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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다비 Nov 12. 2023

명의를 만나러 가는 길

명의는 괜히 명의가 아니다

이미 대학병원에서 두 차례나 수술받은 환자지만, 그래도 명의 선생님께 진료 한 번 받아보고 싶었다. 병원의 규모가 나를 살려주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다른 교수로 바꾸고 병원을 옮긴다는 게, 가벼운 일은 아니다. 고민하고 망설이다가 얼마 전에 비로소 용기를 내어 명의 선생님께 예약을 넣어두었던 참이었다. 그러던 중에 이 사달이 난 것이다.


내년에 초진 예약이 잡혀 있었지만 급변한 내 상황으로 인해 그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도저히 자리가 없나요? 혹시 중간에 캔슬된 사람 없어요?" 병원에 전화를 걸어 간절한 마음으로 물어보는데 애써 감춰도 목소리에 눈물이 묻어나갔다. 다른 교수님도 있다고 하셨다. 명의 선생님께 꼭 진료를 보고 싶은데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어서 전화를 드렸다고 말씀드렸다.  그러면 그냥 외래 있는 날 아침 일찍 와서 8시 전까지 산부인과에서 대기표를 뽑으면 된다고 알려주셨다.


전화를 끊고 한참을 울었다.

됐어, 이제 정말 선생님 만날 수 있어.

명의 선생님은 나를 어떻게 진단하실까.


선생님의 카카오스토리에 들어가 진료실 일지 글을 읽으며, 힘이 되다가 울다가 지쳐 잠들다를 반복했다.

그렇게 낮과 밤이 흘러갔다.

나는 갇힌 시간 속에서 침대에 계속 누워 있고 아이들과 남편은 학교에 직장에 나갔다 들어오는, 영화에서 보는 편집기술이 내 삶에 펼쳐졌다.





드디어 내일이다.

밤새 잠이 오질 않았다.

새벽 세시에 일어나 준비를 했다.

준비를 할 것도 없었다. 끝없는 기다림이 이어질 테니, 편하게 입고 가는 것뿐이었다.

캄캄한 어둠을 뚫고 달려 병원에 네시반에 도착했다. 텅 빈 병원에 오직 산부인과만 불이 켜져 있었다. 그 시간에 도착했는데도 내 번호는 4번이었다.

나만큼 절박한 여자들이 이미 몇 와 있었다.


일곱 시가 되니 포스 있어 보이는 분이 들어오셨다.

(열 명이 되자 현장접수는 마감됐다)

접수번호 순서대로 우리들을 불러 상담을 하셨다.

일반적인 산부인과 문진과는 차원이 다른 질문들을 하셨다. 이분은 누굴까? 교수님은 아닌 것 같은데, 굉장한 의료지식이 있으신 분 같았다.

3년 전에 수술을 했고, 두 번 했고, 이제까지 비잔을 먹었다고 했더니 긴 한숨을 쉬셨다.


"그게 몸이 얼마나 안 좋은데... 여태껏 먹었어그래

폐경을 가짜로 만드는 거잖아. 내가 요즘 폐경이 오는데, 온몸 관절이 다 아프더라고. 다비씨 진짜 고생 많았어요. 이따 외래 다 끝난 시간에 다시 와요. 밤 8시는 넘어야 교수님 볼 수 있을 거예요."


준비해 간 CT와 MRI 영상을 등록하고 남편과 콩나물해장국을 먹었다. 그것 말고는 온 시내에 아직 연 식당이 없었다. 버거왕이랑 해장국집뿐이었다. 비잔 장기복용 때문인지, 내가 턱관절도 올초에 빠져서 입을 크게 못 벌린다. 하하

버거왕 대신 콩나물 해장국을 조신하게 호호 불어 먹었다.


남편이 병원 인근에 신축모텔 방을 하나 잡았다. 방에 들어가 보니 우리 거실 벽 만한 티비가 달려있었다. 무슨 영화를 봐도 재미있었을 텐데 무슨 영상을 틀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저녁이 되기만을 기다리는 시간들이었다.

남편도 나도 서로에게 장난을 걸거나 농담을 건네고 떠들지 않았다.

우리 둘은 멍 하니 침대에 누워 있었고 시간은 조용히 흘러갔다.





석양이 창으로 들어왔다.

명의 선생님을 만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꼬박 열 여섯 시간을 넘게 기다려 드디어 자궁내막증을 제일 잘 보신다고 환우들이 모인 카페에 소문이 자자한 그분을 만났다.

사진에서 본 그대로의 모습과, 얼굴에 딱 어울리는 듣기 좋은 목소리를 가진 분이 나를 맞아주셨다.


"어서 오세요. 오래 기다리느라 수고 많았어요."

'선생님, 지금 제 걱정 해 주시는 거예요?

저는 하루종일 여기서 환자들을 보셨을 선생님이 걱정돼요.'

이런 말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말을 하면 눈물이 터질 것 같아 조용히 진료실 의자에 앉았다.

"그 지역에서 다비씨를 수술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을 텐데, 이 병원이면 P교수예요?"

선생님은 내 담당교수님과 친분이 있으셨다.


내가 이야기를 잘할 수 있도록 이런저런 질문을 해 주시고, 정말 내 이야기가 궁금하다는 듯이 차분히 들어주셨다.

차트번호 25280xx5 가 아니라, 나 한 사람을 위한 진료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선생님을 옛날부터 뵙고 싶었는데, 그땐 제 아이들이 너무 어렸고.. 수술 후외래계속 다녀야 하는데 그 당시 선생님이 계시던 병원까지 거리를 오갈 자신이 없어서 P교수님께 수술을 했어요. 그런데 재발이 됐대요. 지금은 난소 혹 때문에 신우신염이 와서 콩팥이 망가질 상황이라 요관스텐트를 넣어둔 상태고요.

수술을 다른 병원에서 하고 나니, 선생님을 뵌다는 게 더 망설여지게 되더라고요. 옷도 첨부터 수선을 맡았음 차라리 쉬운데 남이 고치다 만 옷 고치려면 더 복잡하고 힘드실 거잖아요." 





선생님은 초음파만 보시고도 병변이 어디 어디에 있는지 다 아셨다. 여기 보이고 저기 보이죠 하며 나한테도 설명을 해주셨는데 내 눈엔 그저 흑백화면일 뿐이었다.


지금 어떤 게 가장 힘들어요? 물으셨다.

선뜻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대체 내 증상이 뭐야? 나도 모르게 적응해버리고 있는 게 많을 텐데.


선생님이 내 표정을 보시더니 말씀을 이어가셨다.

이런 증상이 있을 거예요.

맙소사. 나 점집에 온 줄!!! 선생님 진짜 용하시네요


어 맞아요. 맞아요 하다가,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다.


이따금씩 소변대변 다 눌 것 같은 기분과 함께 기절할 것 같은 아찔한 느낌이 들 거예요.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기도 할 거고.

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공황이 오는 줄 알았단 말이다.

이 삶을 살아가는 게 너무 힘이 들어서, 그릇에도 안 맞는데 살아내느라 정신이 나가는 줄 알았다.


"선생님.. 저는 제가 정신병이 오는 줄 알았어요."

"수술이 아주 복잡하고, 큰 범위가 될 거예요.

그렇지만 해 봅시다.

앞으로는 정말 좋아질 거니까, 힘내고,

날짜까지 잘 버티다가 만납시다."


좋아질 거라는 교수님의 말씀이 믿어졌다.

그리고 진료실 문을 나서는데,


거, 뭐 먹어서, 뭐 해서 오는 병 아니에요!


하 이분 정말 끝까지 감동이시네.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선생님 제가 이걸 좋아하는데 그것 때문에 제게 이런 병이 왔을까요?" 하며 자기 탓하는 걸 많이 들으셨으면 이럴까.


자궁내막증은 여성호르몬이 교란되어 그렇다, 그러니 바디버든(체내 중금속 농도)을 톡스 해야 한다  이런 개념이 특히 자궁내막증 선근증 환자들 사이에서 아주 기초적인 상식처럼 전해진다. 나도 바디버든이라는 말 많이 들어봤고, 그래서 지난번 수술 후 손톱발톱 네일 바르는 거 싹 처분했거든. 프탈레이트가 있다고 하니까. 그리고 화장도 간소하게. 마스카라나 진한 색조는 지우는 데 또 여러 단계를 거쳐 계면활성제 써야 되니까 그것들도 다 처분했었다.


내 뒤통수에 대고 훅 들어온 선생님의 감성터치에, 심쿵했다. 아마도 내가 지금 이곳에서 인생의 은인이자 귀인을 만나버린 것 같다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새벽에 만났던 포스 있는 분을 교수님은 누님이라고 부르셨다. 의료진 간의 끈끈한 팀워크가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누님은 커다란 수술일정표를 이리저리 살피고 또 살피시더니, 정상적으로 수술 대기를 하면 1년을 기다려야 하는데 나는 그렇게 기다릴 수가 없으니 아무래도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겠다고 하시며 상담실 밖으로 나가셨다.

그러더니 외래를 하루 닫고 내 수술날을 잡아 주셨다.






#낭만닥터

#재야의 고수



열여섯시간이 넘는 끝없는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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