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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식의 기쁨과 슬픔

직장인의 또 다른 업무

by 김명희

현재 다니고 있는 주짓수 체육관의 관장님은 회사원 출신이다. 영업 직군 회사원 생활을 하다가 주짓수 도장을 차렸다고 한다. 주짓수를 한 지 10년이나 되었는데 강좌를 할 때 보면 발성도 좋고 설명도 잘하고 누구를 가르치는데 소질이 있는 분이다. 언젠가 본인의 경력 얘기를 하다가 해준 얘기가 있다.


회사를 다니는 일반인들은 술 먹는 회식이라면 진절머리가 난다. 하지만 회사를 벗어나 운동을 하면 그렇게 좋다. 회식은 나쁜 추억이고 운동은 좋은 추억이다. 반대로 운동이 직업인 엘리트 체육인들은 운동이 일이기에 치를 떤다. 힘들고 욕먹고 매 맞으며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하지만 운동을 벗어나 술을 먹으면 좋다. 그래서 엘리트 체육인들은 운동은 나쁜 추억, 술 먹는 건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어 운동을 그만두면 관리를 안 해 몸은 망가지고 술에 빠져 살아갈 확률이 높다고 한다. 미디어에 노출되는 많은 엘리트 체육인들의 몸이 망가져 있는 이유다.


짧지만 굉장한 통찰력의 얘기였다. 듣는 순간 세상의 이치 절반을 깨달은 느낌이었다. 직장인에게 술 먹는 회식은 일의 연장이기에 힘들고 엘리트 체육인에게는 술이 직업 외의 일이기에 좋은 것이다. 회식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일의 연장이다. 일종의 야근이다. 그래서 회식은 힘든 거다. 직장이 아니더라도 나보다 나이 든 분들과 사석의 술자리가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직장은 어떤가? 내 명줄을 쥐고 있는 직장 상사들과 어울려 술도 마셔야 하고 비위도 맞춰야 하고 회식자리 예약부터 해야 할 일이 많다.


내가 젊을 때의 회식은 정말 전투적이었다. 반드시 n차 까지 가야 끝나고 중간에 노래방은 꼭 한번 간다. 노래방 가면 낮은 직급의 직원들은 잘 앉지도 못한다. 내 노래 부를 때 일어나서 춤추고 상사가 노래 부를 때 춤추고 동기가 노래 부를 때 춤춰야 하는 등 바쁘다. 술이 끝까지 올라 몇 잔 빼볼라고 하다 걸리면 벌주까지 몇 배로 더 마셔야 한다. 중간중간 직장상사 옆에 개별적으로 앉아서 듣는 잔소리는 인생의 진리를 듣는 것 마냥 리액션을 해 줘야 한다. 가끔 막차시간 때문에 먼저 들어가 보겠다고 얘기라도 할라치면 역모를 꾀하다 걸린 대역죄인의 심정으로 말해야 한다. 그래 봐야 OK 떨어지는 경우는 별로 없고 꼭 택시 타고 집에 간다. 그렇게 붙들고 있을 거면 택시비라도 주던가. 회식장소 섭외도 잘해야 한다. 메뉴는 이전 회식과 중복되지 않아야 하고 팀원들이 분리되지 않고 일렬횡대로 앉는 장소여야 한다. 룸이면 더 좋다. 메뉴의 가격은 높지도 낮지도 않아야 한다. 메뉴의 종류도 질이 떨어지지도 너무 수준 높지도 않아야 한다. 회사와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도 안되고 2차 등을 쉽게 갈 수 있는 곳으로 선정해야 한다. 각종 조건을 붙이면 선택할 수 있는 회식 장소는 극도로 압축되는데 이건 잘 골라봐야 평타고 잘못 고르면 욕 한번 먹고 회식 시작한다. 참 할 말이 많은 회식이다. 이것도 그래 봐야 십 년도 안된 얘기다. 얼마 전까지 이랬다는 것이다.


주 52시간 근무, 꼰대 문화의 퇴출, 저녁이 있는 삶 등이 시대의 화두가 되면서 회식 문화도 바뀌고 있다. 나도 팀에서 나이와 직급이 많은 축에 속하기에 지긋지긋한 회식 문화를 바꿔보려고 했다. 영화 한 편 보고 시작하는 회식도 해봤고 술을 아예 안 먹는 회식도 해 봤다. 점심 회식도 종종 하고 참여하고픈 사람만 참여하는 번개 형식의 회식도 자주 한다. 모두가 모이는 회식은 일 년에 몇 번 안 한다. 메뉴도 여러 명의 의견을 취합해 정한다. 술도 많이 안 먹는다. 소주 먹고픈 이는 소주 먹게 하고 맥주 먹고픈 이는 맥주 준다. 그나마도 강요 안 한다. 자기 먹을 만큼만 먹으면 된다. 아예 안 먹는 이들에게는 잔에만 따라주고 만다. n차 회식도 많아야 2차다. 그나마도 1차 후 가고픈 사람들은 다 보낸다. 집이 먼 사람은 반드시 보낸다. 몇 년간 회식 후 택시 타고 집에 가 본 적이 없다. 전부 대중교통으로 복귀할 만큼 일찍 끝낸다. 선진 회식 문화를 전부 도입해 봤다.


직장에서 회식을 하는 이유는 뭔가? 표면적으로는 유대 관계 강화와 리프레쉬다. 회식이 그렇게 흘러가지 못해서 문제지 잘만 활용하면 직장 내 회식도 좋아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선진 문화를 적극 도용한 것인데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고 그걸 악용하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친구들이 있다. 회식 중에 몰래 도망을 간다거나 계속 밖을 떠돌아다녀서 코빼기도 보기 힘들거나 직장 상사가 따라주는 술 한잔에 인상을 쓴다거나 하는 경우가 있다. 이건 직장을 떠나서 인간적으로 무척 예의가 없다. 자유로운 회식 문화는 우리 팀 문화지 다른 팀이나 부서에서도 인정해 주는 건 아니다. 다른 사람들과 먹을 때는 그때만의 예의가 있는 것이다. 업무 효율을 높이기 위한 회식이지 자기 편한 대로만 하려고 하는 회식이 아니다. 가끔 이렇게까지 자유롭게 해 줬는데 그렇게까지 싸가지 없게 나오나 하는 생각도 들고 다시 옛날 회식 문화로 돌아가고픈 생각도 든다.


보수적인 회식도 해 봤고 자유로운 회식도 해 봤다. 서로 지킬 것만 지켜준다면 자유로운 회식의 장점이 훨씬 많다. 직장을 떠나서 어쨌든 인간관계이기 때문에, 인간관계라서 또 배울 게 있기 때문에, 회식은 좋은 면도 있는 것이다.


월요일부터 팀원들과 한 잔해서 하고픈 말이 많은 화요일 아침 넋두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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