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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고성 알아? 한번 가볼래?

한 달 하고도 열 두 날, 명파리 마을의 기록

by Siho

석사 논문 약 5일 전, '최강의 집중력'과 '최강의 나태함'을 냉탕- 온탕 마냥 오가던 나는 지인의 강력한 추천에 힘입어 강원도에서도 최북단, 고성에서 진행되는 '아트케이션'에 지원했다. 고성문화재단과 고성군청의 합작으로 진행되는 이 사업의 모집 공고는 이러했다.



그러니까, 약 42일 동안 청년예술인 8명이 지역(고성)에서 함께 생활하며 로컬기반의 창작을 하는 것이 주인데.

고성에서도 최북단, 그중에서도 명파 마을이라는 - 마을에 상점이라고는 슈퍼 하나, 음식점은 한식뷔페 하나, 냉면집 하나가 전부 인- 곳에서 지내야 한 단 이야기다.

와, 사실 이건 자체유배(?)에 가까운 것 아닌가.

게다가 운이 좋아서 참여작가로 선정이 된다면 나는 영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오자마자 이틀 뒤, 고성으로 향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멋진데?"


누군가는 시골 중에서도 깡 시골이라고 고개를 저을 테지만 나는 오히려 좋았다.

내가 살던 영국의 랭커스터 또한 런던에서도 한- 참 떨어진 외곽지역이 던 터라 갑작스레 서울의 번잡함에 뛰어들기도 내키지 않던 터였다.


그런데 모집 관련 기사 중에 '2025.08.18. 강원 고성군과 고성문화재단이 지역소멸 위기에 대응하는 문화예술 기반 지역활성화 사업인 2025 아트케이션...'이 약간 신경 쓰인다.


지역소멸 위기에 문화예술이 대응을 할 수 있나?? 과연?

뭐, 가볍게 생각하자. 그건 재단과 군이 고민할 테니까!!!


지도를 훑어본다. 음. 정말 최북단은 맞는구나. 그래도 바다가 가까이 있으니 내가 계속 작업하던 해양오염에 대한 이야기를 여기서 하는 건 Make Sense 한 것 같다. 현지에 거주하는 분들이 몇 분이나 될지 모르겠지만 그들과 바다에서 쓰레기를 줍고, 바다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갖고, 퍼포먼스 "Sea Below"를 보여드리면 되겠다. 아차, 그리고 고성도 강원도니까 여러 가지 구황작물, 채소, 생선 등 식재료가 풍부하지. 일전부터 하고 싶었던 Mindful Eating을 여기서 워크숍으로 해보면 어떨까?


나는 고민한 내용을 그대로 적어서 제출했다. 두근두근, 일주일인가가 지나고 서류를 통과했다는 연락이 왔다. 면접시간은 한국시간으로 오후 두 시. 엥?? 그럼 영국 시간으로는... 새벽 5시.

시차를 생각 안 한 것은 아니나 새벽 다섯 시라. 끄응.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사정.


면접 당일, 한참 논문을 쓰다 쓰다 지쳐 그만 잠들고 싶...었으나 두 시간 후면 면접이다.

'아아... 너무 피곤하다. 못하겠다고 할까. ㅠㅠ " 내가 퍽이나 그럴 위인이나 되나. 그럴 순 없지.


자는 둥 마는 둥 뒤척이다 어느덧 시간이 되었다. 기억도 가물해져 가는데 기획서라도 좀 뒤적여 봐야겠지?

잠이 너무 쏟아지는 와중에 면접준비를 하려니 정신도 없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Zoom에 이름이 영문으로 쓰여있으니 그걸 심사위원이 보기 편하게 한글이름으로 바꾸어 달라'는 전화가 왔다. 국제 전화다! 빨리 끊어야 해!라고 생각은 했지만 주최자는 이름이 바꿔질 때까지 전화를 끊지 않을 기세다.


그런데 왜 그런지 버전도 낮고, 나의 맥 OS와 호환도 안 되면서 이름이 바꾸어지질 않는 거다.

그러는 새 국제 전화는 5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전화요금도 문제지만 내 면접 시작이 늦춰지면 내 뒤의 면접자들도 계속 연쇄로 늦어지는 거다. 어쩌지.

"그냥, 우선은 시작하시죠!"

발을 동동 구르던 주최 측은 더 기다릴 수 없는지 그냥 면접을 강행하기로 한다.


여유롭게 내 기획서만 슬렁슬렁 읽다가 갑자기 이런 난감한 상황이 되니 땀이 비직비직 난다.

게다가 급하게 시작한 면접이라 대답도 어설프게 나오던데다, 너무 오랜만에 한국말로 면접을 보려니 어순도 이상하고 버벅거린다.

'망했구나...' 아. 면접을 망하다니. 이런 수치가!!


그래, 차라리 잘된 거야. 편하게라도 보자.

나는 마음을 내려놓고 그냥 생각나는 대로 대답을 주워섬겼다. 떨어져도 뭐... 영국에 좀 더 있다가 한국에 들어가면 되는 일이고 오히려 여유로울 수 있으니 그는 그대로 나쁘지 않았다.


면접은 어찌어찌 잘 마무리되었다.

새벽 다섯 시 십오 분. 나는 아직도 깜깜한 창 밖을 내다보며 '그래... 무슨 고성이야. 여기서 차분히 생활들 마무리 잘하고, 논문도 마저 잘 쓰고, 남은 짐들 정리하려면 일주일 만에 귀국은 무리지. 차라리 잘 됐어. 그렇게 되는 게 맞아.'라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머릿속으로는 이미 '고성-명파리'를 지우개로 쓰윽쓱 지워내고 내일부터 어떻게 물건들을 중고마켓에 내다 팔까 궁리하면서.

'맞아. 1년간의 영국 생활을 고작 며칠 만에, 그것도 논문마감을 하면서 어떻게 정리하냐? 말도 안 돼. 무리야 무리. 잘됐어. '


마음을 비워내고 천천히 방 청소를 하던 며칠 뒤의 월요일.

메일과 전화가 함께 울려댔다.

"합격하셨습니다, 축하드려요!"


아이고 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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