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문재 엽서 · 9
작년 여름 추억을 데리고 산책 간다. 호박 넝쿨졌던 밭에는 풋마늘 푸릇푸릇, 참깨 꽃 키 재기하던 곳에는 과잉재배로 미처 떠나지 못한 배추 밭고랑고랑 바람의 연서를 쓴다. 붉은 고추 여름을 익히던 자리엔 시금치 푸름 더하고, 송종마을 담벼락 시 벽화에 기웃기웃. 햇볕과 어우러진 찬 공기가 좋아 행복하다.
송호항 포구에 정박 중인 어선들. 오늘은 액체의 길 접고 고체의 길을 택한 듯 고요하다. 밀물 때라 돌담 보이지 않는 독살. 헐거워진 날씨 찢고 나온 겨울나무 한그루 스산한 그대로의 풍경을 갖는다.
바다를 바라보며 숲길 걷는 ‘꼼지락 캠핑 생태 탐방로’ 산책길의 공기는 싱그러운 날개를 달고 날아오른다. 그렇게 어슬렁어슬렁 ‘목넘이 해변’ 지나 마을 담벼락 햇볕 깔고 앉아 방금 수확한 생굴 까는 어르신 옆자리 잠깐, 자연산 생굴 자꾸 맛보라 한다. 튼실하고 물컹물컹한 생을 한 입 담으니 짭조름하고 비릿한 지난 시간들이 너울성 파도처럼 울렁거린다.
생굴 한 땀 한 땀 하루가 모아지고 있는 함지박 안에 내 몸속 익지 않은 말들로 채워두고 커피 한잔 건네며 일서니 내일 또 오라고 한다. 그분 얼굴에 파종되는 햇볕과 향기롭게 피어오르는 미소는 쓰디쓰고 짜기만 했던 삶의 길에 포근했던 엄마 얼굴과 겹치며 굴 껍데기처럼 소복이 쌓이는 그리움이다.
썰물에 미처 떠나지 못하고 해변 모래 위에 생을 마감한 물고기 한 마리 햇볕에 구워지고 있다. 일찍 발견되었다면 누군가의 식탁에 맛있는 꽃으로 피었을 텐데.
푸른 바다 뒤척인다. 붉은 옷 갈아입고 토마토처럼 익어가는 송호해변의 오후가 타오른다. 너에게 간 적 없지만 그런 고백이 있었다면 열정의 색깔도 저랬을까. 두 사람이 머문 자리 세 사람이 지나가고 오랫동안 그네와 태양과 나는 그림자 놀이한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모든 게 다 있을 것 같은 수평선 바라본다. 형체도 색깔도 없는 바람이 머릿속 시끄러운 나를 흔들어 댄다. 잡념은 상념이 될 수 없다는 걸 상기시키듯이 가던 길 가라 한다.
모래 위에 발자국 남기고 걷다 갈산마을 입구. 작년 여름 붉은 고추 따던 노부부 중 오늘은 부인 혼자 도라지를 캐고 있다. 걸어야 만날 수 있는 우연 혹은 필연. 반가워서 종이포대에 도라지 대신 지난 이야기들만 주저리주저리 담고 있다.
김영민 작가는『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걸으면서 나보다 앞선 산책자들과 뒤에 올 산책자들을 생각하며 상상의 네트워크를 맺는다.’고 하면서 ‘심신의 쇠락으로부터 구원과 동시 존재의 휴가다.’고 한다. 그럼 나의 산책은 어떤 유형을 달고 있을까. 운전면허가 없어 걸을 수밖에 없는, 걸어야만 만날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들과 눈 맞춤이 글을 쓸 수 있는 재료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땅끝 마을 ‘세계의 땅 끝 공원’ 6 대륙 탑 조형물 감상한다. 호주 오페라하우스, 해남 땅끝탑, 포르투갈 호카곶,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 아프리카 테이블마운틴, 멕시코 엘아르코데카보산, 아르헨티나 에클레어 등대에 바람이 머물다 가고 구름 무리들 햇살 조각조각 잘라낸다. 고요를 덖어내는 의자에 앉아 아무리 다녀도 먼지 나지 않고 굳은살 생기지 않는 바닷길과 생살 돋지 않은 상처투성이 나의 길에 노화도행 뱃고동 소리만 요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