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두꽃통신-005
'녹두꽃통신'에서 모처럼의 '동학 역사 드라마' '녹두꽃'을 잘게 쪼개고, 한 부분에 집중하며 톺아보는 까닭은 기왕에 우리가 그 결말을 알고 있는 동학혁명 이야기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역사의 이면 - 어쩌면 새로운 나아가, 더 진실된 역사를 찾아내려는 마음 때문이다. 즉 필자는 이 '녹두꽃통신'을 통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다고 여기는 동학혁명에 대해서, 실상은 우리가 그동안 동학과 동학혁명을 잘 모르고 있었다는 것, 혹은 잘못 알고 있었다는 점을 부각시켜 재인식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하여, 필자가 녹두꽃을 들여다보는 일은 그 줄거리를 쫓아가는 것도 아니요, 그것을 통해 '팩트로서의 동학혁명'을 재구성해 보는 것도 아니요, 혹은 역사적 사실과 드라마 사이의 차이, 드라마의 오류를 짚어 내려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녹두꽃통신'은 정작 '녹두꽃'의 실제 드라마 흐름과는 관련 없이, "내가 보고 싶은 / 말하고 싶은 동학혁명 / 동학의 역사와 사상"을 이야기하는 마당판으로서 의미가 더 클 수 있다. 다시 말해, 녹두꽃 너머의 녹두꽃을 보려는 것이다.
지난 4회차까지(1-8화) 녹두꽃들은 앞서서 녹두꽃통신 001-004까지에서 이야기한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할 정도로 많은 화제를 남기면서 성공적인(?) 출발을 하였다고 본다. 필자도 004호까지의 통신문에서 그 드라마에 깃든 많은 이야기 요소들을, 내가 보고 싶은 방식으로 해석해 내려고 애를 썼다. 그러면서도 그 속에서 아직도 이야기하지 못한 많은 '이야기감'들이 있다.(ex : 녹두꽃, 빌다 / 녹두꽃, 먹다 / 녹두꽃, 상상하다)
그런데 이번 글(005)에서는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이 녹두꽃이 얼마나 '재미없는지'를 몇 마디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여기서 '재미있음'은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동학의 참모습'을 이 드라마가 적실하게 그려 보이는 정도에 달려 있다. 그 감춰지고, 왜곡되고, 버려졌던 동학/혁명의 실상을 찾아내고 되살리고 모아내서 "의외성"으로 보여주면, 나는 그것이 재미있고, 감격적이이서 눈물나고, 개벽세상을 향한 희망에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그 반대라면, 시무룩해지고, 고구마을 먹은 듯이 답답하고, 행여 이번에도 변죽만 울리고 말지나 않을지 조바심을 치게 된다.
현재까지 '녹두꽃'은 그 어느쪽으로도 예단할 수 없게 때로는 가능성을, 때로는 기존의 역사의식의 한계에 갇힌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이 드라마가, 전에 없이 본격적으로 동학혁명을 정면으로 다루고 또 비교적 성공적으로 이야기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성취 못지 않게, 아니 그 성취를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기존의 한계많은 동학혁명관을 강하하고 고착시키는 데 이바지하는 것은 아닐지 우려를 더하게 만드는 대목/흐름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문에 이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녹두꽃통신'을 더욱 치열하게 써 나가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동학에 대한 기성의 고정관념을 허물고, 동학 / 혁명을 새로운 관점으로 조명하는 일은 왜 중요한가? 그것은 '위대한 동학혁명'을 기념하고 기리자는 수구(守舊) / 복고(復古) 취향에서가 아니라, 그러한 새로운 조망이 지금 여기 우리의 삶을 재구성하고 새로운 미래를 가늠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그리고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동학혁명의 모습, 그리고 그 이전, 그 배후, 그 본질로서의 동학의 실상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를 수 있음을 공유하고 공감하고 공공하는 과제가 우리에게 주어진다.
녹두꽃 드라마를 통해서, 그 점을 재발견하고 재인식하고 재확산하는 것을 통해서 결국은 우리 자신을 재발견, 재인식, 재확산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이 최근 개벽학, 개벽파의 시선이다. 그런 점에서 필자의 '녹두꽃통신'은 "개벽파의 시선으로 녹두꽃 보기"라고 명명할 수도 있겠다.
오늘의 시점에서 역사 연구가 '역사적 사료 / 실증'에 얽매여 (동학도인들이 얼마나 자기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남겨 놓을 수 있었겠는가) 동학혁명을 패배의 역사로만 그리는 동안, 동학을 전근대성을 온전히 탈각하지 못한 전통사상의 종합쯤으로 이해하는 수준에 머무는 동안, 오늘의 한국사회는 '서구적 근대' '서학적 현대' '친일->친미적 사회' '자본-물질 중심의 정신세계'로 자리매김되어 왔다.
물론 한편으로는 '촛불혁명'의 연원을 '동학혁명'까지 거슬러 올라가 찾는 움직임이 없지 않고, 마침내 '동학혁명기념일'(5월 11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기에까지 이르렀으니, 이만큼 했으면 어지간히 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법도 한 상황이다. 그러나 동학혁명 당시 남북이 없이 하나되어 싸웠던 우리는 남북으로 갈린 채 70여 년을 지나오고, 남쪽은 '헬조선'이라는 비명 소리를 막아내지 못하고 적폐청산과제를 수십 년째 되뇌고 있으며, 북은 북대로 해묵은 과제들을 안고 씨름을 거듭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고 보면, 도대체 동학혁명의 주체들이 그렸던 세상은 어떤 것이었는지, 그것이 위대한 혁명(혹은 전쟁 / 운동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이라면, 그 위대성은 오늘 여기에 어떤 '중력파 같은 것'을 미치고 있는지를 되짚어 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현실적인 역사 흐름의 '반 동학적 전개'(=서구화/식민화)와 그에 응전한, 동학혁명 이래의 끊임없는 '운동의 역사'가 이마마한데도, 이 녹두꽃은 '한계 많은 사료 / 실증주의'에 갇힌 상상력의 한계를 여과없이 드러내는 장면이 적지 않다. (더불어, 더 많은 예산이 필요하기도 하다)..
(1)
우선 지적하고 싶은 것이 녹두꽃에 등장하는 대다수 민중들의 모습이다. 녹두꽃의 배경이 되는 고부 인근은 동학혁명 이전에 동학의 세력이 그 어느곳보다 우세한 지역이었다. 동학도인들에게 '유무상자' 정신은 계율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녹두꽃에 등장하는 고부 고을 곳곳에는 '가족 단위 거지떼'가 골목에 나뒹구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고부봉기'의 당위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가난/굶주림 - 봉기'라는 도식으로 동학혁명의 주요 동기를 그려내는 것은 시청자들의 수준을 너무 얕본 것은 아닐지.
당시 동학도, 특히 전봉준 주변에는 (이 녹두꽃에서는 아직 등장하지 않은 김덕명 대접주 같은) 부유한 동학도인들이 적지 않았고, 그들은 동학도인과 그 주변의 농민들에 대한 구휼에 정성을 다하였다 (그것이 많은 민중들이 동학으로 몰려든 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동학혁명은 단순히 굶주리고 헐벗은 백성들이 '먹고 살기 위해' 일어난 민란이 아니라는 말이다. 쌍팔년도 아닌, 21세기, 인공지능과 제4차 산업혁명이 운운되는 이 시기에 동학혁명을 이야기한다면, 이러한 빈곤 프레임을 넘어서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 아닐까.
동학혁명이 단지 '억압에 대한 저항' '핍박의 극한점에서 터져 나온 활화산' 정도였다면, 동학혁명은 위대한 혁명, 개벽운동으로서 자리매김되기 어렵다. 실제로 당시의 사회경제사적인 배경(학술적으로 구명된)을 살펴보면, 동학혁명은 변화와 변혁의 필요성과 동력이 임계점에 이른 상태에서 터져 나온 변혁운동이었다. 다시 말해 이때 변혁의 '필요성과 동력'은 변혁운동 내부의 역량(사상적 정신적인 것은 물론 물질적인 토대까지)이 나름대로 성숙해졌던 덕분에 [그 대부분을 동학은 확보하고 있었다] 동학혁명으로 타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2)
녹두꽃 제1화에서 고부관아에 소장을 제출하는 장두(狀頭)로 나섰던 전봉준이 되려 관아에서 뭇매를 맞고 처참한 몰골로 관아밖에 내동댕이쳐질 때, 그를 기다리는 농민들(그중에는 전봉준의 지우요 같은 '접주'인 최경선도 있다)은 전봉준을 "나으리"라고 부른다. 물론 그 자리에서 대놓고 '접주'님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을 테지만, 그 이후로도 전봉준에 대한 호칭은 '장두어른'이 주류를 이룬다. "전봉준 접주"를 "접주"라고 부르지 못하는 것은(아, 이것은?) 단지 '조병갑'의 서슬이 퍼렇기 때문이 아니라, 이 드라마가 '동학의 내면'을 놓치고 있다는, 혹은 어쩌면, 일부러 사상(捨象)시켜 버리고 있다는 혐의를 갖게 하는 대목의 시작점이다.
드라마의 제작자 입장에서는 '녹두꽃'이 '동학 그 자체'를 드러내는 드라마가 아니라, 동학혁명을 배경으로 백이강과 백이현이라는 이복형제의 대결이라고 하는 '극적'인 점을 부각시킴으로써, 그리고 전봉준을 '혁명가'로서 자리매김함으로써 (혹 '동학'의 종교성에 대한 배타적 입장을 갖는 사람들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시청률의 불이익을 회피하고자) 시청률을 높이는 방향으로 극의 흐름과 요소를 단순화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실제로 전봉준이 친구 이상으로 의논하고 협조를 구하고 자문을 얻는 사람들인 손화중, 김개남이 그저 여럿 중의 하나로 그려지게 된 것도, 전봉준을 중심으로 하는 오래된 '동학혁명담론'의 수준에 머물러 버리는 혐의가 짙다.
이처럼 녹두 전봉준을 '장두'라고만 부르고 '접주'라고 호칭하지 못함으로 해서 생기는 문제는 상당히 심각하다. '접주'와 '접장(접장은 접주가 아니라 동학도들이 서로를 '어른'으로 존대하는 호칭이다)으로 구성된 동학의 "접"과 그 '접'의 확장으로서의 "포"의 유기성은 훗날 동학혁명의 봉기를 "기포(起包)"라고 하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동학혁명'의 직접적/조직적/물리적인 동력원이다. 그런데 '접주'라는 호칭을 생략함으로서 동학혁명의 이 중요한 배후가 묻히고 만다.
(3)
이는 전봉준의 최측근인 최경선이 마치 전봉준의 호위무사나 행동대장격 정도로 그려지는 것과도 연계된다. 우리나라 드라마 제작이 갖는 태생적인 한계(예산)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겠으나 최경선이 제1화에서 거시기의 몽둥이찜질을 받으면서 비명소리 한 번 내지러지 않던 장면에서 오히려 발견할 수 있던 기개가, 고부봉기 이후 걸핏하면 칼을 빼드는 모습에서 여지 없이 바스라지고 만다. 최경선은 훗날 전봉준, 손화중, 김덕명, 성두한 등과 함께 서울에서 처형을 당하는 인물중의 하나이고 시종일관 전봉준과 행보를 함께한다. 그가 '접주'라는 호명을 제대로 받는다면,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그의 모습이 그처럼 가볍지는 않을 것이다.
이처럼, '접주'라는 호칭이 사라짐으로써 동학혁명(고부봉기~ )의 실질적인 동력을 만들어내는 동학 공동체와 조직의 역량을 제대로 보여줄 수 없게 되면, 도대체 동학혁명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하기가 군색(窘塞)해진다. 실제로 4회차에 이르는 동안 고부봉기 발발 - 소강기(안핵사 이용태 등장) - 재봉기(무장기포)에 이르는 동안 동학군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정의로운 지도자(장두 전봉준)을 둔 여타의 민란 세력과 다를 바가 없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하는 고부봉기 준비 과정이나 진행 과정을 위시한 대부분의 장면들, 그 속에서 보이는 농민들도 그러하고, 특히 동학도인들의 모습이 그처럼 무기력해 보이지는 않을 터.
지금까지 보여진 농민들의 모습은 '무력봉기'를 준비하는 집단으로서는 유의미할지언정, 그것이 '동학도인들을 주축으로 한 혁명' 혹은 '개벽운동'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데는 역부족이다. 선운사에 모여드는 동학농민군의 모습에서는 제법 '세력'을 이룬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 역시 '동학농민군'으로서의 위용이라기보다는 일반적인 농민군의 모습으로 그려질 뿐이다. 한마디로 말해 '이름'과 개별적인 역할을 가지고 등장하는 인물과 군중으로 보여지는 동학군의 모습은 너무도 큰 차이가 난다. 이는 '동학의 생명(신앙)/생활/생존 공동체'로서의 특성을 거의 반영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현재까지 녹두꽃에는 '공동체로서의 동학' '세력으로서의 동학' '물결로서의 동학'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사람의 숫자나 '혁명전쟁'의 본격적인 전개와는 관련이 없다. 오히려, '대규모 전쟁국면'에서는 전투에 집중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동학혁명이 일어나는 이면에는 고부군수나 이용태의 직접적인 학정 이외에 국가의 안위와 장래 문제에 대한 동학 도인들의 꿈과 희망, 혁명의 장래에 대한 공감대 등이 핵심적인 동력으로 그려져야지만 그 속에서 활동하는 개개 인물의 의의도 더욱 두드러지게 된다.
극 초반의 이러한 안일한 접근 (고부봉기 - 동학혁명에 대한 손쉬운 접근)은 이후 이 극의 크기와 깊이에 두고두고 부담이 될 것이다. 다만, 아직은 극의 초반무에 해당하고, 무장기포-백산결진을 거치지 않은,굳이 말하자면, 혁명군으로 편성되기 이전의 군중들이어서 그렇게 그려졌다고 생각하고 기다려 보는 것이 최선이다.
아무튼, 현재로서 녹두꽃에는 동학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좀 위악적으로 말하면, 그저, 부나방 같이 '혁명'의 불꽃을 향해 내몰리는 농민군들이 두두러질 뿐이다.
전봉준을 위시한 동학 접주나 동학도인들의 모습은 그다지 동학스럽지 않은 반면, 부분적으로 활약하는 민중들의 모습은 오히려 '민중의 지혜'를 잘 보여준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백이강의 어머니 유월이. 오늘은 그가 활약하는 장면을 다시 한번 회고해 보자.
고부봉기가 잦아들고, 백이방이 귀환하면서 권력을 회복한 고부관아. 백이강은 고부봉기 당시 자신을 붙잡아 목매달아 죽이려 했던 고부 백성들을 일일이 찾아내서 보복하겠다고 나선다. 그러자, 유월이 백이강을 막아선다.
(유월이, 못쓰게 된 오른손 때문에 장터 주막에서 사람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백이강을 막아나서며)
유월이, “차라리 동네방네 방을 써 붙이 그러냐. 백가네 거시기 등신 되부따고야.”
백이강, “아따, 그러꺼나. 고부 인간들 10년 묵은 채증이 싹 다 낫어 부를 것인디.”
유월이, “(백이강을 잡아 끈다) 집에 가, 어여 가.”
백이강, “있어 봐. 줄 좀 더 묵고. (병째 마시고, 화를 삭이다가, 다시 술병을 집어 든다.)
유월이, “(백이강을 말리며) 어째 이려 뭣헐려고.”
백이강, “나가 낮짝을 다 봐 놨구먼. 나 밟은 놈, 침 뱉은 놈, (내 목을) 매단 놈, 엄니 줘 팬 놈까지 내가 싹 모다 작을 내버릴랑께”
유월이, “(백이강의 뺨을 후려 친다) 어휴! 그놈들 낮짝만 기억허고, 장두 어른이 살려준 것은 기억 못하냐?”
백이강, “(억지를 부린다) 살려주긴 누가 살려 줬다고 그랴! 작것이 무슨 꿍꿍이가 있었겄제.”
유월이, “하이구, 이 멍청한 놈아, 죄는 미워도 인간이 불쌍한께, 아 거시기, 거시기 개처럼 불림서 개처럼 사는 놈, 개과천선혀서 사람처럼 좀 살아보라고 그런(최소한의 단죄-오른손 응징) 것 아녀!”
<회상 장면> (전봉준이 거시기 백이강의 손을 칼로 내리 찍고 돌아서서 백성들을 향해 외친다. “거시기는 인제 죽었소” - ‘백이강’이라는 본래 이름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
백이강, (회상하며, 눈물을 흘린다. 그러다가, 구경하고 선 주변의 사람들에게 소리친다) “구경났냐!” (사람들 흩어진다.)
유월이, “그려, 인저 엄니는 신경 안 쓸 텐끼 작살을 내던 염병을 내던 니 맘대로 혀. 그런데 그 손 넘 탓 아녀. 니 탓이여.” (유월이 퇴장)
백이강, (흐르는 눈물을 닦는다.)
"개처럼 사는 인생, 개촤천선해서 사람처럼 좀 살아보라고 그런 것 아녀!"라고 하는 말에서 '거시기'라는 무명(無名)의 악한(惡漢)으로 사는 길 이외의 길을 알지 못하였던 백이강이 '백이강'으로 거듭 나 "사람처럼" 살아보라고 하는 전봉준의 뜻을 되새겨 주는 인물이 "유월이"이다. '한낱' 마님의 몸종이었던 유월이에게는 전봉준의 큰뜻을 알아보는 지혜와 용기가 이렇게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거시기-백이강에게 그런 지혜와 용기가 있음은 물론이다. 다만, 그동안 거악(巨惡)에 가리워져, 드러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어머니"의 입을 통해 씻어내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어머니란, 동학에서는 "천지부모"라고도 불리는 한울님의 화현(化現)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유월이 보여주는 기개와 지혜는 당시 "동학민중"들은 대체로 살려내서 보유하고 있었던 수준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들이 동학에 입도한 까닭은 동학이 바로 그러한 삶, 그러한 자아 정체성을 회복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교리나 말로서만이 아니라 행동(신분 구분 없이 맞절을 함 / 빈궁한 사람끼리 서로 구휼함)으로서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권력자들에게 속기를 밥먹듯이 해 온 백성이지만, 거듭해서 속는 데만 익숙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거듭 속으면서 터득한 지혜(약삭빠름)를 가진 백성들이 "동학에 밀물처럼 몰려 들었던" 것은 동학이 그만큼의 내공을 갖추고, 그만큼의 덕(德)을 베풀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어제의 악인조차도 선인이 되고 현인이 되고 군자가 되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동학공동체의 제대로 된 모습이었다.
유월이 백이현에게 넌지시 고백하듯이 '어쩌면 유월이 자신이 동학도일는지' 모를 일이다. 동학도인으로서의 지혜, 불의(백이강)를 보고 꾸짖을 줄 아는 용기가 모두 동학의 것이다.
그리고, 이 장면은 다음 회차에서 백이강이 "나도 의병 하겠소"라고 전봉준을 찾아가는 결정적인 전환의 시발점이다. 다시 말해 백이강이 동학혁명에 투신하게 되는 결정적인 장면이다. 백이강이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나 분노에서가 아니라, 전봉준-어머니(유월이)를 통해 전해진 "너는 누구냐? 네 이름은 무엇이냐?"라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서 동학 진영으로 귀환하는 설정은 그 자체로는 대단히 상징적일 수 있는 장면이다. 그에 비하면, 그가 투신하는 것이 '동학'이 아니라 '의병'이라는 것은 작가/감독의 조심스러움(?)[녹두꽃에서 '동학'의 영향력을 최소화하려는]이 발로라 생각되어, 대단히 섭섭한 일이다. 혹시 뇌리 깊숙이 동학=종교, 동학혁명=농민전쟁이라는 도식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녹두꽃에서, 유월 이외의 등장인물들(전봉준, 최경선, 동학도인들)에게서, 그리고 개개인보다도, 집단으로서의 동학군들에게서, 동학(도)의 진면목이 어느 시점에 가서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될지, 기대를 거듭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