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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희 Oct 04. 2023

정말로 사랑

2023 07. 29.

고1 때 이후로 내 머릿속에서 '순수'는 무지, 폭력, 강박, 잔혹함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정확한 시점을 기억하는 이유는 그때 미셸 투르니에의 에세이를 읽었기 때문이다. 그는 '순수성과 순진성'의 차이를 논하며 '순수성'이 초래하는 육체적 피해(극도로 순수한 물은 유기체에 독극물과 같은 영향을 끼침)는 순수에 대한 정신적 강박이 역사에 미친 죄악과 파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다(정치적 정화, 종족의 순수성 보호 등). 나는 지금도 순수성을 강조하는 목소리를 경계한다. 어떤 정치색이 없는 순수한 유가족, 순수한 피해자, 해외여행과 샤넬 따위 꿈도 못 꾸는 순수한 실업급여 수급자. 


내가 '윤석열 퇴진' 구호와 기조가 싫은 이유는 이 구호가 정치적이어서가 아니라 전혀 정치적이지 않아서다. 나는 '윤석열 퇴진'이란 구호가 참 순수하게 느껴진다. 실력을 쌓아 선거에서 승리할 노력은 하지 않고 퇴진시킬 궁리부터 해봤자 (이미 겪었듯) 근본적인 변화 없이 쳇바퀴만 굴러갈 거라 보기 때문이다. 사회 각계각층 지도부에 늙은 얼굴을 한 어린이들이 똬리를 틀고 있다는 생각도 자주 한다. 나이 든 사람들이 도대체 왜들 그리 순수하고 철이 없냐고 따지고 싶을 때가 많다. 나는 순수하지 않고 순수하고 싶지도 않다. 순수한 아이가 아니라 현명한 어른으로 나이 들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순수해 보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왜곡 없이 반듯하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만약 그분들 말대로 내가 흔치 않은 강인한 순수함을 한 조각이나마 지니고 있다면 그 근원이 무엇일까 생각해 봤다. 답은 금방 나왔다. 사랑이다. 내가 넘치도록 받아왔던, 아직 방법은 모르지만 어떻게든 돌려주고 싶기도 한 ‘사랑’ 덕분이다. 혐오와 배제, 순수성 강조는 우리를 약하게 만든다. 정말로 필요한 건 사랑이다. 사랑이 우리를 강하게 한다. 지난 주 내내 마음이 좋지 않았던 내게 다짐 차 건네는 말이기도 하다.


(써놓고 보니 작년에 썼던 ‘기묘한 이야기’ 리뷰가 생각난다)


https://brunch.co.kr/@sickalien/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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