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걸음 Dec 16. 2020

인류학계의 태두 스타 박사의 조선관

[개벽통문 - 175]

(1) '개벽강독회' 소식을 마지막으로 전한 것이 11월 2일, 제10호 강독 소식이다. 그 이후로도 개벽강독회는 격주로 계속 진행되었다. 11월 16일, 11월 30일, 그리고 12월 14일에도 개벽강독회가 진행되었다.  그 사이에 참여자가 1명 늘었고...


(2) 12월 14일 강독회(전체 발제 3편)에서 내가 발제한 것은 <인류학계 태두(泰斗) '스타' 박사의 조선관>(무기명)이란 글이다.(11호, 1921년 5월호) [이날의 진도는 13호이나, 필자는 기본 진도에서 누락된 글 중에서 발췌하여 발제함] 


(3) 여기서 '스타' 박사는 위의 글에 따르면 "1911년, 동13년, 동15년, 동17년의 전후 4차나 조선을 내방(來訪)한 미국 인류학 박사 겸 철학박사요 또 이학(理學) 박사인 시카고(市俄古) 대학 교수 ‘푸레데리 스타’(Frederick Starr, 프레더릭 스타, 1858-1933) 씨"이다. 강독회 참여자들의 '집단지성'을 통해 추가로 자료를 검색한 결과 스타 박사는 1891년부터 31년 동안 시카고대학 인류학과 교수로 재직하였고, 말년에는 주로 일본에서 연구활동을 하다가, 일본에서 사망하였다. 한국에 관한 많은 글을 썼으며, 한국 관련 저서로 <한국불교(Korean Buddhism)>가 있다. 그의 주 활동무대는 '일본'이었지만, 그는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로서가 아니라, 고유한 문화, 역사, 정치 전통을 가진 나라로 인식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4) 1925년 미국에서 발행된 조선 재미유학생들의 모임인 <북미학생총회> 기관지인 《우라끼(The Rocky)》에도 "조선문화를 보존하여라"라는 글을 싣고 있다. 그 내용은 유학생들이(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부모의 덕분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특히 그의 부모와 조상의 전통을 무시하고 미국화하려고만 애쓰는 모습을 비판하면서 다음 같이 강조하는 것이다.


"그들은 반드시 장구한 조선의 역사를 통하여 근본적으로 이어온 그들의 부모에 대한 존경과 사려(思慮)를 가져야 할 것이다.〈중략〉그러나 나의 비평안에서 보면 그 경향은 부모를 무시하고 경멸하려 할 뿐 아니라 모국과 선조(先祖)의 문화와의 관계를 끊으려는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사실을 면대(面對)해야 한다. 미국의 교육이, 미국의 교련(敎鍊)이, 미국의 의복이, 영어의 사용이 결코 이러한 청년들을 백화(白化)하지 아니하며, 정치적 의미로 미국민을 만들지 않는다. 설사 그들이 미국 땅에서 나서 선거권 얻을 자격을 가진다 하더라도 그들은 미국인의 눈에 또는 그들 자신의 의식 안에 황인종 그대로, 조선사람 그대로, 동양인 그대로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들은 반드시 이 사실에 자랑을 가지고 원만한 만족을 가져야 한다.〈중략〉그들은 반드시 그 민족의 그 민국(民國)의 역사·예술·문학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들이 출생한 근원을 감상할지며, 그들의 가문(家門)을, 선조의 문화를 자랑해야 할 것이다.〈중략〉과거가 없는 민족은 장래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이는 마치 땅속에 뿌리를 깊이 박은 나무라야 생장하고 번성하는 것과 같다. 〈중략〉조선 청년들아! 야심을 가져라. 경쟁에 몸소 나서라, 재능이 있거든 성공하라. 그러나 조선사람 그대로 머물러 있거라. 그대의 성공과 신용을 그대들의 민족에게 돌려보내라.〈하략〉”


(5) 개벽사 기자가 1921년에 다섯 번째로 한국을 방문하여 1주일간 체류 중인 스타 박사를 방문하여 인터뷰를 한 기사인 "인류학계~~"에서 나에게 중요했던 것은 이 스타 박사가 아마도, '천도교'를 서구(미국)사회에 알린 최초의 인물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아래 글에서 스타 박사는 조선총독(사이토, 齋藤)에서부터 최남선(경성감옥 수감중)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인물을 만났다. 의암 손병희 선생도 방문할 계획이었으나 당시 수감 중에 얻은 병환이 깊었던 터라 방문을 유보하였다. 기사 내용으로 보아 스타 박사는 <개벽사>도 방문하였고, 이전에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에 천도교당을 비롯한 천도교 관련 사진을 환등기[幼燈]에 담아, 미국 내에서의 순회 강연 때 천도교를 소개한 것으로 밝히고 있다. 


(6) 1921년 5월 동아일보에는 이때 한국 방문기를 4회에 걸쳐 연재하였으며(이 기사는 현재 필자가 입력 및 현대어역 중), 스타 박사의 메모들은 미국내 도서관(?)의 자료로서, 인터넷을 통해 접근 가능하다.(악필에 가까운 영어 메모여서, 그 내용을 해독하기가 어렵지만, 당시의 한국 상황을 기록한 소중한 자료가 많을 것으로 사료되므로 기회가 닿는 대로, 전문가의 힘을 빌려 번역을 해 볼 생각이다)


(7) 또 하나 이 글에서 인상적인 것은, 스타 박사가 지난 4회차 방문에 비하여 이번 조선 방문에서 받은 가장 중요한 인상은 사회가 매우 활기차고 사람들의 의욕이 넘쳐 보인다고 밝힌 점이다. 이것은 확실히 3.1운동 이후, 신문화운동에 접어들어 <개벽>과 동아, 조선을 비롯한 언론 활동도 활발해지고, 전국 각처에 '청년회'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생기면서, 활동을 강화하던 시기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마도 한국 근대사에서 1920-1926년 내지 1929년 정도까지는 가장 왕성하고 활발한 사상 및 활동의 융성기가 아닐까 한다. (해방정국도 '신국가 건설'을 위한 왕성하고 활발한 모색이 이루어졌지만, '군정' 체제하에 좌우익의 갈등이 그 왕성-활발함을 압도해 버린 시기가 아닐까 한다. 그러나 이 시기의 "숱한 모색들"은 극좌-중좌-중우-극우"에 이르는 모든 스펙트럼의 모색이 쏟아져 나온 시기라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자료들이 앞으로도 더 나올 수 있고, 연구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시기 못지 않는 때가 바로 1920년 이후 6~9년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시기의 주역은 단연 <개벽>과 <천도교청년당>이 아닐까 한다.) 


(8) 사진은 스타 박사가 한복을 입은 채 환영회 석상에서 한국식 밥상을 받고 있는 모습과 프로필 사진이다. (동아일보 소재)


(9) 개벽강독회는 앞으로도 격주로 계속되며, 한두 명의 추가 참여자를 기다린다. 


아래는 <개벽>지에 실린 기사 (현대어역 - 박길수) 


(동아일보, 1921년 5월) 
스타 박사 (동아일보 소재) 


(개벽 제11호 1921년 05월 01일)


인류학계의 태두(泰斗) ‘스타’ 박사의 조선관


1911년, 동13년, 동15년, 동17년의 전후 4차나 조선을 내방(來訪)한 미국 인류학 박사 겸 철학박사요 또 이학(理學) 박사인 시카고(市俄古) 대학 교수 ‘푸레데리스타’ 씨는 금년에도 조선을 찾아 4월 19일 입경(入京), 전동여관(典洞旅館)에 투숙하였다. 

*

22일 아침 씨를 전동여관으로 방문한즉 씨는 아침밥상을 막 물리고 9시50분 남대문 발 열차로 개성을 향하고자 여행 짐[旅具]을 정돈하는 중이라. 이때 기자는 간단히 찾아온 뜻[來意]만을 알리고, 23日 아침 다시 씨를 그곳[同所]으로 찾아뵈었다. 

*

씨는 이제 6순에 가까운 고령의 소유자임에 불구하고 둥그스름한 얼굴에는 화기(和氣)가 충만[充溢]하며 ‘예스, 예스’의 긍정의 말[辭]을 연발할 때는 이 세상 모든 것이 그의 한마디 긍정 밑에 들고 마는 듯하였다. 더욱더욱 은빛을 속이는 듯한 백발(白髮)이 눈보다도 흰 듯한 머리 밑살을 겨우 가린 것은 마치 맑은 유리로써 무엇을 덮어 놓은 듯하여 세간(世間)의 만상(萬相)이 그를 통하여 들이비추고, 씨가 소유한 모든 자랑이 그를 통하여 발사될 것 같았다. 씨는 “그제[再昨日] 귀 교회와 귀 잡지사를 방문하였을 때에 많은 기쁨을 느꼈노라.” 하는 답례사[禮辭]로 시작하여 이번에 조선을 본 소감을 말하였다.  

*

“나의 소감은 매우 많[多端]으나 우선 몇 가지를 말하면, 첫째, ‘언론기관의 발흥(勃興)이외다. 내가 이전에 조선을 방문[來訪]할 때의 조선 언론기관이라고는 일본인과 미국 선교사가 경영에 관계한 신문 몇 종이 있었을 뿐이요, 조선인이 경영하는 언론기관은 하나도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때는 언론에 대한 압박이 지극히 심[至甚]하여 조선인은 그러한 것을 어떻게든[如何] 경영코저 하여도 어찌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겠지요. 그런데 이번에 와서 본즉 언론기관의 왕성(旺盛)함은 실로 놀랄[可驚] 만한바, 잡지만 하여도 20여 종에 달한다 합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일본은 아직 일본 자국 내에서도 언론에 대한 자유가 충분치 못한즉, 조선 내에 언론기관이 생겼다 할지라도, 그것의 자유의 범위가 얼마만큼 협소할지는 불문가추(不問可推)할 것이외다. 그러나 당신네와 같이 언론기관을 맡아서 하는 자는 그 범위 내에서일지라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 조선 사람의 앞길은 그로써 나날이 열릴 것을 나는 충심으로 믿고 기뻐하며 아울러 조선 형제 된 이는 그러한 기관이 주는 일체 이익을 온전히 받겠다하는 용의(用意)가 있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하며 말머리를 돌려  


*


“내가 얼마전[日前]에 사이토(齋藤) 총독을 면회할 때에 천도교 교주 되시는 손씨께서 몸이 불편하시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환후가 어떠합니까?"


하며 (기자의 대답은 생략 - 원문) 말을 이어


“그렇습니까? 다만 불편하시다 하기로 어떠한 상태인가 하였더니 그렇듯 중환입니까? 그러면 이번에는 방문을 중지하겠습니다. 그런데 손씨는 지난번[曾往] 모(某) 사정(射亭-취운정에 있던 국궁장일 가능성이 큼-역자 주)에서 한 번 뵈온 일이 있습니다. 나는 조선의 천도교에 대하여 항상 좋은 느낌을 가지고 있지요. 그 이유는 동교는 우선[第一] 우상을 인정[認]할 여지가 없으며 둘째, 종지(宗旨)가 순수하고 또 합리적이며 셋째, 의식(儀式)이 극히 단순- 즉 청수일기(淸水一器)면 모든 의식(儀式)에 *대(*代)할 수 있게 된 그러한 것입니다. 천도교는 세계의 어떠한 종교를 배운 것도 없이 오직 조선 사람의 맑은 마음에서 이루어진 티 없는 종교라 하며, 또 천도교[同敎]는 세계 어떠한 종교에 대비할지라도 조금도[小毫] 손색이 없을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천도교[同敎]의 역사와 교리(敎理)를 탐독(耽讀)하였으며, 또 지난번[前回] 조선에 왔을 때 천도교[同敎] 본래[元] 중앙총부(中央總部)에서 찍은 사진(寫眞) (記念式의 光景)을 유등(幼燈)에 넣어 우리 본국을 순회강연(巡廻講演)할 때에는 반드시 천도교[同敎]의 전체 모습[全容]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특히 파란곡절(波瀾曲折)이 심한 조선에 있어서  천도교[同敎]의 교세가 능히 깊숙이 스며들어[浸浸然] 진전(進展)을 이룸[致]과 같은 것은 무엇보다도 그 종교 안에 그리 될 무엇이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

“우리의 조선의 의식주는 그 장단(長短)이 어떠하냐고요? 글쎄요 거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생각한 것이 있는데 지난번에 약속한 논문(論文)으로 넘깁[讓]시다. 그리고 기타 조선 형제를 대하는 때에 느낀 것은 직각적으로 다른 신문기자의 내방 시에도 말함과 같이 중류 이하의 사람들은 그 태도가 너무 유한(悠閒: 느리고 한가함)한 듯하여 재미없습디다. 더 좀 활기에 차고 노력하는 듯한 기분을 띠도록 하여야 합니다. ‘인류학(人類學) 상으로 본 조선민족은 어떠한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도 다음 논문(論文)에 구체적으로 쓸까 합니다. 그런데 내가 지금 아무리 바쁠지라도 (그날 아침은 최남선 씨를 京城監獄으로 찾을 약속이 있는 까닭으로) 이번에 조선을 본 느낌을 한 가지 말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은 


나는 조선을 보기 전에 먼저 우리 미국 사람으로서 조선에 있는 친우를 통해서 조선 사람은 남의 일에 충심을 다하기까지 극히 온순하여 중국 사람이나 일본 사람에게 없는, 우리 미국 사람과 같은 무슨 점(點)을 가졌으며, 또 웅변(雄辯)은 특히 조선 사람이 천재(天才)이라는 말을 들어 알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지금부터 10년 전 실제로 조선 사람을 대할 때에 내 마음속에 심히 섭섭케 생각한 것은 조선 사람은 온순하며 중국 사람이나 일본 사람에게 없는 다른 점을 가졌으며 또는 천연적 능변가인 소질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앞에 놓인 여러 가지 사명을 달성치 못할 것같이 보였으며, 저 사람들이 과연 과거의 거룩한 살림을 짓던 그 조선(祖先)의 후예일까? 하는 생각을 가진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당시로 말하면 조선 사람이 가진 이롭지 못한 형편이 우리 외래자(外來者)에게 그러한 관찰을 하게 된 것이었겠지요. 


그런데 이번에 와 본즉 오늘 조선 사람은 전일의 조선 그 사람이 아니요 모두 새로운 기세[勢]와 힘에 충만된 사람뿐인바 그 앞에 놓인 무슨 소임(所任)일지라도 능히 감행할 기세를 보입니다. 이것은 무슨 정치상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금일의 조선 사람은 앞에 닥치는 모든 기회를 다 붙잡아 자기의 앞길을 능히 열어갈 힘을 가졌다 함뿐이외다. 나는 이것을 심히 기뻐하며 조선 사람의 현재와 장래에 행복이 더욱 많기를 빕니다.” 운운  


부기 : 씨는 경성에서 1주간을 머물며 다방면으로 조선의 현상을 시찰하고 27일 경성발 귀국의 길에 올랐는데, 씨는 특히 본지의 독자를 위하여 귀국 후 이번 조선에서 보고 느낀 전부를 구체적으로 써서 경성에 잇는 씨의 지우(知友)를 통하여 본사에 기고하게 된바 우리는 독자 여러분과 같이 씨의 후의(厚誼)를 감사합니다.


***역자주-아마도 "조선에서 보고 느낀 전부를 구체적으로" 쓴 기사는 <개벽>지 대신에 <동아일보>에 실리게 된 듯하다. 대신 개벽사에는 짧은 '편지(手信)'를 보내왔고, 그것이 <개벽> 제14호(1921.08.01)에 게재되었다.


본지에 기여(寄與)한 '스타' 박사의 편지[手信]


일찍이 말한 바와 같이 스타- 박사는 본지(本誌)에 어떤 논문(論文)을 기고하기로 약속하였다. 그 약속의 대신인지는 모르나 지난 7월 말에 본사로 아래와 같은 편지[手信]가 왔기로 그 원문과 함께 번역문을 이와 같이 게재한다. 

"내가 이번 경성에 갔을 때에 인상(印象)적인 것은 활기(活氣)와 사업경영(事業經營)의 신정신(新精神)이었나이다. 그러므로 나는 조선 사람들이 자기들의 현재의 기회를 될 수 있는 대로 이용하려고 결정한 줄을 믿나이다. 만일 그들이 이와 같이만 하면 나는 그들이 다대(多大)한 진보(進步)와 견고한 발달을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나아가 전 세계 사람으로부터 존경과 무한한 호의(好意)를 얻을 것을 확신하나이다. 그런데 이 활기와 사업경영이 벌써 그것을 여러 가지 방면으로 보입니다. 그중에도 "교육"과 "독서열(讀書熱)"이 고귀한 흥미를 이끄나이다.

나는 천도교(天道敎, Chun-do)의 타는 듯하는 번영(繁榮)에 대하여 재미있게 생각하였나이다. 여러분의 신건축물(新建築物)은 교(敎)의 보급과 여러분(諸君)의 사업을 경영함에 가장 적당하고 생각하였나이다. 또한 귀지(貴誌)가 호평(好評) 중에 있으며 사회적 교육에 다대한 공헌을 한다는 말을 들었나이다.

귀지(貴誌)의 운동이 유익한 조선인의 자각(自覺)을 자극시키고 발전시킴에 있는 이상에는, 나는 그것에 대하여 나의 충심(衷心)으로의 동정(同情)을 아끼지 않으려 하나이다.

- 푸레데릭, 스타

[In my visit to Seoul this last tima I was impressed by a new spirit of energy and enterprise. I believe that the Korean people have decided to make the most of their present opportunities. It they do do, I am sure that they will not only make great propress and a sound development, but that they will gain the respect and best wishes of the world at large. This energy and enterprise show themselves in a thousand ways. Among them are a notable interest in education and a hunger for reading. I was interested in the evident prosperity of Chun-do. Your new buildings are well adapted to the propagation and carrying on of your purposes. I am told that your magayine is popular and doing a great work of popular education. In so far as your movement stimulates and developes a wholesome Korean selfcounsciousners, it has my hearty sympathy. Frederick Starr] 



























%23b



%23b



2조성환, 임동확

매거진의 이전글 다시, 개벽의 길에서 - 00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