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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Aug 30. 2019

동학천도교인명사전(제2판)

-오늘 모시는 책 - 019

동학천도교인명사전(제2판).. 


제1판이 나온지 4년여 만에 제2판을 내놓습니다. 


그사이, 표제인물이 10만명이 되었고(1판-7만명), 본문에 포함되는 인물은 약 30만명으로 2배 가까이 늘어났습니다(본문의 인물이란 인물정보가 없이 가족으로만 기록된 인물/ 2358쪽-8,000,000자). 


동학천도교인명사전은 동학-천도교와 관련된 각종 연구와 공부에 직접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일반 자료를 볼 때, 그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정보를 추가함으로써 그 자료의 가치를 배가하는 핵심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또한 천도교인으로 표기되지 않은 일반자료(특이 일제강점기 민족운동 관련 자료)에서 그 인물의 소속이 천도교인(천도교청년)으로 밝혀지는 데에도 이 인명사전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그 경우 해당 자료의 의미 자체가 크게 달라지게 됩니다(심화, 확장).


머 리 말


155년의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천도교단은 동학혁명과 갑진개화운동을 거쳐 삼일운동으로 많은 인명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 중반기에는 3백만의 교세를 이루었다. 그렇다면 155년간의 동학도인과 천도교인은 과연 얼마나 될까? 


동학 천도교 최대 교인수 6, 70만으로 추정 


1960년 동학을 창명한 후 동학혁명과 갑진개혁운동 역사를 남긴 동학시대를 거쳐 1906년 2월 천도교중앙총부가 설립될 때에는 포덕연비에 따라 대교령(교인 10만명), 중교령(2만명), 소교령(4천명) 등을 선정하였다. 이때 10만 명을 기준으로 72개 대교구가 조직된 것을 토대로 교인수가 수백만에 달하고 있음을 추정하기도 한다. 일제강점기 자료를 보면 전국 교인 수는 1910년 885,500여 명 1916년 7월 1,073,408명, 1918년 2월 1,082,936명으로 나타난다. 『半島時論』에는 1916년 7월 현재 1,073,408명, 미국에서 발행되는 『新韓民報』에는 1919년 2월 현재의 교인수를 1,082,936명으로 발표하였다. 


그런데 1934년 총독부 자료 연도별 교인 현황은 1906년 102,604명, 1910년 112,767명, 1919년 130,884명, 1903년 104,550명 1934년 8월 현재 93,40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 ‘명’은 당시 천도교에서 교인수를 헤아릴 때 상용하던 ‘호(戶)’의 수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1934년 전국에 963개 교구와 186개의 전교실이 있었다. 이러한 자료에 따라 7~8명의 대가족 제도였던 시대 상황을 감안하면 교인수를 70, 80만여 명으로 추산할 수가 있으며 또한 100명 단위로 구성되었던 교구로 계산해도 교호 수 10만에 교인수가 60,70만 명으로 추산할 수 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신구 양파로 분열되어 있던 교단은 일제의 파쇼 전시동원체제 하에서의 수난을 피할 수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일제 당국의 합동 압력이 가중되자 교단 내부에서 합동 논의가 대두되었다. 1937년 9월경 신구양파를 대표하는 권동진, 최린, 최준모, 정강조 등이 월간잡지 <三千里>에 기자와의 대담 형식으로 <양파합동 및 시국에 대한 진로> 대한 의견을 밝히는데, 이때 네 사람 모두 천도교인 수를 60~70만 명이라고 밝히고 있어 신빙성을 갖게 한다. 


처음으로 동학 천도교 인물 총정리 - 수십 종의 자료 망라 


현재까지 동학시대는 물론 동학을 천도교로 선포한 이후의 교인들에 대해 정리한 교단 기록은 없다. 1909년부터 중앙총부에서는 교호 관리를 위해 가족별로 기록되는 <天民寶錄>을 작성하기 시작하여 1921년까지의 기록을 남겼으나, 그 이후 중단되고 말았다. <천민보록>은 현재 중앙도서관 자료실에  경성교구(1915), 경성교구/을호(1921), 수안군, 삭주군, 태천군,  철원군(1909), 북청군(1921) 등 7책이 보존되어 있을 뿐이다. 1910년대 <천민보록>은 전국 각 지방에 분포한 연원조직을 중심으로 연원주가 교호의 가족들을 기록하였으며 1920년대 것은 현재의 교보 양식과 흡사한 내용으로 교회 경력을 소상하게 기록하였다. 1921년 12월에 개최된 제1회 종법사에서 <천민보록>의 명칭을  <天道敎建設錄>으로 바꾸어 1923년부터 다시 착수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천도교건설록> 추진도 재정의 어려움과 교회의 신구파 분열로 이루지지 못하였다. 


그나마 1923년 10월 대신사탄신백년기념회가 조직되어 백년기념관을 건립할 때의 기념회원과 성금록을 수록한 <대신사백년기념회 명부> 24권이 보존되어 있어 큰 도움이 되었다. 8천8백여 명에 달하는 백년기념회 회원은 4권에 수록되어 있으며, 각 개인이 1원씩을 희사한 3만 명에 달하는 20권의 「성금록」에는 연령과 주소 및 금액이 수록되어 있는데 편의상 연령은 연도로 환산하고 주소는 출신지로, 성금액은 생략하여 수록하였다.

 

그 후 1925년 교회가 신구파로 양분되자 구파교회에서는 <천도교건설록>및 <天道敎布德錄> 편찬을 계획하였으나 재정 문제로 실현하지 못하였고 1931년 11월 유효(劉曉)가 개인적으로 「敎會歷史人物誌」를 한 권을 마련하였지만 발간하지는 못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신파교회에서는 1933년 4월부터 교보 편찬에 착수하여 1934년 12월 15일 1만여 명에 달하는 인명을 수록한 <天道敎創建錄>을 출간하였다. 다만 창건록의 수록 내용에 중 접주, 수접주, 대접주, 교령, 봉교, 봉훈, 교훈, 도훈, 도사, 종법사 등의 교직을 일률적으로 수록하고 있으나 교회월보와 신인간의 중앙휘보에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교직자 임면명단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자료의 신빙성이 희박한 점도 있다. 다만, 도호, 출신지, 배우자, 당호, 입도일 등은 유용한 자료라고 하겠다. 그리고 1930년대 신구파의 분열에도 불구하고 도령실과 교령실을 비롯한 각 부서에서 기록한 많은 분량의 일지(日誌)에서는 중앙간부의 활동, 도호, 출생지, 환원일 등에 대한 내용을 찾을 수가 있었다. 


그 후 태평양전쟁과 해방공간 그리고 한국전쟁, 이 기간의 자료는 거의 없으며 특히 북한지역 자료는 전무한 상태이다. 월남 교인들이 서울교구를 비롯한 각 지방 교구에서 작성한 교보가 있을 것으로 추측되나 현실적으로 각 교구에서 자료를 수합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그나마 중앙총부에는 한국전쟁 이후에서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교구임원명부>및 <임원이력서>가 정리되지는 못한 채 남아 있는 기록철과 도호 당호의 신청서와 발급대장이 있어 다행이었다. 그런데 교역자의 이력서는 제출할 때마다 내용이 다른 부분이 많아 어느 기록이 맞는 것인지 선별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 밖에 현행규정에 따라 입교한 교인은 교보를 작성하여 소속교구와 총부에서 각각 보존하도록 되어있지만 교보로서의 기능을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2002년부터 교역자의 새 임기마다 발행하고 있는 <교역자수첩>까지도 참고로 활용하였다. 


그리고 중앙총부에는 동학혁명의 참여자에 관한 자료가 거의 없는데 2009년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에서 펴낸 백서를 자료를 참고로 하였다. 동학혁명 참여자로 등록이 되었다고 모두 천도교인라고 단정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동학군으로 참가하였다면 천도교인으로 간주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사료되어 수록하였다. 또한 모시는사람들 박길수 대표로부터 입수한, 한국전쟁 때 포로수용소 내에서 작성된 1,250명에 달하는 <포로수용소내의 천도교인의 명부>도 참고하였는데 이 명부는 1953년 6월 18일 반공포로로 석방되기 직전에 논산 지구에서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명부에는 기존의 교인들도 있었지만 1952년을 전후하여 거제도를 비롯한 포로수용소 내에서 입교한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다. 당시 포로수용소 내에서는 <The Chundo Religion>이란 영어 간판을 걸고 일요일이 되면 천도교인들이 함께 모여 천덕송을 부르며 시일식을 행하는가 하면 월성미는 하루 한 개비의 담배로, 연성미는 작업복 한 벌로 하여 부산시교구에 납부까지 하는 등 천도교 신앙을 하고 있었다. 


인명사전, 멀고도 험난 한 길 - 앞으로도 계속 가야 할 길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른 지명의 혼선으로 특히 2개의 접경 지역에서는 출신지가 아닌 타 지역에서 활동하는 경우에는 출신지를 확인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1937년부터 광복이 될 때까지 전시체제 하에서 중앙교직자로서 각종 전시단체에 참여하는 소위 친일 활동 부분에 대해서는 제외하였으나 다만 확인이 가능한 교직자의 창씨개명은 말미에 수록하여 참고하고자 하였는데 이 점 독자의 양해를 구하고자 한다. 1차에는 대부분 교직자 중심으로 수록하여 아쉬움이 많았는데 이번에는 중앙총부에서 한국전쟁 이후부터 보존하고 있는 지방교구별 교보를 참고하여 일반교인까지도 수록하였다. 


필자는 처음부터 인명사전을 계획한 것이 아니고 종령을 비롯한 교회사 자료를 접하게 되면서 道號 雅號 筆名 등에 관심을 가지고 틈틈이 정리하고자 하였으나 인명수가 7만 5천여 명에 달하자 참으로 미련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천도교의 인명사전을 엮으려면 사전 편찬계획을 세우고 몇 사람이 팀을 이루어 체계적으로 오랫동안에 걸쳐 해야 할 작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인들의 협조가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출판사에서는 <천도교월보>와 <신인간>에 수차에 걸쳐 광고까지 하였으나 교인들의 관심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아마도 중앙총부에서 추진하였다면 많은 관심과 협조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이 천도교인명사전은 완성본을 엮기 위한 첫 걸음 단계에 불과한 것으로 수록 내용에 누락 및 오류가 많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앞으로 천도교인물사전 간행작업이 지속되는 첫 디딤돌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다행히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동학천도교사전연구회(박길수)에서는 각 연원 및 교구별로 특별판 인명록을 만들어서 해당 연원 및 교구별로 인명사전의 내용을 추가로 조사 기록하는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 일은 앞으로 마감기한이 없이 지속적으로 시행할 일이고, 그 작업 여하에 따라서 이 인명사전의 내용도 더욱 충실해질 것으로 기대해 마지않는다.  

2015년 천도교인명사전이 처음 출판되자 많은 분들의 격려도 받았지만 반면에 많은 누락과 오류를 지적을 받기도 하였다. 그래서 1판에서 제외되었던 중앙총부에서 보존하고 있는 1955년 이전의 남북한 113개 지방교구별 천민보록과 천도교보 157책과 1955년 이후 남한의 170개 지방교구의 300책(묶음)을 비롯하여 도호발급대장(1968.7.16.-2018.3.12)의 7천여 명에 달하는 교인을 추가하였다. 그리고 국립중앙도서관의 해외수집기록물에 있는 1천2백여 명의 천도교청우당 입당원서(이력서)를 참고하여 총 10만 명 이상에 달하는 인명을 수록하게 되었다. 특히 천민보록과 천도교보의 기록은 교호주를 기준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교호(가족)를 합산하면 사전에는 30만 명 이상에 달하는 교인이 수록되었다고 하겠다.      


2019년 8월 

서울 경운동 서울교구 성화실에서 

李 東 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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