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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Dec 06. 2020

화병에 걸린 임금님

[잠깐독서0027] 화병의 인문학: 전통편 

현재까지 드러난 바로 화병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1603년 화병을 거론하는 첫 번째 왕은 선조이다. 

선조는 자신의 심정과 증상을 스스로 ‘화병’이라고 표현한다.


나는 화병을 앓는 것이라서 계사를 보고부터는 심기가 더욱 상하여 

후문(喉門: 목구멍)이 더욱 폐색되고 담기(痰氣)가 더욱 성한데,

이것은 좌우의 환시(환관-내시)가 다 알고 있는 바이다. 

다시는 아뢰지 말기 바란다. 

그렇게 하면 심기를 애써 억제하여 조양할 수 있겠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선조가 자신의 증세를 토로하는 대목이다. 

후문(喉門)은 목구멍이며, 담기(痰氣)는 가래가 많이 나오는 증상을 일컫는다. 


선조는 화병의 증상으로 기관지 계통의 병증을 호소하였다. 

선조 34년 9월 30일 기록을 보면 


“내 병이 다시 도져 고질이 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심화(心火)가 가장 치성(熾盛, 불길같이 성하게 일어남)하여”라고 하여, 

시간이 갈수록 초조한 감정 상태로 인해 가슴에 화가 쌓이고 있음을 고백한 것이다. 

이때 왼쪽 다리에 열이 나고 아파 신발을 신기조차 힘들었다는 내용도 덧붙이고 있다.


선조의 화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선조의 선대왕은 명종인데,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직계가 아닌 선조가 왕위에 오른다. 선조는 중종(中宗)의 서자인 덕흥군(德興君)의 셋째 아들이었기 때문에 왕위 계승을 하리라고는 상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예상치 못하게 왕위에 올랐으나, 방계(傍系)로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은 재임 기간 내내 선조에게 큰 부담을 안겼고, 열등감을 갖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또한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으나 지지해 줄 외척이나 자기 세력 없이 국정을 이끌면서 느꼈던 위기의식과 신하들과의 갈등이 그를 억눌렀다. 사실 선조는 즉위 초반에 성리학에 정진하여 한때 진정한 왕위 계승자로서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운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재위 기간인 1592년 임진왜란과 1597년 정유재란을 겪은 데다가, 그 과정에서 왕으로서의 권위를 잃게 되면서 결국 역사적으로 무능한 왕으로 각인되기에 이른다.


우리는 그 결과만을 기억하지만, 한 인간이 급작스럽게 왕이라는 중엄한 자리에 올라 감정적인 억눌림과 갈등을 겪다가, 두 번의 전쟁이라는 전대미문의 재난을 겪었던 과정들을 놓고 본다면, 그 개인의 공포와 부담, 패배의식이 어떠하였을지 가히 상상하기 어렵다. 선조 내면의 고통도 심하였으나 전쟁 상황 또한 쉽사리 해소되지 않았다. 한양을 버리고 도망간 왕에 대한 백성들의 충성도 기대하기 어려웠다는 점에서 그러한 극심한 자책과 자괴감, 죽음에 대한 두려움, 판단에 대한 중압감 같은 것들이 그를 짓눌렀을 것이다. 선조의 내적 갈등은 ‘화의 누적’으로 이어졌고, 여러 질병 증상을 보이며 스스로 화병에 걸렸다고 고백함으로써 ‘화병에 걸린 왕’으로 기록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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