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걸음 Dec 13. 2020

우리, 개벽은

UBO Photo essay no.11

개벽하는 사람은 입만 열면 

이러쿵저러쿵 

개벽을 이야기하지만

개벽이 별것은 아니다

*

하나로 붙었던 하늘과 땅이 나뉘는 옛 개벽이 아니요

하늘과 땅과 사람과 만물이 새로워지는 새 개벽이라 하지만

그리 어렵게 말할 것 없이  

배부른 아이가 제멋에 겨워서 옹알이를 하듯이

배고픈 아이가 칭얼거리며, 울어제끼며 밥 달라고 하듯이 

숨쉬고, 울고, 먹고, 싸는 그것이

개벽이다 

*

내 등 따습고 우리 식구 배 안 곯면 좋은 것

그런데 네 배도 부르고 네 식구들도 따습게 지내는 가운데

우리 모두 먹을 만큼 먹고, 따술 만큼만 따숩게 지내는 가운데 

밥상 위 밥과 반찬, 온전히 모시어 

이천식천 이천화천 이기화기 이심치심 

나무도 풀도, 닭도 돼지도, 산도 들도, 강도 바다도

모두 제 삶을 온전히 사는 가운데

술 좋아하는 사람이 술로 서로의 온기를 나누듯이 

글 좋아하는 사람은 글로 서로의 마음을 나누듯이 

말 좋아하는 사람은 말로 서로의 정을 나누듯이 

꽃 좋아하는 사람은 꽃으로 서로의 생명을 나누듯이 

네가 나요, 내가 네요 하는 그 말을 

이리도 하고 저리도 하는 것

그 웃음을 너털거리며 웃기도 방긋이 웃기도 하는 것

개벽은 그쯤에서 갠지갠 갠지갠 춤추는 것이다.

*

개벽이라고 다 개벽이 아니고

개벽이 아니라고 다 개벽이 아닌 게 아니다

개벽을 개벽하고, 개벽 아닌 것을 개벽으로 모시는 것이 개벽이다

앞으로 살아갈 날만 부좇는 그것만이 개벽이 아니고

지나간 날들도 향아설위 향아설위 모시고 모시어 

일신우일신 살리고 살려서 함께가는 그것이 

다시, 개벽이다

*

유모차를 끌고 집을 나서면, 길거리에 온통 유모차투성이이고

내가 아파서 병원에 가면 세상이 온통 환자투성이이듯이 

사람 사는 것이 게서 거기라고 알면서도

뿔뿔이 흩어져 난 나요, 넌 너요 그렇게 살아오던 사람이

문득 네가 나요, 내가 너로구나 무릎을 치는 순간!

한울이 나요, 내가 한울이로구나, 고고성(呱呱聲)으로 우는 순간 

세상이 온통 개벽투성이이고, 내 삶이 온통 개벽꺼리다!

*

걸음을 못 걷는 이에게 재촉하지 않고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을 재우치지 않고

기억력 부실한 사람을 윽박지르지 않고 

뭣 하나 제대로 하는 것 없어 뵈는 사람을 내치지 않으며

실수하지 않는 것이 개벽인 게 아니고

실수하고 잘못한 것을 참회하는 것이 개벽이다

*

남의 잘못에 대하여 직언하며 직행하는 것이 개벽인 게 아니고

나의 지혜와 정성과 슬픔을 다하여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 개벽이다

*

다시, 개벽이다

가고, 다시, 돌아오지 아니함이 없는, 그 생명스러움을 닮은 

일동일정 일어일묵이 

살아 있는 것을 먹고

살아 있는 것을 싸고

살아서 살아가겠다고 

죽어서도, 살아 있는 것들 속에 산 채로 먹혀 

살아가겠다고  

늘 기도하는 그것이 

다시

개벽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다시, 꿈꾸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