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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다비 Aug 12. 2024

나는 씩씩하게 뚜벅뚜벅 살아갈 거야

두서없는 이야기

오늘은 어쩌다 보니 혼자 산책을 했다.

걷다가 문득, 엄마 생각이 났다.

나는 주로 혼자 있는 시간에 엄마랑 통화를 했었다.


오랜만에 엄마한테 전화나 한번 해볼까?

전화를 꺼내다가 마음이 서늘해졌다.


아.. 나 이제 엄마 없지.







막내이모는 나랑 특별한 사이다.

나의 유년기 시절

광주에서 살다 서울로 올라온 이모는

한동안 내 방에서 함께 살았었다.

당시 나는 이미 혼자 방을 쓴 지 수년차 짜리 꼬마였는데, 이모 품에 포옥 안겨 이모의 살냄새를 맡으며 종알종알 이야기를 나누다 이모가 가만가만 쓸어주는 머리칼의 감촉을 느끼며 잠드는 게 너무너무 행복하고 좋았다.


그런데 이모가 어느 날부터 퇴근한 후 다저녁때 다시 밖엘 나가서 두어 시간씩 있다 들어오는 날들이 생겼다.

그리고 한밤에 방에서 예쁜 옷을 입고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다시 곱게 벗어 걸어두고 이부자리에 눕기도 했다.

처음에 어린 나는 이모의 그런 모습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몰라 신기하게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다 이윽고 알게 되었다. 내가 이모부라고 불러야 할 어떤 남자분의 존재가 생겼다는 것을.


사실 나는 산도적 같은 남자에게 사랑하는 이모를 빼앗긴 경험이 이전에 한번 있었다. 1화에 잠깐 등장한, 밭에서 소같이 일을 하셨었다는 그 이모 이야기다. 이모가 비록 웬만한 남자보다도 일을 더 잘했지마는 얼굴이 얼마나 곱고 키도 늘씬하게 크고 예쁜지 모른다. 지금도 이모는 서구적인 미인형 느낌을 갖고 계신 할줌마다.

그때 나는 아주 아주 어렸고 이모가 데려온 아저씨가 정말 너무 싫어서 아침에 일어나면 이모의 어깨너머로 그 산도적 같은 아저씨가 아직도 있는가 살그머니 내다보곤 했었다. 지금도 나는 큰 이모부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 이모보다 너무 못생겼고, 내 사랑하는 이모를 너무 고생시켰기 때문이다.


아무튼 내가 끔찍이 사랑하는 이모를 웬 남자에게 뺏겨 본 경력자였음에도, 막내 이모의 연애는 또 충격이었다.

큰 이모가 우리 집에 진짜 자주 놀러 왔었는데, 결혼하고 나서 확실히 나랑 놀아주는 날도 줄어들고 이모 아기가 태어나고 그러면서 멀어져 갔던 기억들이 머릿속에 스쳤다.


이모랑 이제 같이 못 자는 거야? 이모는 이제 다른 집에 가서 사는 거야? 하는 서운함이 많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원래 난 혼자 방을 썼었는데_ 그러니 이제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 것 뿐인데도 한동안 막내이모가 사라진 빈자리가 많이 쓸쓸했던 기억도.


나는 막내이모를 참 많이 사랑했고

지금의 내 남편, 팔도를 유랑하면서도 14년째 좋아죽는 이 남자를 만나 연애로 그치지 않고 결혼까지 골인하게 된 데에도 막내이모와 이모부의 영향이 매우 크다.


이모부가 글쎄, 나의 이모를 그렇게나 아끼고 사랑하더란 말이지. 속 뚜껑 열어보면 인생의 아픔은 밸런스가 다를 뿐 총량은 비슷하다는 말이 있듯이 분명 우리 이모의 삶도 녹록지만은 않으셨을 것이다. 완도에서 또 배를 갈아타고 한참을 또또 들어가야 있는 섬마을 시댁. 명절마다 거기까지 오가는 것만도 쉽지 않았을 테다. 섬사람들의 거침은 또 어떻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울 막내이모를 볼 때마다 꿀이 떨어지는 이모부의 눈빛을 매주 보았다. (같은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그러면서 어렴풋이, '저런 남자를 만나야 사랑받고 행복하구나'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지금 내 옆에서 자고 있는 이 남자는 우리 이모부와 많은 면에서 비슷하다. 풍채가 곰 같다는 것, 웃을 때 보조개가 들어간다는 것, 갈색 눈동자를 가졌다는 것 등.








마흔 살, 슬픈 생일이 시작되고 있다.

이번 생일에 나는 평생 처음으로 엄마가 없는 생일을 보낸다. 이 생일에 막내이모가 제일 먼저 축하한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엄마의 장례식, 영정사진 앞에서 우리 둘이 꼭 끌어안고 눈물을 지으며

"이모, 나 이제 엄마 없어. 이모가 내 엄마 해줘. 나도 이모 딸 없으니까 이모의 딸이 되어드릴게."

"그래 그러자"

했던 것을 이모가 기억하셨던 것일까.

아직 생일이 되기 하루 전인데 이모에게 선물과 문자가 왔다. 이모는 내 생일을 잊지 않고 계셨던 거다.


장례를 마치고 며칠 후 이모에게 전화가 왔었다.

원래 이모는 음력으로 생일을 쇠시는데, 그냥 문득 달력을 돌려보니 이모가 태어난 해의 양력날짜가 우리 엄마의 기일이더라며, 정말 신기하지 않냐고. 그리고 우리 엄마의 해양장 위치는 이모의 생일(음력) 날짜와 같은 21이다.

21번 위치에 엄마를 내려드린다는 안내를 듣고 이모가 이 자리는 죽을 때까지 절대 잊어버릴 수가 없겠다며 한참 동안 눈시울이 붉어지셨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이모와 나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사이일까

이모는 우리 엄마가 예수님을 알려주었기에 이모부도 만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며

엄마가 자연 치유하며 보름에 기백만 원씩 들어가는 치료비의 상당 부분을 계속 지원해 주셨다.

내가 고마움을 표하면 이모는 늘 말씀하셨다.

"너의 엄마이기 이전에 나의 언니였어. 이모는 언니를 챙기는 거니까 너는 부담 갖지 않아도 돼" 라고_


나는 안다.

언니치료비를 계속 지원하는 게 결코 쉽지도, 당연하지도 않음을.

또, 아무리 아내가 사랑하는 언니라고 해서 음식이며 봉투를 계속해서 주게끔 허락하는 남편은 세상에 드물다는 것도 말이다.



산책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엄마가 내게 주신 마지막 선물인 것 같다고.

엄마 덕분에 이모와 더 특별해질 수 있었다.


이 외에도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니 울지 말아야지.

씩씩하게 뚜벅뚜벅 살아가는 거야.


그래도

엄마가 너무 보고 싶은 지금 이 밤엔 잠깐 울래..





엄마를 보내드리고 내려가는 길. 유난히 맑고 밝던 하늘.



안녕 ෆ⸒⸒






8월 8일 연재일을 지키지 못해 죄송합니다.
목차는 잡아두었었는데, 글이 써지질 않더라고요.
밝은 기운을 넣는데에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두서없는 이야기가 또 발행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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