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걸음 May 16. 2020

연꽃 십자가, 미소를 띠다

-손원영 교수의 종교평화 활동과 그 미래 

올해 초까지만 해도 '종교(계)'는 정치-사회를 막론하고 우리 사회의 중심 이슈를 점유하였다. 교회세습 문제, 주요 교단 내의 황당사건(성추문, 도박, 선거 등)은 물론이고 '태극기부대'를 몰고 다니며 위험한 '관종장사'를 계속하는 바람에, 우리 사회 전체가 진절머리를 친 것이 그때까지 일이다. 그런데 코로나19로 말미암은 '사회적 거리두기'의 결과로, 올봄 하늘이 유난이 맑고 깨끗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종교적' 잡음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일부 성직자(?)에게 법적인 제재가 가해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


그 틈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코로나19 사태의 확산 국면의 초창기에 기독교 '신천지' 파의 행태가 드러나면서, 기독교 일각에서는 이참에 눈엣가시로 여겨지던 '신천지' 파를 '소탕'할 기회로 삼자는 분위기가 역력했고, 일반 시민들의 눈에도 '신천지'의 행태는 자기자신들은 물론이고 이 국가사회 전체를 위험의 구덩이로 몰아가는 사악한 집단으로 비쳐졌다. 게다가, 신천지 이외의 교회들도 국민(시민)적 여망--사회적 거리두기 동참=오프라인 예배 중지--과 거리가 '고집'을 피우는 모습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사실 최근 몇년 사이 '종교(계)'에 쏟아진 눈화살이 아니더라도, 그리고 코로나19 국면에서 일부 '종교(인)들'이 보여준 일탈 행태가 아니더라도, 사회 전반적으로 '종교'는 '사양산업'이 된 지 오래다.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 '종교인구'보다 '비종교인구'가 많아진 이래, 그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다. 현재 '종교인구'에 포함되는 사람들(신자) 중에서도 '냉담자(천주교)' '가나안(안나가, 개신교)' 교인처럼 기본적인 종교의례(미사 & 예배)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이 최대 30%에 이른다고 한다.  


젊은층의 '탈 종교' 현상은 더욱 두드러져서, "종교인구 급감" 추세는 앞으로 더욱 두드러질 것이다. '파산'하는 교회가 하나둘씩 늘어나는 것[빚을 얻어 지은 교회 건물의 대출금을 상환하지 못해서 다른 사람(목사)에게 교회를 넘기거나, 이마저도 여의치 못하여 문을 닫고 마는 교회]은 물론이고, 그 틈을 파고 드는 '이단'이나, 다단계식 종교 행태 등 '일탈적' 종교 행위도 점점 교묘해지고, 심화되어 갈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종교적 심성과 요구의 총량'은 '인간의 출현' 이래로 조금도 줄어든 적이 없다. 다만 그 종교적 행태가 변화해 갈 뿐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대체 종교'나 '대안 종교'가 점점 늘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기존의 종교, 기성종교가 인간의 종교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것을 대체하는 문화적 기제들이 기존의 종교의 영역을 잠식하면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 참조). 


그러나 그동안 '종교적 기득권'을 향유하던 사람들은 외곽에서 파산하고 "침몰하는 종교"[실직하는 '직업적 종교인' 또는 '교회(사찰)로부터 이탈하는 신자']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종교 쇠락의 경향을 극복하는 근본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것보다 기존의 "종교적 기득권"을 수호하는 데 더 골몰하게 된다(그리고 '충분히' 많은 '기득권자'들은 그들이 죽을 때까지 그들의 '기득권'을 향수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그들은 그야말로, "쳐 맞기 전까지는 누구나 그럴 듯한 계획"이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들 자신은 당대에는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 명망("우리 목사님, 우리 목사님!!")을 누리고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과보(過報)는 반드시 (그 후손이) 돌려받게 된다. 


이러한 세태에도 불구하고 작게는 종교적 양심으로, 나아가 종교로 인한 갈등을 불식시키는 '종교평화' 사회의 구현을 위하여, 좀더 더 크게는 인류 보편의 정의의 수호(학문과 양심의 자유)를 위하여, 그리고 바라건대는, 종교가 제구실을 할 수 있게 됨로써 인류와 지구 생명공동체가 복되고 행복한 진리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희생적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도 적지 않다. 사실,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절대 다수의 종교인(성직자, 신자)들이 이러한 길로 나아가고 있으며, 계속해서 나아가고자 하고, 끝끝내 나아가기를 기도하며 살고 있다. 


그런데 절대다수의 종교인(성직자와 신자)들의 이러한 바람과 노력이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것은 일부 '종교 기득권자들'이 그들의 지위와 세력과 영향력을 놓지 않으려 하고, 제도와 '기관'으로 튼튼히 구축해 둔 '종교(사업)적 인프라'를 장악한 채--마치 꼬리가 몸통을 흔들듯이--전체 종교 또는 특정 종교집단의 향방을 좌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발목잡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또 그러한 기득권에 편승하는 것이 현실적인 목표인 사람들은 그러한 극소수 기득권자들의 눈치를 살피며, 그들(기득권자)의 행패-패륜에 물리적인 뒷받침을 하고 있다(인적 동원, 물적 토대, 논리적 뒷받침 등)

.....손원영교수불법파면시민대책위원회 편..... <<연꽃 십자가>>



손원영 교수를 파면한 서울기독대학과 이를 뒷받침하는 그리도스도회협의회의 최근 행태는 이러한 흐름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손원영 교수(목사)는 학교로부터 부당하게 파면된 이후 3년 가까운 법적 투쟁을 거쳐 '파면 무효 소송'에서 승소하고, 학교 당국으로부터 '복직 승인'까지 받아냈으나, 여전히 학교로 복귀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위에서 서술한 그대로이다. 그 진영에 속한 다수의 사람들이 (지지성명 등을 통해) 법적-상식적으로 바른 길을 가기를 바라고 있지만, 기득권을 장악한 (해당 학교 및 학교법인과 그 소속 교단의 의사결정권자들) 몇몇 구성원과 그 진영에 속한 사람들은 '법이고 뭣이고' 상관 없이 "복직 반대"의 목소리를 드높인다.


그들 속으로 들어가 본다면, 그들 나름대로 절박한 이유와 이러저러한 논리(논거)들이 있을 터이다(대개 어떤 경우든 그러하다). 그러나 더 큰 틀에서, 더 장기적인 안목에서, 더 바람직한 관점에서 재량해 보면, 대개 그러한 억지와 '무대포 식' 대응은 결국 제 살 깎기이자 제논에 물대기이며, 가라앉는 배 위에서 뜀박질 하는 것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손원영 교수의 파면에 대한 건은 법원의 최종 판결로 '복직'해야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자 이들은 이제, 칼 끝을 다른쪽으로 돌려서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려 한다. "이단성" 시비가 그것이다. 

그리스도의교회협의회 서기대(서울기독대학) 손원영 교수 이단성 조사키로

그리스도교회협 대책위 꾸리고 손원영 전 교수 문제 본격화 

서울기독교대학교, 대책위원회 구성: 손원영 교수 재임용 둘러싸고 학교•법인 등 입장 커 

서울기독대학교 앞에서 손원영 교수 규탄대회 열려

서울기독대, "손원영 교수 복직 절대 불가"


그러나, 손원영 교수 사태의 본질은 첫째는 종교간 상호존중의 '종교평화 문화'를 실철하는 문제이다.



또한 기독교계 내부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손원영 교수(목사)의 행위는 기독교계의 자정력을 보존하고 가동함으로써, "기독교의 생명성"을 회복하는 선하고 거룩한 행위이다.  


손원영 교수(목사)에게서는 이 시대, 광야를 헤매는 예수의 모습이 보인다. 본인으로서는 괴롭고 고단한 날들의 연속이겠으나, 그의 공생애의 측면에서 보면 그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복된 종교인"이다. 그에게 크나큰 십자가가 지워진 만큼, 그가 걸어가는 길에 큼직한 촛농 자국이 만들어지고, 그 촛농마다 밝은 촛불,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켜지고 있기 때문이다. 혼탁하기 이를 데 없는 연못 속에서 환하게 꽃피어, 마침내 그 연못을 맑히고 밝히는 연꽃처럼.  


손원영 교수 사태는 여전히 진행중이다. 그것도 치열하게 진행중이다. 손원영 교수의 복직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적'이 '손원영' 교수(목사)라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그들은 그렇기 때문에 '이길 수'가 없다. 그들은 손원영 교수 배후에 거대한 시민세력과 더 거대한 시대적 흐름, 그리고 더더 거대한 하늘의 가호가 함께하고 있음을, 그 안타까움과 흐뭇함이 교차하는 미소를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종교의 미래와 지금-여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