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도 언급한 바 있듯이 우리 어머니는 처녀 적 상경하여 이제까지 송파에 사시는데 그 어떤 웬만한 경상도 토박이 분들보다 더 뚜렷한 사투리 억양을 갖고 계시다.
듣기에 따라 약간 기분이 안 좋으신 것 같기도 하고_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음성을 들으면 무슨 다급한 큰일이 난 것인가 철렁하기도 하다. 억양의 고저 폭 만큼이나 목청의 볼륨도 참 크시기 때문이다.
서울-인천-제주도-충청도-전라도-그리고경상도까지 살아보면서 느낀 점은 각 도마다 정말 그 지역만의 색깔과 특성이 있다는 것인데, 사람들이 왜 충청도를 양반의 도시라고 하는지 왜 전라도 사람들이 시민 항쟁을 하게 되었는지 하는 점이 조금은 느껴진다는 것이다.
경상도 사람들은 화통하고 적극적이다.
매사 적극적이신 우리 어머님은
할 말이 있을 땐 곧바로, 곧바로, 곧장 전화를 주신다.
그래서 결혼 생활을 시작하고 처음에 나는 어머님의 적극적인 말투와 더불어 적극성으로 무장한 통화 빈도에 기함할 지경이었다.
정말 뭣만 하면전화가왔다.
결혼 후 작전동 신혼집에 살 때는 어머님이 <이번 주에는 쉬는 날 집에 안 오느냐>고 매주 전화를 주셨다. 때는 5인 이상의 사업장이라면 모두 주 5일 근무를 해야 한다고 공식적으로 제정된 해였다. 하지만 부목사는 6-7명이 있는 곳이라도 그럴 수가 없으며 월요일에 달랑 하루를 쉬지만 그마저도 각종 지방회 행사라든지 교회에 장례가 나면 자동 반납이다. 쉬는 날이어도 새벽예배는 나가야 하니 편히 늦잠 한번 자는 날이 없다.
그럼에도 이번 주엔 어디가? 집에 안 올 거야? 하고 주일날 저녁과 월요일 점심때 꼭 전화를 하셨다.
그래서 친정 동네에 있는 신혼집임에도 친정에 갔던 적이 세 손가락에 꼽는다. 그리고 우리가 작전동 신혼집에서 반년만에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송파와는 한강다리 하나만 건너면 닿을 거리가 되자 어머니는 4년간 매주마다 우리 집에 오셨었다.
한 날은 어머님 친구분이 전화가 오셔서
또 아들네야? 왜 이렇게 자주가?!! 라고 하시니
뭐가 자주야 6일 만인데! 하고 대답하시는 걸 듣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주일날 저녁 개그콘서트(남편이 애청자) 시그널음악이 나오면 주방에서 손이 덜덜덜 떨리고 심장이 벌렁대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만날 일(=Every Monday)이 생기면 통화의 빈도는 그야말로 폭주를 하는데,
뭐 먹으러 갈 거야? 식당 얼른 잡아.
(당시엔 이 앞부분이 너무너무 크게 들려서 그 뒤에 항상 따라붙던 "너희들 먹고 싶은 곳으로 가자"라는, 우리들 맛있는 식사 사주고 싶어 하시는 마음이 담긴 사랑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과일 뭐 필요한 거 없나?
(아버님이 과일가게를 하시기 때문에 이미 제철과일로 답은 정해져 있다/ 너 혹시 특별히 생각나고 먹고 싶은 건 없니? 하는 뜻은 내게 전해지지 않음)
반찬은 다 묵었어? 아직이요.. 왜?!
(집에서 밥 안 차려 먹었어?? 하는 질책으로 들림)
등등...
나는 가장 친한 친구와도 그렇게 많은 연락을 하지 않기에, 시어머니의 링 마이 벨은 온통 그냥 다 힘든 점 투성이였다.
어머님이 그날 통화 첫 타자를 나로 잡으시면 계속 이전 발신지로 재다이얼 재다이얼 하시며 끝까지 나한테 걸게 되시는 거고 남편으로 첫 타자를 잡으시면 남편에게 전화가 계속 오게 된다.
곧이곧대로이고 적당히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법이 없는 나는 전화가 오는 걸 봤는데 안 받는 건 일종의 기망행위와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끊고 나서 3분 5분마다 다시 걸려오는 전화 때문에 혼비백산할 것만 같았다.
한결같이 자상하게 전화받는 남편의 모습에 '역시 아들은 대단하구나. 목사라서 그런가' 하며 속으로 리스펙 하였더랬다.
그런데 얼마 전에 나는 보고 말았다.
<어머니>라는 발신자 이름이 진동과 함께 화면에 떴는데 조용히 전화기를 엎어 놓는 남편의 모습을.
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머니 아들로 40여 년을 살아온 당신도 때로 벅찬 거였어? 아휴, 난 그것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