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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진 Aug 31. 2018

멸공의 엉망

8월의 이야기 열아홉

백 여 년 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뒤 느꼈던 애국지사들의 마음이 이랬을까. 비통하다. 나의 자유 대한민국이 이 정권 들어 공산화 되고 있는 상황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내 모습이 한탄스럽다. 너무나 억울하고 답답해서 어젯밤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유튜브 애국 방송을 보며 밤을 샜다. 공산주의자들의 깃대가 꽂힌 지상파 방송 뉴스에 맞서 자유 대한민국의 가치를 수호하려는 애국지사들의 충절 섞인 행보에, 나도 계속 미력한 힘이나마 보태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침 일찍 김 형과 박 형을 만났다. 김 형은 동네 이웃이고 박 형은 지방에서 차를 대절해 올라왔다. 두 형님을 알게 된지는 사실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린 피를 나눈 형제처럼 급속도로 친해졌다. 공산주의 세력들을 일소하겠다는 그 일념만은 모두 같았기 때문이다.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우린 만나자마자 해장국 집에 들어가 구국충정의 마음을 다잡았다. 복숭아나무 밑에서 유비와 관우와 장비가 그러했던 것처럼, 우린 막걸리 한 잔에 자유 대한민국 회복을, 다시 한 잔에 박 대통령님의 복권을 다짐했다. 결의에 찬 김 형과 박 형과 내 모습은 흡사 나치 독일에 대항했던 불란서 레지스탕스 요원이라든지, 만주의 아나키 상태에서 활동하던 비밀 결사 요원 같았다. 그런 우리의 모습 속에서 자유 대한민국의 희망을 봤다.


해장국과 막걸리가 소화돼 꺼억 트림이 나올 때쯤 동화면세점 앞에 다다랐다. 이미 각계각층의 애국지사들이 하나 둘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오늘은 벌써 제 50차 대한민국 공산화 저지 범국민대회의 날이다. 이곳 뿐 아니라 청계천 광장과 덕수궁 대한문 앞에도 아군들이 뜻을 함께 모으고 있다. 벅찬 마음으로 목청 높여 구호를 외쳤다.


“문재* 퇴진!” 

“문재* 2중대로 전락한 한*당은 해체하라!”

“박근* 대통령을 무죄 석방하라!”


오늘 집회엔 청년 애국세력들도 힘을 보탰다. 유튜브 애국방송을 진행하는 건실한 청년이 연설도 했다. 서*대학교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수재라는데, 역시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구구절절 옳았다. 대한민국 건국세력을 배척하고 건국절을 인정 않는 공산주의 세력들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는데, 가슴 깊이 와 닿았다. 좌편향 언론이 청년들의 충의를 왜곡하고 있다는 건 처음 안 사실이었다. 그 청년의 말에 따르면, 애국 진영 청년들이 대다수고, 우리와 뜻을 함께 하고 있다고 한다. 좌경화 된 방송들이 의도적으로 그들의 뜻을 보여주지 않는다 했다. 청년들의 그 뜻에 눈물 날 정도로 뿌듯했고, 좌편향 방송에 분노가 치밀었다.


형님들과 덕수궁 대한문 앞 집회로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존경하는 대한애국당 동지 분이 마이크를 잡는단 소식을 입수해서다. 형님들이 자리를 맡아 놓기로 하고, 나는 잠시 주변 건물에 있는 화장실에 들렀다. 아무래도 아까 해장국을 너무 많이 먹은 모양이었다. 뿌듯한 대변을 봤다. 건물 앞에서 담배 한 대에 불을 붙이고 잠시 주변을 돌아봤다.


애국 동지들과 구국 수호의 깃발들 한 켠에 마련된 분향소에 눈길이 간 것은 그 때였다. 궁금증이 일어 그 쪽으로 다가갔다. 분향소 안엔 중년 몇몇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고, 그 바로 옆에선 나무 위쪽으로 플래카드를 거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플래카드가 완전히 펴지며 걸리는 순간, 이 분향소라는 게 사실은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장이란 걸 깨닫게 됐다.


‘쌍*차 희생자와 가족 앞에 사과하고, 국가폭력 사업농단 책임자를 처벌하라’


눈앞이 아찔했다. 공산주의의 마수는 이미 사회 곳곳을 파고들고 있었고, 언제든 자유 대한민국이 전복될 수 있는 위기인 것만 같았다. 김 형과 박 형을 불러와 분향소 사람들에게 소리 질렀다. “시체팔이 장사꾼들! 당장 철수해! 대한문은 자유애국의 성지다! 종북 좌빨갱이 새끼들! 그렇게 이북이 좋으면 이북으로 가라! 이런 대통령 만들어 놓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나!” 그렇게 한껏 소리 지르고 나니 속이 시원해졌다. 애국지사의 사명을 다 한 것 같아 뿌듯함을 느꼈고, 의기양양해졌다. 


분향소의 공산주의자들은 그 소리를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한동안 날 쳐다봤다. 그런데 그 시선은 왠지 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시선 속에 든 것이 티비 속에서 본 이북 사람들의 결기완 달라서였다. 왠지 모를 쓸쓸함, 아픔, 분노 같은 감정들이 그들의 지친 표정과 함께 내 표피를 관통해 들어왔다. 그리고 그 느낌이 순간 몹시 불편해졌다.


“에이씨, 형님들, 이제 그만 갑시다!”


분향소를 향해 계속 고성을 지르고 있던 형님들을 불러 다시 집회장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고갤 돌려, 나에게 향했던 시선이 머물던 장소를 마지막으로 쳐다봤다. 날 응시했던 그녀는 주섬주섬 귓가에 귀마개를 끼워 넣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 분향소 쪽에서 본 마지막 모습은, 검게 변색된 꼬깃꼬깃한 귀마개가 자리한 그녀의 귓가였다.


집회가 끝나고 집에 가는 풍경은, 여느 때와 같은 개선의 행진이었다. 개탄스러운 시국을 전환하기 위해 우리가 바친 노력을, 전공을 저울질하는 품평회였다. 그렇게 왁자지껄 떠들며 박 형을 버스에 태워 보냈고, 집 근처에서 김 형과도 헤어졌다. 


“포탄의 불바다를 무릅쓰면서~ 아아~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  


터벅 터벅, 낡은 원룸 2층으로 걸어 올라가며, 멸공의 횃불을 불렀다. 불렀지만, 여전히 가슴 한 부분이 편치 않았다. 멸공의 횃불이 아니라 공산주의자의 동공이, 꼬깃꼬깃한 귀마개의 잔상이, 바다 속 부유물처럼 마음의 표피로 떠올라왔기 때문이다.


그 이미지를 잊기 위해, 오늘은 유튜브를 보지 않고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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