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걸음 Dec 22. 2020

세상 사람에게 나의 외로움을 알리지 말라!

[UBO Photo essay-013] 에세이1

2020년 12월 20일 

"외로워서 그래!"


한마디 말로, 한 사람의 행동을 설명하는 건 다분히 폭력적이다. 

그러나 결국 사람은 '말로써' 생각하고 '말로써' 소통하는 동물이니, 말하지 않을 수도 없다. 


엊그제 <개벽학 스튜디오>(동학+천도교회월보+개벽 등 공부 모임)에서는 어찌 하다가, 발제문의 주 내용에서 살짝 비껴선, 한 시인(김지하)의 "죽음의 굿판을 걷어 치워라!" 이야기에서 시작되어,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일제강점기 친일 문인이나 사상가들의 '작품'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이야기까지 이야기가 확장되었다.


그 주제는, "목욕물이 더러워졌으니, 그 목욕물 안에 무엇이 담겼든지간에 함께 버려야 한다."는 주장과 "목욕물을 버리느라고 그 안에 담긴 아이까지 버리지는 말아야 한다."는 주장 사이에서 접점 없는 평행선을 그을 이야기 주제이기는 하다. 각자가 처한 상황, 지켜 가는 삶의 기본자세나 입장에 따라, 둘 사이 양극단이나, 아니면, 그 가운데 어디쯤에 자기 의견과 태도의 좌표가 정해져 있을 것이다. 


그중에 한 대목.


김지하 시인의 '죽음의 굿판' 글에 관련된 이면사를 지지난 주 신동엽문학관에서 관장님으로부터 들은 이력도 있고 해서, 나는 김 시인이 그 글은 우선은 '생명의 존엄성'을 지켜야 한다는, 김 시인의 '생명주의' '생명사상'의 기반 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측면 외에, 아마도 어쩌면 김시인의 외로움이 그러한 단발마로 터져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의견을 조심스레 피력하였다. 


한마디로 "외로워서 그런 거야!"라는 말인 셈이다. 


그러나 이때의 외로움이, 단순한 건 아니다. 어떤 점에서는 '우주적 외로움'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테지. "생명평화"에 대하여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소리치기를 몇 년! 세상(당시)의 동지들은 여전히 민주! 투쟁에 매몰되고, 더 큰 그림, 더 넓은 세상 -- 그것이 결국은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세상이기도 한데 -- 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것, 내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없다는 자괴감과 외로움이 그러한 목소리로 터져 나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 그걸 당시 조선일보에 실었다는 점이 일을 꼬이게 하는 출발점이고, 그 진정성을 '화'와 '호통'으로 일관하며 이야기했다는, 그 '내지름의 미학'이 오히려 독이 되어 버린 사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 것이다. 당시의 실상의 세밀한 디테일에 대한 기억은 사라져 버리고, 이제 아련한 기억과, 그래서 막연한 추측으로 재론하기에는 너무도 큰 사건이기는 하지만, 돌아보면, 그런 사건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고, 그것이 마지막도 아니었다. 


이광수의 "민족개조론"도 그에 앞선 도산 안창호의 "민족개조론"의 연장선상에 있는 부분과 그로부터 비껴나간 부분을 잘 가늠하여 가며 재음미해 볼 필요도 있다는 생각이 있고, 최근의 철학자 최진석 님의 "5.18 이야기"도 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어서 그걸 다른 태도로 들여야볼 여지는 없는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하는 말이다.  


사람을 망치는 세 가지 독(毒-욕심+분노+어리석음) 가운데 '분노' 항목에 가장 크게 공감하고 마음이 머무는 사람으로서, 분노 이전의 감정은 외로움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기까지. 


그러나 외로움을 떨치기 위해서, 군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라고, 수많은 선현들과 선배들이 이야기한바 있다. 여럿 속에서 삶의 보람을 주로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여럿 속에서 되려 외로움이 커지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외려움을 즐기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하더라도, 외로움을 이용하고 활용하며, 외로움을 또다른 삶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힘으로 삼는 것이 더 나은 해결책인 사람도 있는 것이다. "슬픔도 힘이 된다"는데, 외로움이라고 그러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외로움이 지쳐, 외로움에 휘둘려 분노나 자살로 나아가지 않을 수만 있다면, '외로운 인생'도 하나의 인생이 되지 못할 이유는 없는 셈이다. "우주적 외로움"의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그런 종류의 외로움은 '수운 선생'이나 '해월 선생'이 느꼈던 외로움과 닿아 있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외로움의 기운(氣運)이 하늘(위로-안으로-속으로-아래로-그리고 밖으로)로 뻗어서 동학과 개벽이 태어난 것이 아니겠는가. 그 외로움의 끝까지 가면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사람은 덕(德)을 쌓게 된다. 일찍이 공자가 “덕은 외롭지 않으며 반드시 이웃이 있다.”("子曰, '德不孤, 必有鄰.'" 논어, 이인(里仁))고 한 말이 이에서 비롯된다. 


그런 점에서 외로움을 자초하고 자처하지 않으면, 덕을 쌓고, 덕을 새롭게 할 여지도 없다. 덕이야말로, 외로움의 산물이다. 그러나 그때 외로움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 "외로워서 그래!"라는 말이 들린다면, 그건 '공부가 도로묵이 되어 버린'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렇다고, 군중 속에서 숨어서 외로움을 감추는 것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견뎌야 하는 '외로움'은 그 사이, 중용의 길이다. 

살아가면서, '외로워서 그래1'라는 말은 듣지 않도록 할 일이다. 


"세상 사람에게 나의 외로움을 알리지 말라!"



매거진의 이전글 언제 우리 자신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