내종에 보통 길가는 사람으로서 대접하면 그 부모의 마음이 어찌 편안할 수 있으며, 그 자식이 어버이를 배반하고 어버이를 잊어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今我道儒 旣受永侍天地父母之道 初焉以父母之道孝敬 終焉以尋常路人待之則 其父母之心 豈可安乎 其子背親忘親而安往乎, <道訣>).


해월 선생은 그래서, “죽어도 잊지 않는다”고 하셨다. 


“내 눈을 붙이기 전에 어찌 감히 수운 대선생님의 가르치심을 잊으리오. 삼가서 조심하기를 밤낮이 없게 하느니라(吾着睡之前 曷敢忘水雲大先生主 訓敎也 洞洞燭燭 無晝無夜, <守心正氣>).” 


다시 돌아가 이야기하자만, 밤과 낮 사이에 심고(心告)하는 것이다. 다시, 도는 마음이다. 


(다음, '5. 불망하는 자, 성인과 현인(끝)'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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