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걸음 Dec 24. 2020

새옹지마에서 예의 염치까지

지난 한 주는 뼛속까지 파고든 한파가 되레 반가웠다. 첫눈과 함께여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도, 지난 1년 동안,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했던 코로나19 기사를 제외하고, 지구적인 관점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이슈로 부각된 것은 '기후위기' 문제가 아니겠는가. 지구 온난화가 가속돼서 지구 평균기온이 해마다 전 고점을 넘어서는 때에 그 위기에 쏠린 마음-위기감을 달래주는 '추위'라는 말이, 그래도, 반가웠던 게다. 알고 보면, 이 한파도 온난화의 역설일 테지만....


사실, 실상은, 언발에 오줌누기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제법 내린 첫눈이 쌓여서 눈꽃을 피우는 듯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말았다. 지구의 속살이 뜨겁게 열이 올라 차디찬 기온 속의 눈이라도, 견디지 못하는 게지. 코로나19에 걸리면 열이 오른다는데, 지구도 지금은 코로나19에 걸린 셈이 아닌가.


100년 전 스페인 독감은 3차 대유행을 거치며 비로소 잠잠해졌는데, 코로나19도 3차 대유행(세계적으로는 10-11월경 시작, 우리나라는 12월 들어서며 본격화)이 마지막 고비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치료제다 백신이다 전 지구촌이 들썩이지만, 이 기세를 꺾어 누르고, 마침내 평상(平常)한 사회로 복귀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한편으로, 코로나19 2단계에도 죽어나가는 자영업자 등의 고통스런 하소연을 들으면서도, 나는 우리가 코로나19 없는 세상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보다, 다시 코로나19 오기 전의 세계로 돌아갈까 봐 그것이 두렵다.


“다시는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라고, 전문가도 말하고, 대통령까지 말했는데,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이 코로나19가 종식되면, 다시 밤늦도록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다시 관광지가 미어지도록 여행 다니게 될 날만을 기대하고 기다리며 견디고 있는 것은 아닌가. ‘코로나 이전의 삶’ ‘본래 내가 누리던 스키-골프-술자리와  클럽 기타 등등’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현실의 책임을 정부로 돌리는 ‘언론’과 ‘야당’과 ‘전문가(?)’ 들의 입장을 한통속으로 싸잡아 예단해서는 안 되겠지만, 어떻게 보아도, 그들이 기준 삼고 있는 논리의 출발점은 ‘코로나 이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더 절실히, 더 긴급히는 아닐지라도, 지금 우리에게 더 근원적으로 필요한 백신은 코로나19를 예방하는 백신이 아니라, 우리 욕망을 제어하는 염치와 겸손을 기를 수 있도록 하는 마음의 빈 땅을 만들어 주는 백신이 아니겠는가. 이 지구상에서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실제로는 우리가 살아 있고 살아가는 것이 모두 그들 덕분인 뭇 생명, 제 중생, 이름 있는 것들과 이름 없는 것들까지, 살아 숨 쉬는 것에서부터, 말없고 뜻 없이 그러나 살아 있는 돌멩이나 공기 같은 것들에게의 염치와 겸손.  



저물어 가는 올해 1년을 돌아보면, '새옹지마'라는 말이 올해의 사자성어가 되어야 마땅함직하다. 대학교수들이 뽑은 올해, 우리 사회를 대변하는 사자성어는 '我是非他'(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라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로는 그런 조악한 조어보다 '새옹지마'가 훨씬 더 마땅해 보인다.


코로나19 유행 초기, 우리나라의 코로나19 확진자가 중국에 이은 선두권에 있을 때, 우리나라의 언론의 질타와 아우성은 물론이고, 세계 각국에서 서둘러 우리나라에 대한 봉쇄령을 내릴 때만 해도 대한민국은 미운 오리새끼였다.


그러다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한때 '대구-신천지' 발 대유행으로 최악까지 치달았던 대한민국의 코로나19 사태에 대응 태세는, 정은경 씨를 세계적인 인물로 만들기도 한 K-방역의 전범들이 속속 만들어지면서 인류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일약, 대한민국은 세계의 주목을 받는 국가로 발돋움 하는 일이 벌어졌다. 연이어 세계 각국의 6.25참전 용사나 입양아들에게까지 마스크를 보내며 이 사태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만드는, 기적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때마침 기생충이 오스카 상을 받는 쾌거와, BTS의 세계적인 열풍까지 더해지며 '국뽕' 분위기는 최고조를 연일 경신해 나갔다.  그러다가 최근 들어서는 그때보다 더 무서운 기세로 3차 유행이 전개되고 있다. 국민들의 마음은 겨울  한파보다 더  빠르게 식어가는 중이다. 전체 흐름을 놓고 보면,  역시 '새옹지마'의 고사성어처럼 일희의 사건과 일비의 사건이 숨쉴 틈 없이 교차하는 한 해였다.


코로나19의 이러한 롤러코스터 형 전개는 그대로 정권에 대한 지지 흐름으로 연결되었다. 코로나19 팬데믹에 대한 성공적인 대응으로 한때 70%를 상회하기도 했던 현 정권에 대한 지지율은 - 여론 조사 결과를 신뢰한다면, 현재는 부정 3에 긍정 2 혹은 그 이하로 역전된 상태이다. 이것은 정확하게 코로나19 확산-진정 흐름과 연동되고 있으며, 다만, 거기에 더하여 '부동산 가격(매매가, 전세가) 폭등' 이슈가 중첩적으로 작용한 점이 있다. 이 또한 새옹지마의 흐름과 그대로 연동된다. 그러니, 현재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부동산 민심과 부동산 불안증이 앞으로 또 어떻게 될지, 지켜 보자. 내년에는 좋게 말하면 조정기, 심하게 말하면 곡소리 나는 폭락장이 펼쳐질 거라는 전망도 슬슬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나는 이 문제에 대단히 분노스러운데, 검찰개혁에 저항하는 검찰과 그 주변(법원? 야당?, 일부 친여?) 인사들의 완강한 '반' 개벽적 저항이다. 개벽적인 사안에서야 시시비비가 엊갈리는 일들이 없지 않겠지만, 이 문제의 기분 기조가 형성되는 것은 공수처법 설치 단계에서부터 몇년 째 저항을 이어오고 있는 저들의 기득권 수호(?) 움직임의 연장선이라고 본다. 노무현 정권 때 '사학법 개정' '국보법 개정'을 둘러싸고 박근혜를 비롯한 한나라당(?)과 기득권 세력이 보여주었던 일치단결한 저항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검찰은 검찰대로, 자기들의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나라가 망하든 말든, 국민이 (코로나19로) 죽든 말든 - 오히려 그 문제로 곤경에 처한 정부의 처지를 십분 활용하여 - 죽기살기식 인파이팅을 계속하고 있다. 국회의석 180석을 보유한 거대 여권은 여지 없이 밀리는 형국이다. 그러나 실제로 밀리는 것은 거대 여당이라기보다는, 촛불 혁명 이후를 기대하는 간절한 민심의 바람이고, 새 세상을 기대하는 민중의 꿈이고, 민주-사회의 미래이다. 검찰이 집요하게 '권력층=범여권'에 대해서는 가혹한 잣대를, '야권'에 대해서는 관대함을 넘어 후한 인심까지 베푸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은, 그들 나름대로의 정의감(?)의 발로라 말할지도 모르겠으나, 이러한 일방적인, '기울어진 운동장' 사태를 지켜보는 '힘없는 국민'들의 복장은 곪아 터져서 짓물이 흐를 지경이다. 한마디로 '정도(定度)'가 웬만해야 하고, 분수(分數)가 있어야 한다. 다시 더 줄이면, '염치(廉恥)'가 있어야 한다.



결국, 좀더 근본적인 것은, 우리의 욕망과 염치 문제이다. 20-30의 '영끌-부동산' 이슈만 하더라도(이것이 팩트에 가깝다는 것을 전제로), 결국 언론이 이러한 사태를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들의 불안감을 들쑤셔서 '부동산런 사태'를 만들어 낸 것은, 일정 부분 그들(언론) 책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검찰을 비롯한 기득권 세력의 기득권 수호 움직임도 결국은 기득권이 가져다 주는 '욕망 충족의 쾌감'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 때문이 아니겠는가?


좀더 범위를 넓혀서 보면, 사실은 그래야만 진실이 보이는 상황인데, 우리는 지금 제도 개선이나, 한 사람의 통치자의 결단, 또는 한 나라 국민의 의지 등으로 극복할 수 없는 정도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코로나19나 기후위기만이 문제가 아니고, 그로 인한 경제위기나 부동산 가격 폭등만이, 그 당면하고 절박한 문제!!!, 만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인간됨--윤리적인 것만이 아니라 물리적이고 문명적인 차원을 아울러서--자체의 근본적인 혁신, 이것을 일러 '다시개벽이라 하는데, 그 '다시개벽'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출발점이 다름 아닌 예의와 염치, 그중에서도 염치가 맨앞에 놓인 그런 갈림길에 서 있다. 죽음으로 갈 것인가, 다시 살 길로 갈 것인가?

 

'염치'는 일찍이 공자와 맹자가 강조한 덕목이기도 하니, '꼰대'스럽다고 할 수도 있으나, 그만큼 오래된 인류 보편의 덕목이라는 뜻도 된다. 지금부터 160년 전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 선생도 사람의 사람다움은 결국 '예의와 염치'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그런 고전(古典)적인 진리가 아니라도, 예의와 염치는 어느 시대, 어느 상황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덕목이 아니겠는가.


그런 예의와 염치가 없는 자들의 행태가 나라의 근간을 흔들고, 국민의 생명을 좌우하는 시대라는 점에서, 이 시대는 여전히 짐승의 시대이다. 그 무례와 몰염치를 어찌하면 깨끗이 씻어내 버릴 것인가? 옛날 청렴지사들은 강물에 더러운 귀를 씻었다고 하지만, 지금에는 그 더러움을 강물에 씻는 것만으로도 강물과 바다마저 오염이 되고 말 정도로 차고 넘치니, 그것도 해서는 안 될 일이 아닌가.


이 새벽에, 새옹지마와 예의 그리고 염치를 생각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세상 사람에게 나의 외로움을 알리지 말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