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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걸음 Dec 25. 2020

한울님이-1

牛步詩-015

2020년 12월 25일, 파주, 기산저수지, 해넘이

한울님이-1


한울님은 "나도 또한 개벽 이후 노이무공(勞而無功) 하다가서 너를 만나 성공(成功)하니"라고 하셨지만...(용담가)


오만년 동안

한울님*1

수운만 만났겠는가


수운에게만

말을 걸었겠는가


노이무공(勞以無功)*2이라 하였으니


모든 사람을 만나고

모든 짐승을 만나고

모든 물을 만나고

모든 바람, 햇살, 이슬, 벌레, 구름, 모래, 틈, 도둑놈, 구멍, 골짜기, 나무 꽃, 나비, 벌, 새를 만나고

봄도 만나고 가을도 만나고  

슬픔도 만나고 기쁨도 만나고  

만나고, 만났겠지


만나는 사람마다

만나는 짐승마다

만나는 물마다

만나는 바람, 햇살, 이슬, 벌레, 구름, 모래, 틈,  도둑놈, 구멍, 골짜기, 나무, 꽃, 나비, 벌, 새마다

봄마다 가을마다

슬픔마다 기쁨마다   

말을 걸고, 걸었겠지


노이무공이라 하였으나

공이 없다면

그 모든 만남이 가능하였겠는가.

그 모든 것들이 존재하기나 하였겠는가


한울님의 말을

듣고도

은혜라고도 하고

조화의 자취라고도

지지(只知) 무위이화라고도 하고*3

그 이치를 바로 살피지 못한 것이니

노이무공이라 하였지


누가 한울님을 보지 못하였겠는가

누가 한울님을 듣지 못하였겠는가

쇠항아리 속에도 한울님이 들어 있는데

살아있는 누구라도

찰라인들 한울님과 떨어져서 살았겠는가*4


보고도 본 줄 모르고

듣고도 들은 줄 모르고

한울님을 사람으로만 알고

한울님을 짐승으로만 알고

한울님을 물로만 알고

한울님을 바람으로, 햇살로, 이슬로, 벌레로, 구름으로, 모래로, 틈으로, 도둑놈으로, 구멍으로, 골짜기로, 나무로, 꽃으로, 나비로, 벌로, 새로만 알고

봄이 오면 오는 줄로만 알고

가을이 가면 가는 줄로만 알고

네가 웃는 것을 네가 웃는 것으로만 알고

내가 우는 것을 내가 우는 것으로만 알아

노이무공이라 하였지


가고 다시 돌아오지 아니함이 없는 이치*5를 모르니

노이무공이라 하였지


오만년의 오만년의 오만년의 오만년 동안에

한울님이 오직 수운만 만났겠는가

수운에게만 말했겠는가


한울님이 한울님인데

노이무공하였겠는가?


내가 여기 있고

꽃이 저기 있는데

별이 빛나고

바람이 불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데


한울님이

(2020.12.25)


*1. 한울님 : 동학 천도교에서 '신앙'의 대상, 천주(天主)

*2. 노이무공 : "힘써 노력하였으나 공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 말은 경신년(1860) 4월 5일, 수운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할 때 만난 한울님이 수운에게 한 말이다. 동학-천도교의 한울님은 이처럼, 처음에, '무공(無功)'한 한울님으로 등장하였다. 이를 그동안 '무능함을 고백하는 한울님' - 수운을 만나서 처음으로 무극대도(無極大道)를 창도하게 됨을 표현한다고 하였다. 이 시(詩)에서는 그 진실을 재해석하였다. 한울님이 공이 없었다니, 어불성설 아닌가.

*3. 여기까지 3행[은혜, 조화의 자취, 노이무공] 등은 한울님의 실상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 일부 속성을 일컬어 말하는 '완전히 밝아지지 못한' 세상 사람들의 말이다. ft.논학문.

*4. 신동엽 시 : ft.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구름~

*5. ft.논학문 : 受其無往不復之里. 수운 최제우는 "한울님으로부터 받은 천도=무극대도를 "가고 다시 돌아오지 아니함이 없는 이치"라고 하였다. 무왕불복은 '주역'에도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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