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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도그린 Jun 17. 2021

초여름의 새벽공기는 뭐가 다를까


한낮의 기온이 28도가 넘는 날씨가 계속되자 하루 중 가장 시원한 때를 찾기 시작했다. 여름의 찬란함을 사랑하지만 함께 몰려오는 텁텁함까지는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억겁의 시간동안 환경의 제약을 극복해온 유일무이한 존재라고 아무리 주장해도 난 그 위대한 인간 범위 안에는 포함되지 않나 보다. 집 안에만 콕 박혀서 간신히 집 주위만 어슬렁거리다 보니 이제는 그간 찐 살들로 인해 나의 오랜 벗으로 지내온 옷들에게 미안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들은 바깥 바람 한 번 제대로 쐬지 못하고 먼지 쌓인 옷장에 틀어박혀서 원망석인 눈초리를 잔뜩 쏘아대고 있었다. 거울을 보니 허락없이 여기 삐죽 저기 삐죽 나온 정리 안 된 살들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이러다간 굴러다니겠는걸.



그래 결심했어.

살을 빼볼 요량으로 헬스장을 끊어볼까 홈트레이닝을 해볼까 고민한다.



헬스장을 다니자니 1년 회원권을 끊으면 훨씬 싸요, 어차피 운동은 평생 해야 되는거니까요 라는 말에 넘어가 네 번의 계절이 바뀌는 동안 10번도 안간 지난날의 부끄러운 기억이 떠오른다. 지금 가봤자 마스크 쓰고 운동해야 할텐데, 숨쉬기까지 힘들어서 어떻게 한담. 그래 대세는 홈트레이닝이지.


방 안에 운동매트를 깔고 다이어트 초심자에게 다그치지 않고 상냥하게 가르쳐 줄 것만 같은 유투버를 선택해 플레이 버튼을 누른다.



겨우 15분 했을 뿐인데 숨이 턱턱 막힌다. 운동이 되긴 하나보다. 그치만 뭔가 하나가 아쉽다. 땀을 흘리니 신선한 공기가 간절하다. 밖에 나가고 싶다.





한여름의 하루는 이렇다. 오전 10시부터 태양은 전원코드에 막 꽂은 스팀 다리미마냥 천천히 예열되기 시작한다. 그러다 낮이 되면 온돌이 얹어진 것처럼 머리 윗부분이 뜨끈뜨끈 해진다. 이렇게 올라간 뜨거움은 오후 내내 쉽사리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태양이 오늘 할당량의 빛을 모두 쏟아붇겠다고 단단히 결심한 것처럼 깨어있는 시간동안 이 후덥지근함은 계속된다. 그냥 걷고만 있을 뿐인데 온 몸으로 작정하고 들어오는 햇빛을 막을 방도가 없다. 점점 얼굴이 일그러진다.



하루 중 가장 시원한 시간이 언제일까 고민한다. 이름 아침과 늦은 저녁. 그 중 아침이라는 단어에서 이제 막 시작하려는 자의 기대감이 느껴진다.



그래 새벽이 좋겠어.

아침 5시, 아직 해가 얼굴을 내밀기 전. 전날밤에 내려온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시간. 하늘은 옅은 남색의 빛을 띠고 있었다.



왠지 우주를 보는 것 같아. 행성들이 태어나기 전의 우주가 이런 모습이었을까? 행성의 탄생과 내 하루의 탄생.



그러고보니 둘 사이가, 앞으로 무엇으로 채워질까 하는 새로운 기대감으로 가득 찼다는 점에서 묘하게 닮아 있었다.





잠옷에서 운동복으로 갈아 입고 문 밖을 나섰다. 맨 먼저 마중나온 것은 새벽의 차가운 공기들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파트 1층에 도착해 곧장 계단으로 가 층부터 한 칸씩 오르기 시작한다. 생각보다 힘들지 않네.



무릎은 소중하니까 되도록 허벅지 힘으로 올라가기 위해 자세에 집중해본다. 17층까지 죽 이어진 기나긴 계단의 행렬 속에 다른 소리도 들릴 법 한데 호흡을 위해 내가 내쉬는 숨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 유한한 통로 속에 오직 나 뿐이다. 한걸음 한걸음 발을 뗄때마다 저절로 명상의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하루 속 유일한 무의 시간이다. 그 어떤 걱정과 고민도, 오늘 뭐 먹을까 하는 시덥잖은 생각도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는 시간. 머리가 절로 비워지는 시간.



그렇게 꼭대기층까지 한바퀴 돌고 나니 자는 동안 굳어있던 혈이 뚫렸는지 온 몸이 빨갛게 열이 올랐다. 그렇게 두바퀴, 세바퀴, 다섯바퀴를 돈다. 한 바퀴당 4분씩 딱 20분이 걸렸다. 좀 더 할까 하다가 첫날부터 오버하지 말자고 오늘은 이 정로 충분하다고 내 자신을 타일러본다. 10분도 못하고 빌빌 거릴 줄 알았는데 20분이나 하고도 아직 힘이 남아있는 느낌에 오랜만에 우쭐한 마음이 든다.



여름에 하는 새벽운동은 나에게 숙제 같은 것이다. 점심에는 너무 더워 시작하기도 전에 그만 의욕까지 잃게 만들고 저녁까지 미루자니 결국 내일부터 하지로 귀결되어버리니 새벽운동은 결국 마감일보다 하루 먼저 해버리는 숙제가 되었다. 덕분에 하루의 첫 시작을 무엇으로 하면 좋을까 방황하던 고민이 풀렸다. 당분간은 새벽에 하는 계단 걷기에 빠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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