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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Apr 28. 2019

녹두꽃, 묻다 - 동학이란 무엇인가?

녹두꽃통신-003

동학이란 무엇인가?


녹두꽃 3/4회의 마지막 장면에 동학 주인(主人) 해월 선생이 등장한다. [해월 선생은 극중에서 동학주인(東學主人)이라고 불린다. 그에 대하여 ‘대주인(大主人)’은 동학의 창도한 분이자 해월의 스승인 수운 최제우를 일컫는다. 실제 역사 사료에는 수운은 ‘대선생(大先生)’으로, 해월은 ‘법헌(法獻)’으로 불리거나 문서에 기록되어 있는 경우가 더 많다. 교주(敎主)라는 이름은 그에 비하여 널리 쓰인 이름은 아니다.]

해월은, 전봉준이 고부봉기 이후 봉기를 확대하고, “전주성 점령 – 한양 진격”을 실행에 옮기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만류하기 위해 고부로 찾아온 것으로 그려진다. 실제 역사에서 해월이 고부를 방문한 기록은 없다. 충청도 보은에 있던 해월과 전라도 고부의 전봉준 사이에 메신저가 오고간 것을 극적으로 이렇게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해월은 동학교단의 최고 지도자요 선생님으로서 이미, 최소한 4,5년 전부터 전봉준을 알고 있었다. 전봉준은 1892 - 1893년 연간에 진행된 ‘동학민회(東學民會 = 교조신원운동)’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고부지역 한 접주(최소단위 동학 조직 지도자)이면서도 전라도 - 충청도에 걸쳐 지명도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이러한 질문이 오고간다.


동학은 무엇인가?


고부봉기에 일단 성공한 후 전봉준은 고부 인근의 태인(김개남)과 무장(손화중) 등지의 동학도인들과 합세하여 전주성을 점령하고 한양으로 진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봉기의 중요한 축인 황석주를 중심으로 한 양반유생들이 이탈하면서 고립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때, 김개남과 손화중을 앞세우고 해월 선생이 나타난 것이다. 해월은 자리에 앉자마자 ‘사태 수습 = 봉기 확대 금지 내세운다. 그 자리에서 전봉준과 해월 사이에 오가는 논쟁(?)에서 바로 ‘동학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중심축을 이룬다.


(해월, 장두청으로 들어와 인사하고 자리에 앉는다.)

해월, “속히 사태를 수습하시고, 도인들의 안위를 도모하시게.”

전봉준, “봉기를 접으란 말씀이십니까?”

해월, “작년 충청도 보은에서의 집회 이후 동학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고 있네. 평화로운 방법으로 억울하게 돌아가신 대주인(大主人=수운 최제우)의 명예를 회복하고 동학의 정당성을 인정받는 데 주력해야 하네.”

전봉준, “동학이 무엇입니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속에 한울님이 있고, 해서 사람이라면 문무양반부터 칠반천인에 이르기까지 다 같이 평등하고 고귀한 존재, 그 지고한 존재가 착취와 수탈에 말라죽어 가는데 이를 외면하고 조정의 선처나 바라자는 것입니까?”

손화중, “전 접주, 자중하시게.”

해월, “하면 자네에게 동학은 무엇인가? 고귀한 믿음인가 아니면 한풀이를 위한 무기인가?”

전봉준, “믿음이 곧 무기입니다. 이 더러운 세상이 가고 인즉천의 세상이 오리라는 믿음, 세상을 뒤집기 위해 그보다 강한 무기가 있습니까?”

해월, (미소 띠며) “우문에 현답이로구만….”

(해월, 자리에서 일어서서 나가려다 돌아서서 단호한 표정으로)

해월, “허나, 교주로서의 내 인내심은 여기까지일세.”

(해월, 장두청을 나간다.)


해월과 전봉준은 ‘동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한다.

해월은 묻는다. "자네에게 동학이 무엇인가? 믿음인가 한풀이인가?"

해월의 물음에 대한 전봉준의 대답(입장)은 이렇게 반문으로 돌아온다; “지고한 존재인 한울님으로서의 사람이 수탈과 착취로 말라죽어 가는데 조정의 선처(= 수운의 명예회복 = 동학의 정당성 인정 받기)만을 바라고 평화를 고수하는 것은 동학답지 못한 것이 아닙니까?"  



‘동학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사이에 두고 해월과 전봉준이 이 문답을 주고받는 장면은 이 ‘녹두꽃’의 품격을 세기적/역사적/기념비적 것으로 격상시킬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 장면이 가질 수 있는 의의에 비하여, 실제 ‘녹두꽃’ 3/4회 차에서 오고간 질문은 자칫 ‘동문서답’형이거나 피상적인 수준에 머무를 염려가 없지 않다. 작가(작가, 감독, 배우)들은 전봉준의 ‘적극적 행동주의’와 해월의 ‘소극적 평화주의’라는 입장을 ‘대립적’인 것으로 배치하는 선에서 만족하려는 것일까.


무엇보다 “동학은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라는 오래된 금언(金言)이 동학 내부에 전해지고 있는바, 해월이 ‘자네에게 동학은 믿음인가 한풀이인가?’라고 묻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예를 들어, 위의 질문을 바로잡아 본다면, “이렇게 봉기하는 것이 지금 여기[1894, 고부]에서 동학을 하는 바른 길인가?”라고 묻는 것이 훨씬 더 실제의 해월에 가깝다. 그리고, 극적으로도 더 정당하다.


역사적 실제에 비추어 보거나 극적 완성도로 보거나 확실히 이 장면은 이상해 보인다. 우선, 전봉준이 해월의 입장을 "[백성(한울님)의 고난을 외면하고] 조정의 선처만을 바라는 것"으로 단정하는 것도 전봉준답지 않고, 해월이 전봉준 앞에 놓인 상황을 ‘고귀한 믿음과 한풀이’의 양자택일적 상황으로 예단하는 것도 해월스럽지 않다. 실제의 전봉준과 해월은 그 정도의 인물들이 아니다. 이 장면만 보면, 작가/감독의 시선의 높이/깊이가 의심스럽지만, 다만 그 밖의 전반적인 내용과 흐름을 보면 지레짐작으로 결론을 낼 일은 아니다.

다행히, "그렇지 않다!"고 할 만한 단초가 제안된다.


전봉준은 "믿음과 한풀이" 사이에 놓은 심연을 '격파'하는 방식으로 해월의 물음에 다시 한번 반문한다.

전봉준, "믿음이 곧 무기입니다. 이 더러운 세상이 가고 인즉천의 세상이 오리라는 믿음, 세상을 뒤집기 위해 그보다 강한 무기가 있습니까?"


이는 곧, 믿음과 혁명[세상을 뒤집기]이 둘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동학의 본질, 즉 '동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한 답변으로 주어진다.


동학이란 무엇인가? 혹은 믿음이란 무엇인가?


그러자 해월이 설핏 웃음을 띠며 한 걸음 물러서는 듯, 말한다. "우문에 현답이로군!"

'우문이란 전봉준을 '믿음'과 '한풀이' 사이에 가두어 두는 방식의 자기 자신(해월)의 물음을 지칭하는 것이고, 그것에 갇혀 허우적대지 않고, 포월(包越)해 버리는 전봉준의 대답 - 반문이야말로 '현답'이라는 뜻일 터.


그런데, 그다음 장면이 다시 반전을 일으킨다. 해월은 여전히 웃으면서, 그러나 단호히 통첩하는 것으로 전봉준에게 일격을 가한다.

"교주로서의 내 인내심은 여기까지일세!"


해월은 왜 '현답'을 내놓은 전봉준을 지지하거나 격려하는 대신에, 단호히 '봉기의 중단!'을 최후 통첩했을까.

결론만 말하면, 이렇다.


해월이 보기에 전봉준은 우문을 슬기롭게 돌파할 지혜와 신념이 있다. 전봉준의 현답을 듣고 해월은 전봉준이 동학을 믿는다는 것이 '믿음'을 종교적 믿음=신앙만으로 이해하지 않기를! 동학의 믿음은 그것이 아니다!ㅡ을 다시 한번 더 믿을 수 다. 그러나 해월의 높이/깊이에서 보건대, 전봉준은 자기가 아는 것, 즉 믿음의 의미와 가치 무엇인지 충분히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자기 손에 쥔, 자기가 가슴속에 품은 보물(=한울님, 믿음)을 충분히 믿는 것은 아니다. '우문에 현답'인 채로, 전봉준은 머물러 있다. 해월이 '인내심'을 말한 까닭은, 해월 자신의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라는 경고라기보다는, 전봉준에게 인내심을 가지라는 역설은 아닐지....


그러나 어쨌든, "동학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이 극이 ‘녹두꽃’인 한 계속해서 제기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물음인고로, 이번에 그 본령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실망할 일은 아니다. 해월과 전봉준 사이의 갈등은 갈등이 아니라, 생생(生生)한 긴장이다. 그것은 해월과 전봉준 사이뿐 아니라, 전봉준과 황학주 사이에서, 그리고 역사적 팩트에 충실한다면, 전봉준과 손화중, 전봉준과 김개남 사이의 긴장감을 팽팽하게 하는 데에서 끊임없이 호출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극중인물로서는 백이강과 백이현 사이의 긴장감도 결국은 그 이면에서는 바로 이 질문, “동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두고 서로의 답을 주장하는 방식으로 전개될 것이다. 이 질문은 동학 진영 내부의 강/온 대립에서뿐만 아니라, 동학군과 관군 사이에서도, 동학과 조선정부 사이에서, 동학도인과 일본 제국주의  사이에서도 끊임없이 물어지고, 그때마다 대답될 것이다. 그리고 그 대답은 칼날에 잘리고, 죽창에 찔리고, 총알에 뚫리고, 폭풍우에 찢기면서, 자기 항해를 계속할 것이다.

“동학만이 살길이네!”라고 믿고 동학에, 동학군 대열에 참여했던 동학군, 농민군들도 이 물음에 직면할 것은, 역사적으로 보아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니, 우문과 현답 사이에서 섣부른 답을 내놓으려 애달하기보다는, 좀더, 녹두꽃길을 따라 걸어볼 일이다. 다시, '동학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돌아가 보자.


동학은 무엇인가?


이 물음은 현재 국회에서 벌어지는 ‘짐승의 시간’을 설명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되는 물음이다. 교착 상태에 처한 한반도 비핵화 문제, 그리고 그 출발점이 되는 남북 분단과 그 기획자이자 배후로서의 미국, 그리고 미국의 뒷배를 믿고 호시탐탐 한반도에서의 지분(?) 탈환을 노리는 일본 아베 정권의 오만방자하고 무도하기 이를 데 없는 행태를 설명할 수 있는 해법을 넉넉히 제시해 주는 물음이다.

물론, ‘동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한낱 정치 모리배들의 얄팍한 분탕질의 이유를 설명하거나 국가 외교문제를 위한 물음은 아니다. 그러나 그 물음의 주체가 되는 동학이 본디 이 땅을 개벽하고 세상사람 마음을 개벽하고, 하늘을 개벽하는 비전이고 보면, 동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일은, 시대의 모순과 억측을 해명하는 것이 됨을 능히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동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을 찾아가다 보면,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짐승의 시간, 굴욕의 역사는 왜 렇게 지금 여기에서 활개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오늘의 한국사회가 성취한 성과는 성과대로, 오늘날 한국사회가 짊어진 질곡과 아픔과 숙제들은 또 그것대로 왜 우리에게 이렇게 주어지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동학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예컨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처럼 거대한 물음일 수밖에 없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종교란 무엇인가?’라는 물음도 마찬가지다.


말하자면, ‘역사란 무엇인가?’란 물음은 평생을 역사 연구에 정진하던 학자(대학교수)가 정년퇴임을 하면서 은퇴 기념 강연을 할 때 붙일 수 있을 법한 강연제목이다. ‘평생 역사 연구를 해 보니, 역사란 이런 것이더라.’ 하고 말하는 것이다. 그 강연에서 자신이 평생에 걸쳐 천착해 온 연구들을 종합하면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고, 노(老)학자는 이렇게 결론을 지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묻는다. ‘역사란 무엇인가?”[실제로, 필자가 대학생이던 당시, 마침 교양역사 시간에 담당교수님은 마지막 강의를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셨다.]


그러나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앞서의 노학자가 역사학을 시작할 때 물었던 질문이기도 하다.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해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맺는 것이 역사학이다.(내 기억으로, 내가 대학 초년생 때 들었던 그 강좌도 그와 비슷하게 끝이 났던 듯하다) 다른 학문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동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이 질문도 한두 마디, 그리고 ‘녹두꽃’ 몇 회 분량을 본다고 해서 그 답을 단언할 수 있는 물음은 아니다. 아니, 녹두꽃이 ‘성공적인 드라마’가 되려면 끊임없이 이 질문이 물어지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도출되고, 또 도출되는 바로 그 순간 해체되는 과정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이 녹두꽃 호에 올라탄 우리들(독자들, 오늘 한국인)도 끊임없이 이 물음을 묻고,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내놓고, 그 답에 대한 재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그 전에 이미 각자의 마음속에 감추어 두었던 동학에 대한 대답(선입견, 고정관념, 편견, 확증편향, 왜곡, 맹신)을 비워낼 수 있어야 한다.

동학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그러므로, 이처럼, 동학 공부를 시작할 수 있게 하는 물음이면서, 동학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하는 물음이면서, 동학에 대한 두려움, 동학에 대한 자만심, 동학에 대한 억측을 헤쳐 나갈 힘을 주는, 그런 힘을 단련하게 하는 물음이다.


첫째로, 이 물음을 주고받으면서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서로에게 알려주는 셈이다. 말하자면, “이름이 무엇입니까?” “고향이 어디십니까?” “나이가 몇 살입니까?” “성이 무엇입니까? (본이 어디입니까?)” “어느 대학을 나왔습니까?” “(요즘에는) 어느 아파트에 사십니까?” “무슨 차를 타십니까?”와 같은 물음이다.  다시 말해, “동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답을 하는 순간은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입니다.”를 이야기하는 순간이다.

둘째로, 그러나 “동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나는 이러이러한 삶을 살아 왔고, 이러이러한 삶을 살아가고 싶은 사람입니다”를 이야기하는 셈이다. 무엇보다도, “동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나는 나의 본성, 나의 본래 모습을 찾아 알고 싶다.” “나는 나의 나 됨을 완성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나와 너와 더불어 이러이러한 세상에서 살고 싶다.”라는 마음을 드러내는 일이다.

셋째로, 그러므로 “동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의 답을 찾는 일은 ‘홀로’가 아니라 ‘함께’해야만 하는 일이다. 홀로 찾은 답은 고집이 되고 아집이 되고 자만심/아만심이 되어 망신(亡身)과 망신(妄信)의 길잡이 구실을 할 뿐이다. 함께 찾은 답만이 건강하게 다음의 물음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동학이란 무엇인가?


앞에서 살펴본 것은 이 물음이 일차적으로 동학은 나의 정체를 찾아보도록/내도록 요구하는 물음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것은 이 물음의 초입일 뿐이다.

‘동학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은 그 자체로 대답될 수 없다. 그 물음의 답을 쓰는 자리는 비어 있어야 한다. 마친 수운 선생이 시천주를 해설하면서 ‘천(天)’에 대한 해석을 건너 띈 것처럼.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서론을 지나 본론을 시작할 때, 그 첫 단락은 ‘동학은 왜 이 세상에 나왔는가?’라는 물음으로 변형되어 다시 물어진다. 그 물음은 계속해서 ‘동학이 꿈꾸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동학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동학은 어떻게 하는가?’ ‘동학은 믿는 것인가 하는 것인가?’

이렇게 ‘동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물음을 낳는다. 물음을 낳기에 동학은 살아 있다.(cf. 동학을 묻다, 물음으로 동학하다 시리즈)


녹두꽃을 재미있게 보려면, 이 질문을 놓치지 않고, 끊임없이 물어 가면서 그 드라마(劇)의 흐름을 따라갈 일이다. 그것을 잣대 삼아 호불호/성불성(好不好/成不成)을 판별할 일이다.


녹두꽃  _ 박길수


녹두꽃 하나 떨어지면

물음이 하나 피어난다.

동학이란 무엇인가?

녹두꽃 둘 떨어지면

물음이 둘 피어난다.

개벽이란 무엇인가?


녹두꽃이 셋, 넷, 다섯...

떨어진 자리마다

피어나는 물음, 물음

물음...


녹두꽃 녹두꽃 노래하는 일은

물음을 물고 하늘을 보는 일,

내 안의, 네 안의, 우리 사이와 저 너머까지


새야 새야 파랑새야 꽹과리 치는 일은

물음을 품고 내 안의 한울을 불러 내는 일

네 안에 이를 때까지

우리 사이에 가득 찰 때까지


들어보라

지금

여기 저기

녹두꽃

진다


아니

핀다


아이

울음 소리

들리고... (2019.4.29)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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