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살의 늦여름, 나는 아직도 교수님 과의 첫 만남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내 전공이 교수님과 달랐기 때문에 직접 뵐 기회는 없었고, 얼굴만 알 뿐이었다. 교수님은 우리 학교가 디자인 대학으로 자리잡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신 분 중 한 분이었다. 그래픽 디자인과 폰트 디자인으로 유명했고, 그가 만든 디자인들은 이미 여러 곳에서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학교 다닐 때 들었던 교수님의 모습은 전형적인 세련된 디자이너 같았다. 부리부리한 눈매, 큰 키, 운동도 잘하고, 심지어 우리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으셨지만 여전히 건강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멋진 분이었다.
그런데, 대학원 면접을 보러 갔을 때의 교수님은 내가 기억하던 모습과는 달랐다. 여전히 외형은 그대로였지만, 행색은 마치 산에서 바로 내려온 듯했고, 그린피스 활동가 같은 모습이었다. 누나가 없었더라면 잘못 찾아온 줄 알았을 것 같다.
교수님은 내게 디자인 철학을 묻지 않으셨다. 대신 환경운동에 대한 생각을 물으셨다.
“우리와 함께 환경운동에 동참할 생각이 없다면, 여기에 들어오는 건 포기하는 게 낫지 않을까?”
지금도 기억나는 말이다. 나는 순간 당황했다.
‘디자인 학과 아닌가? 왜 환경운동에 대한 질문을 하시는 걸까?’
짧은 순간 여러 생각이 스쳐갔다.
‘미래나 발전 가능성 없이 그린피스만 양성하는 곳인가?'
'그럼 차라리 그린피스에 가는 게 낫지 않을까?’
그 시기는 ‘파리협정’ 도, 엘 고어의 ‘불편한 진실’ 도 세상에 나오기 전이었다. 사람들은 환경문제의 중요성을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랐고, 특히 기업들은 전혀 관심이 없던 시기였다. 전문가도 거의 없었고, 디자인과 환경을 접목한 사례는 더더욱 없었다. 심지어 교수님 조차 환경 쪽에서는 전문가가 아니셨다. 그러나 학교에서 많은 영향을 미치던 분이었기에 이런 학과 개설이 가능했고, 교수님 자신도 디자인의 철학을 환경 쪽으로 바꾸어 가고 계셨던 것 같다. 물질적인 편의를 포기하고, 환경을 향한 신념과 미래를 선택하신 것 같았다. 교수님은 학교라는 공간을 통해 이 신념을 함께 나눌 사람들을 찾고 싶어 하셨던 것이다.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세 사람을 꼽자면, 아버지, 고흐, 그리고 교수님이다. 어쩌면 고흐보다도 교수님이 먼저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존경하는 분이다.
면접을 준비할 때, 내가 만든 작품들을 보며 깨달았다. 그 어느 것도 환경적인 요소가 없었다. 어두운, 비관적인 주제들 뿐이었다. 나는 세상과 등을 진 어둠을 강조해야 예술성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만든 모든 것이 우울했다. 예전에 문화부장관상을 받았던 작품도 지금 다시 보면 그렇게 어두울 수가 없다. 대학 시절 나의 ‘힙함’은 ‘어둠’이었던 것 같다.
영화사에서의 시간은 나에게 너무 많았다. 회사 주변은 논과 밭이었고, 앞에는 하천이 흐르고 있었다. 서울 같지 않은 푸르름이 가득한 곳이었다. 그래서 그곳에서 찍은 사진들을 면접날 가져갔다. 벼 이삭, 코스모스, 꽃 위에 앉은 꿀벌, 흐르는 물, 새들… 디자인과는 상관없는 자연 사진들이었지만, 어쩌면 그것들이 교수님이 보시기에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때때로 우울한 마음이 들지만, 교수님을 생각하면 죄송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이 동시에 든다. 교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이 고맙기도 하지만, 그분께 누가 되지 않게 열심히 살았는지에 대한 회의감도 든다. 교수님은 나에게 신념과 에너지를 주신 분이지만, 동시에 나를 힘들게 만든 계기를 주신 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