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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May 05. 2019

녹두꽃, 개벽을 말하다!

녹두꽃통신-004

들어가는 말


녹두꽃 4회차(7/8화, 5월 4일-토 방영)에서 만감이 교차하는, 빛나는 대사가 나왔다. 고부봉기를 중도이폐했던 전봉준은 안핵사 이용태와 백이방 등의 반격에 쫓겨 잠적하였으나, 실은 고창(무장현)을 중심으로 더 큰 규모의 본격적인 거사를 준비 중이었다.

마침 이용태의 관군이 고창 선운사에 피신해 있던 동학도들을 발각하여 살육하던 현장에 전봉준과 손화중이 이끄는 동학군들이 몰려와 이들을 물리치는 자리에, 동학도라는 누명을 쓴 ‘작은어머니(유월이)’를 피신시키기 위해 와 있던 백이현과 조우하고, 그날 밤 독대하게 된다.


우선 전봉준과 백이현의 독대 장면으로 넘어가기 전에 언급할 이야기가 있다.


선운사에서, 새 세상을 꿈꾸다


전봉준과 손화중이 선운사에서 이용태의 관군을 물리치면서, 관군에 끌려가던 유월이도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긴 뒤 백이현과 함께 선운사를 탈출하던 중 전봉준에게 구출된다.

녹두, 민중의 손을 잡다!


유월이 전봉준에게 다가가자 “(백)이강도 정신 좀 차렸소?”라고 물은 뒤 동학군들이 속속 모여드는 장면을 보며 보란 듯이 소리친다.

“보시오, 새 세상이오.”


보시오, 새 세상이오!

유월이 비탈길에서 굴러 떨어져 죽을동 살동하는 위기에 처한 상황인데 대뜸 ‘백이강이 정신차렸는지’를 묻는다는 게 사실은 좀 억지스럽지만, ‘아하, 극의 전개상 다음의 장면을 실은 백이강에게 보여주려는 것, 혹은 백이강의 미래임을 말하는 것이로구나’를 시청자가 누구나 알 수 있으므로, 웃으면서 넘어갈 만하기도 하다.^^


안핵사 이용태가 관군을 이끌고 선운사까지 찾아가 분탕질을 치는 장면은,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는 않는, ‘드라마적 상상력’에 의한 것이다. 고부봉기 해산(1.말경?) 이후 무장기포(3.20) 때까지 전봉준의 행보가 뚜렷이 밝혀지지 않은 점을 감안하면, 마냥 무리라고 치부할 일은 아니다. 아니, 그러기는커녕, 선운사에서 이용태에 타격을 입히고, 그곳에 동학군들이 집결하는 장면을 연출한 것은 탁월한 극적 효과를 자아냈다(이것은 아마도 작가나 연출가 모두 충분히 알고, 의도한 것이라고 본다).


선운사에서 반드시 만나게 된다

역사(구전, 야사)에 전해지기로 선운사는 무장현(고창)을 근거지로 하는 전라도 일대 최대 세력의 동학 대접주 손화중이, 선운사 뒷산의 미륵불 배꼽에서 ‘비결’을 꺼낸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 전설의 내용인즉 이 비결을 꺼내는 자가 새로운 세상을 열게 된다는 것으로, 손화중이 그 비결을 손에 넣음으로써 전라도 일대에서 손화중의 동학 내 입지가 더욱 커지고, 민중들도 동학에 입도하는 사례가 늘어났으며, 동학(손화중)이 변혁의 주역이 되리라는 기대가 커졌다는 것이다. 일찍이 송기숙의 동학 대하소설 ‘녹두장군’에서도 손화중 등이 이 비결을 꺼낸 일을 ‘동학혁명 전개’이 중요한 모티프로 그려낸 바 있거니와, ‘녹두꽃’에서는 그 장면은 생략되었을지언정, 선운사에서 새로운 세상을 향한 본격적인 출정이 이루어진다는 설정은 탁월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4회차의 마지막 장면에서 거시기가 본격적으로 백이강으로 거듭나면서, 다시 말해 백이강이 동학에 가담하기로 결심하고 선운사로 찾아가면서 어머니에게 전해달라고 한 대사에서 절정에 이른다.

“선운사에 그랬듯이, 기다려 달라고. 기다리면 반드시 만나게 된다.”

그 만남은 어머니(유월이)와 자기가 만나는 일일 수도 있지만, ‘새 세상’을 만난다는 것이기도 하다. 아니, 어쩌면 후자의 의미가 더 클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선운사 비결의 예언이기도 하고, 그 예언을 약속으로 만들어 낸 동학의 꿈이기도 하고, 그 꿈을 위해 달려가는 백이강, 동학쟁이의 기도이기도 하다.


녹두꽃, 개벽을 말하다


이제, 4회차 드라마에서 백미라고 생각되는 장면을 이야기하자. 전봉준은 백이현과 독대하는 자리에서 백이현에게 거사에 동참할 것을 제안한다. 다음은 그로부터 이어지는 대사.

자네, 우리와 함께할 의향은 없는가


○전봉준, “자네 우리와 함께할 의향은 없는가. 백성의 고혈을 짜낸 돈으로 얻은 지식, 백성을 위해 써 보란 말이네. (탐관오리 백이방의 아들안 백이현은 일본유학을 다녀온 개화지식인이다.)

○백이현, “송구한 말씀이지만, 소생은 나리의 방식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전봉준, “어째서?”

○백이현, “죽창은 야만이니까요. 새로운 세상을 여는 열쇠일 수 없습니다.”

○전봉준, “허면, 자네가 생각하는 열쇠는 뭔가?”

○백이현, “개화된 세상의 선진문물, 문명입니다.”

○전봉준, “문명?”

○백이현, “문명이 사람을 교화시키고 세상을 바꿀 것입니다.”  

○전봉준, “내가 생각하는 야만 중에 가장 참담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백이현, “글쎄요.”

○전봉준, “소위 문명국이라 자처하는 열강. 약소국을 쳐들어가 등골을 빼먹는, 또 다른 약소국을 놓고 저들끼리 물어뜯는 짐승들이지.”

○백이현,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입니다.”

○전봉준, “문명의 빛에 현혹되지 말게. 문명을 만든 것이 사람이듯, 세상을 바꾸는 것도 사람이지.” (...)

○백이현, “전주성으로 가는 길이 쉽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전봉준, “걸어가면, 길이 되는 것이네.”


실제 역사 속의 전봉준과 당시 동학혁명 지도부의 식견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별개로 하고, ‘녹두꽃’의 이 4회차 이 장면에서 전봉준의 이 대사는 동학혁명이 무엇을 지향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개화파의 개혁과 어떻게 다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우선 이 대사 장면에 앞서 전봉준은 백이현이 일본 유학을 한 경력이 있음을 들어, 그 이야기를 나누던 중, 고종의 부마이자 갑신정변의 주역 중 한 사람인 박영효가 일본에서 호구지책으로 “유학생을 상대로 한 기숙사”를 운영하고 있음을 듣고, “사람의 운명”이라는 것이 무상하다는 것을 말한다. 이어서, 백이현에게 거사(동학)에 가담하기를 제안한다.

저는 선진문물로 문명을 열 것입니다

백이현은 전봉준의 “죽창”이 “야만”이라고 비판하며, 자신은 “개화된 세상의 선진문물, 즉 ‘문명’”으로 사람들을 교화시키고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말한다. ‘죽창’을 든 ‘무지렁이’ 농투산이 들을 ‘야만’으로 치부하는 것은 전형적인 제국주의자의 시각이다. 또는 일본군이 동학군들을 토벌하면서 공개적으로 표방한 토벌의 명분이기도 하다. 지독한 편견이며, ‘가짜뉴스’이자, 자신의 불법부당함을 감추며 상대방에게 낙인을 찍는 방식이다.

전봉준은 즉각 그에 대하여 반박한다. ‘문명’을 내세워 약소국을 침략하고, 먹잇감을 두고 다투는 짐승처럼 식민지를 놓고 쟁탈전을 벌이는 소위 문명국이야말로 ‘참담한 야만’ 그 자체라고.  백이현은 그것이 “문명이 빛이 있음으로 해서” 부득이하게 생겨나는 “(일시적인, 불가피하) 어둠”일 뿐이라고 항변하지만, 전봉준은 “문명의 빛에 현혹되지 말라”고, 오직 중요한 것은, 근본이 되는 것은 “사람”이라고, “사람이 먼저”라고 깨우쳐 준다.


적어도 이 장면만을 놓고 보면, 전날(2회차) 해월 선생과 전봉준 사이의 대립각의 재현을 보는 듯하다. 해월의 혜안을 전봉준이 보여주고, 전봉준의 단견(斷見)을 백이현이 보여주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물론 2회 차에서 이 드라마의 작가는 전봉준이 강조하는 ‘거사의 당위성과 필연성’을 해월조차 거부하지 못했다고, 다시 말해 해월을 ‘有口無言’하게 만들고자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해월이 ‘우문에 현답’이라고 한 것은, 해월이 전봉준과 같은 당위성과 필연성을 공감한다 하더라도, 그에 대한 대처의 높이와 깊이가 다르다는 점을 보아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본다. 혹은 드라마 작가도, 그 문제는 해월-전봉준 사이에 중립으로 두고서 이 드라마 끝까지 끌고 갈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 본다. 그것은 지켜 볼 일이다.

전주로 가는 길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대사에서 ‘사람’과 ‘(사람이 만드는) 길’을 이야기하는 전봉준과 ‘선진문물의 문명’을 이야기하는 백이현의 대립은 개벽과 개화(물질문명) 사이의 대결구도를 보여준다. 전봉준의 입장을 ‘혁명’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일 테지만, 그리고 아마도 작가 역시 그러할 테지만, 전봉준의 입장은 ‘사람이 우선되는 혁명’ ‘사람을 위한 혁명’ ‘사람에 의한 혁명’이고 그것을 실질적으로 가능케 하는 수준은 ‘개벽’이라고 불러야 마땅하고, 온전하다. (필자는 이 “녹두꽃통신”에서 발견하여 해설하고, ‘선전선동’하기 위하여 집필하는 것이다.)


작년부터 본격적으로 달아오르기 시작한 ‘개벽파’ ‘개벽학’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대사는, 전봉준이 어쩌면 해월과 어쩔 수 없이 차별화된다고 했던 지점을 무화(無化)하면서, 개벽운동으로서의 동학혁명의 근본적 실상을 온전히 ‘설명’해 준다. ‘선진문물 제도의 도입(수입)을 통한 조선의 개화(문명화)’는 박영효 등의 개화파(온건/급진)들이 갈구해 마지않은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정세의 큰 흐름을 읽지 못한, 혹은 읽고서도 있는 그대로를 놓고 판단하지 않고 바라는 바대로 믿어버린 ‘박영효’ 등 개화파의 순진무구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가 실제 역사를 통해 확인하는 바다(일본의 배신 등).


전봉준이 이 대화에서 보여주는 개화-서구(선진)문물화에 대한 비판과 사람이 곧 한울인 개벽의 대비는 오늘날 한국 근대사를 '개화에서 개벽으로'(조성환, "한국 근대의 탄생")으로 보는 '자생적 근대화' '토착적 근대화' '비서구적 근대화'의 맥락을 그대로 보여준다. 특히 이 장면에서는 "영성적 근대화" 내지 "개벽적 근대화"라는 말을 여실히 떠올리게 한다.


개화든 문명화든, 그리고 ‘개벽운동’조차도 자기의 힘이 아니고서는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법이다. 자기 힘이 있고야, 남의 힘을 차용하고 원용(활용)하고, 역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당대의 조선의 유학파(신지식인)들의 지식과 지혜와 지견은 순박한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리고 그 점은 어쩌면 현 시점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못하였다. 적어도 현재 사회의 권력을 쥔 사람들(상층부만이 아니라 그 상층부를 떠받치는 토대로서의 주류)은 여전히 이러한 개화파의 후예(친일파, 변절한 척사파, 친일파의 후예로서의 친미파 등)들이다. 그래서 문명의 빛을 위하여 피치 못할 어둠을 이야기하는 논리조차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백이현은 전봉준과의 이 대화 이후 귀가하는 길에 부친-백이방이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유월이에게 동학 혐의를 덧씌우고, 백이강을 궁지로 몰아넣은 것을 알고 분노하면서, 그의 앞으로의 입장과 행보에 대해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걸어가면 길이 되는 것이네

다만 그렇게 세계사적인 지평의, 최소한 동아시아적인 지평의 대화를 주고받는 두 사람의 말끝이 ‘전주로 가는 길’에 모아지고 있음은 의아한 대목이다. 전봉준 거사의 1차 목표가 ‘전주성 함락’인 것은 역사적 사실이기도 하고, 실제 전략에 있어서도 1차로 전주성 함락을 하고야 그 다음 단계를 모색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납득할 수 있지만, 문명과 개화, 문물의 선징성과 ‘사람 먼저’를 두고 시작된 말이 전주성에 멈춘다는 것은 마치 태산명동에 서일필을 본 듯이 맥이 빠지는 느낌을 피할 길이 없다. 전체 흐름의 초반에 불과한 이즈음에 벌써부터 ‘한양성 공략’을 운운하는 것은 드라마 기법상 부적절하기에 그런가 하는 짐작을 해 보지만, 그리고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오버하지 말자’라는 생각도 해 보지만, 높은 성취를 보이는 장면과 때로 어설픈 장면들이 교차하는 통해, 쉽사리 갈피를 잡지 못한다는 점은 말해 두고자 한다. 아마도, 극이 더 진전되면, 이 모든 오해가 풀리는(혹은 대세의 흐름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되는) 순간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아직 무장기포(창의문=포고문)와 백산결진(사대명의, 12개조 기율)이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수많은 관군들이 동학군들에 의해 살육되는 장면은 지나친감이 있다. 동학군의 곧 발표할 사대명의에서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고 사물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것을 첫 번째 덕목으로 꼽게 된다는 점에서, 동학군의 정체성을 호도할 여지가 있다. ‘군자공동체’를 지향하는 동학공동체의 온전한 모습이 오롯이 드러나는 장면이 없이, 단편적으로만 비춰지는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다만 4회차에서 유월이 백이현과 대화하는 장면에서 “(아버님이 작은어머니에게 동학도의 누명을 씌운 것에)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고 하는 말에 대하여 내놓는 말은 거룩한 한울님 말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저도 동학쟁일는지 몰러요

유월이, “어쩌면 지도 동학쟁일는지 몰러요.”

백이현, “네?”

유월이, “낫 놓고 기역자는 몰러도, 동학이라는 것이 사람을 한울님맨치로 중히 여기고 귀천도 따지들 않는다는 것은 아는구만니라요. 그래서 새벽만 되면, 정화수 떠놓고 얼마나 빌었다구요.”

백이현, “뭐라고 비셨는데요.”

유월이, “우리 이강이 귀천없는 세상서 사람같이 좀 살게 해 돌라고요.”


그때 찬물은 ‘정화수’이기도 하고, 동학의 청수(淸水) 그 자체이기도 하다. 비는 것은 주문(呪文)이다.


묻기를 “주문의 뜻은 무엇입니까?”

대답하기를 “지극히 한울님을 위하는 글이므로 주문이라 이르는 것이니, 지금 글에도 있고 옛 글에도 있느니라.” (동경대전, 논학문)


그러나, 전봉준이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혁명의 지평을 넘어, 개벽의 지평을 몸과 마음으로 밀고 나아가는 이 장면(전봉준 – 백이현의 대화)에서 기대하는 바가 적지 않다. 아마도 이러한 전봉준의 높이와 깊이가 훗날 2차 봉기에서 해월과 무리 없이 만나는 자양분으로 쓰일 것이다. 아니, 이미 지금의 전봉준은 본디 해월에게 속해 있던 높이와 깊이까지를 아울러 표현한 캐릭터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하여, 나는 말한다.


"녹두꽃이 마침내 개벽을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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