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이해, 타인과의 소통, 멋진 우정
10여 년 전쯤, 한국 초등학교에서 일하던 미국인 애런이 내게 물었다. "What is your favorite restaurant?" (네가 제일 좋아하는 식당이 어디야?). 당시 나는 그 질문이 어색하게 느껴져 머뭇거리다 결국 대답하지 못했다. 그와 나는 평소 좋아하는 음악, 영화, 책에 대해 친밀한 대화를 나눴기 때문에 애런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네가 가장 좋아하는 식당이 없다고? 정말이야?"
‘favorite’은 한국 초등학교 영어 시간에 배우는 쉬운 단어이다. 활용 빈도가 높고, least favorite(싫어하는), all-time favorites(늘 좋아하는) 등 응용 표현도 많다. 하지만 어휘는 지정된 장소에 끼워 넣으면 딸깍 맞춰지는 레고 부품이 아니다. 애런의 말을 듣고 내가 안개에 휩싸였던 건 그 질문이 당시까지 내게 익숙한 맥락에 놓여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네가 제일 좋아하는 식당이 어디야?'라는 표현보다 ‘이 동네 맛집이 어디야?', '대전에서 유명한 식당이 어디야?'라는 표현을 더 많이 쓴다. 당시 애런이 이와 같이 질문했다면 나도 몇 군데의 식당을 어렵지 않게 추천했을 것이다.
‘유명한’, ‘인기가 많은’ 등과 달리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란 표현에는 개인적인 취향과 사적인 감정이 담긴다. 'my favorite restaurant'이란 단어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도 내가 언제든 마음 편히 들를 수 있는 작고, 소박하고, 친숙한 식당에 가깝다. 영어권 국가들의 영화에서 my favorite tree(내가 가장 좋아하는 나무), my favorite uncle(내가 가장 좋아하는 삼촌), my favorite spot(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과 같은 표현을 자주 듣는데, 한국에 없는 말은 아니지만 다소 어색한 느낌이 들 수는 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한국에도 ‘최애’, ‘인생 영화’, ‘인생 음악’ 같은 신조어가 생겼다. ‘최애’는 영어의 ‘my favorite’, 인생 영화는 ‘my all-time favorite movie’ 정도로 직역할 수 있다. 추측건대, 영어식 사고와 문화에 친숙해진 한국의 젊은 세대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my favorite’에 상응하도록 조어하지 않았을까 싶다. 즉 ‘favorite’의 맥락을 총체적이고 효율적으로 구현하는 한국어가 있었다면 ‘최애’와 같은 신조어는 생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유명한 맛집, 유명한 나무’와 ‘내가 좋아하는 식당, 내가 좋아하는 나무’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밝히는 행위는 '내가 누구인지 혹은 내가 어떤 사람이고 싶은지'를 드러낸다. 예를 들어 90년대 그런지 락을 좋아한다고 선언하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와 정체성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당사자의 머릿속에 들어가 볼 수는 없지만, 그건 적어도 하얀 셔츠에 까만 바지를 입고 옆구리에 성경을 낀 채 걷는 몰몬교 신자의 그것과는 매우 다르다.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에도 좋아하는 것과 정체성의 연결 지점이 드러나는 대사가 있다. 6살 무니는 무직인 엄마와 함께 모텔에 살지만 영화는 이를 마냥 어둡게 묘사하지 않는다. 무니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 위에 앉아 식빵에 잼을 발라 먹으며 친구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이 나무를 왜 제일 좋아하는지 알아? 쓰려졌는데 계속 자라잖아..”(“You know why this is my favourite tree…’cause it’s tipped over, and it’s still growing”). 정말 근사한 대사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은 중요한 자질이며 자기 이해와 성장을 위해 필수적이다. 개인으로서 그리고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으로서도 그렇다. 자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단 한 번도 ‘이것이야말로 내가 좋아하는 무엇이다!’라는 환희를 느껴본 적이 없는 사람은 타인과의 소통에도 서툴기 쉽다. 사람의 인품과 성격을 좋아하는 식당, 음악, 풍경, 나무 등에서 찾는 건 너무 피상적이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인간의 자아는 단단하고 고정 불변한 무엇이 아니다. 외부의 무언가를 경유하지 않고 내면에만 침잠해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외부 세계와의 교류 속에 끊임없이 스스로를 구성해간다. 자신을 외부의 무언가와 온전히 일치시키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낀 사람들은 자기를 드러내는 용기와 소통의 의지를 갖게 된다.
사람들은 흔히 영어권 국가의 사람들이 아시안들에 비해 더 개인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고 말한다. 한 편의 다른 글로 풀어내야 할 만큼 복잡한 주제이지만 개인적인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동의하기 어렵다. 국적과 상관없이, 자기에 대한 이해가 높은 사람들은 타인의 고유성을 중시하고 의사소통에도 개방적이다. 한국 사람들은 집단주의적이고 얼핏 이타적으로 보이기 쉽지만 지나치게 타인의 눈치를 보고,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타인과의 관계, 시민으로서의 책임과 사회의 역동에도 낮은 이해를 보이고 중요한 순간에 오히려 피상적이고 이기적인 판단을 한다. 다시 말하지만 국적의 문제는 아니고 개인차가 있다. 하지만 언어와 문화의 그물은 분명 존재한다.
나는 기본적으로 좋아하는 게 많은 인간이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마음껏 드러내고 나눌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싶다. 'favorite', '최애'라는 말이 씨앗이 되어 사람들이 스스로가 좋아하는 것들을 더 많이 찾게 되면 좋겠다. 그것들은 분명 사람과 사람 사이의 깊고 친밀한 연결의 다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