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서리

by 시진


나는 과수원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눈구멍 두 개를 뚫어 만든 빵봉투를 뒤집어썼고, 혹시 몰라 옷도 뒤집어 입었다. 이 정도면 이장 영감탱이는 내가 석규라는 사실을 절대로 모를 것이다. 나는 당당하게 과수원 중앙을 가로질러 걸어 들어가 잘 익은 수박을 찾기 시작했다. 이 놈도 통통, 저 놈도 통통 두드려보고 가장 맑은 소리를 울리는 수박을 찾을 생각이다. 몇 번의 통통을 거쳤다. 그리고 찾았다. 이제 수박을 가져가기만 하면 되는데 줄기가 어찌나 굵은지 쉽게 끊어지지가 않는다. 미처 여기까지는 생각을 못했다.


이빨로 잘근잘근 씹어보았다. 쓴 맛에 곧장 침을 퉤 하고 뱉었다. 나는 품에 수박을 가득 끌어안은 채 몸을 뒤로 내던졌다. 내 무게에 못 이겨 끊어진 수박줄기를 투둘투둘 정리하고 과수원을 벗어나려는데 아무래도 이상하다. 과수원은 조용한데 나만 소란하다. 그리고 분명히 원두막에는 이장 영감탱이가 있었다. 나는 뒤통수가 따가운 느낌이 들어 고개를 돌려 원두막을 올려 보는데 이장 영감탱이가 여전히 그곳에 있다. 마치 소 닭 보듯 멍청하게 앉아서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만 보고 있다. 이상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기분이 좋다. 수박을 챙겼다. 나는 과수원을 떠나려는데 문득 억울한 생각이 든다. 이렇게 수박 먹기가 쉬울 줄 알았으면 진작 할걸. 뭣하러 한 달을 넘게 수박 꿈만 꾸었을까. 나는 과수원 끄트머리에 있던 수박 두 개를 발로 힘껏 걷어차 깨 부수고는 산으로 뛰어 올라갔다.


맛있다. 진짜 맛있다. 태어나 먹어본 과일 중에 이보다 맛있는 과일이 또 있었을까 싶다. 나는 돌로 수박을 깨 부수어 흐르는 과즙에 옷이 젖는 줄도 모르고 새빨간 과육에 얼굴을 처박은 채로 한참을 갉아먹었다. 너무 커서 한 통을 다 먹지도 못했다. 남은 수박을 미련 없이 던져두고 나는 부른 배에 손을 얹어 통통거리며 느긋하게 집으로 간다.


아뿔싸. 이장 영감탱이가 우리 집에 와있다. 나는 옷에 수박씨라도 붙었을까 괜히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머쓱하게 방으로 들어갔다. 분명 나를 못 알아봤을 텐데 우리 집에는 왜 온 걸까. 방문을 빼꼼 열고 금례엄마와 이장 영감탱이의 대화에 귀를 기울인다. 순간 금례엄마가 고개를 돌려 나를 찾는다. 이내 눈이 마주쳤다. 금례엄마의 얼굴에 서늘한 기운이 맴돈다. 동시에 그의 새카만 눈동자로 몽둥이가 비쳐 보인다. 오싹하다. 그냥 딱 죽었다 싶은 날이 있는데, 그날이 바로 오늘이다.


나는 달린다. 금례엄마는 이놈 새끼 너는 잡히면 죽었다 하며 나를 쫓는다. 잡히면 죽인다는데 도대체 어떻게 잡힌단 말인가. 죽을힘을 다해 달려 다시 산으로 올랐다. 숨이 턱 끝까지 찼고, 침은 이토록 쓴 맛이다. 나는 이곳에서 기다릴 참이다.


나는 금례엄마가 화를 내지 않고, 매를 들지 않고 달래어 집으로 데리고 가줄 그때가 언제인지를 잘 안다. 깜깜한 밤이 되어도 내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금례엄마는 후레쉬를 들고 온 동네를 뛰어다니며 석규야 석규야 하고 부르는데, 그때 내려가 금례엄마의 품에 달려가 안기면 엄마는 걱정에 잠겨 가라앉은 그 목소리로 내 곯은 배 걱정부터 한다. 나는 그 시간을 기다린다.


시간이 꽤 흘렀다. 석규야 석규야 소리는 커녕 귓가에는 모기 앵앵대는 소리만 들린다. 여기서 앞으로 더 기다렸다가는 산모기한테 피를 다 뜯겨서 빈혈로 쓰러지거나, 배가 고파서 굶어 죽거나 둘 중에 하나다. 나는 집으로 돌아갈까 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흙먼지를 털어내는데 순간 옆 동네 마을에 사는 금례엄마 친구 아줌마 생각이 난다. 그 집으로 갈 것이다.

나는 산을 넘는다. 고된 하루였다. 영롱한 달빛에 의지해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가며 길을 찾는다.


“아줌마 석규 왔어요.”

부엌에 있던 아줌마는 두 눈이 뚱그레져서는 나를 보고 한달음에 마당으로 튀어나왔다. 나는 아줌마의 눈이 저리 컸었나 생각한다.

“석규야 왜 네가 여기 있냐. 어떻게 혼자 여까지 왔냐. 밥은 먹었냐? 엄마는? 집에 무슨 일 있냐? “

나는 아줌마의 다정한 걱정에 참았던 설움이 터지고 말았다. 그러자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흐른다. 나는 이제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 서럽게 운다. 말도 못 하고 운다.


무슨 일인지 아줌마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아이고.. 무슨 일이 있네 있어. 석규야. 엄마한테 무슨 일 생긴 거 맞냐? 아이고 우리 석규 불쌍해서 어째. 이걸 어째. “

나는 아니라고 답해야 하는데, 눈물이 안 그치니 말을 할 수가 없다. 나는 다급하게 손사래를 쳐보지만 아줌마는 황급히 부엌으로 가 찬통에서 누룽지를 꺼내주고는 기다리고 있어라 하고서 사라져 버렸다.


나는 배가 고프다. 소쿠리에 담긴 누룽지를 보니 금례엄마 생각이 난다. 금례엄마가 내게 자주 챙겨주던 간식이었다. 이 집, 저 집을 부산스럽게도 이사 다니며 그 많은 형제들 밥을 해먹일 때에 금례엄마는 가마솥에 눌어붙은 고소한 누룽지만큼은 항상 내게 주었다. 밤이 늦어 형제들이 다들 잠자리에 들려 방으로 들어가면 금례엄마는 나만 몰래 부엌으로 불러내어 소중히 긁어모아둔 누룽지를 내게 준다. 그럼 나는 금례엄마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먹었다.

나는 눈물 젖은 누룽지를 먹고 고된 몸을 뉘었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꿈인가. 누군가 내 뒤통수를 냅다 갈긴다. 꿈이 아니다. 내내 쉰내를 풍기는, 자글자글한 주름에 푸석푸석한 머리칼까지. 맞다. 금례엄마다. 나는 마당으로 끌려 나와 뒤지게 처맞았다. 금례엄마는 아무래도 분이 안 풀렸는지 신고 있던 고무신까지 벗어 들고 내 등짝을 사정없이 때렸다.

“이제는 하다 하다 엄마 죽었다고 팔아넘기냐 이놈 새끼야. 남편 복 없는 년은 자식 복도 없다더니 그래. 너 죽고 나 죽자. 그냥 같이 죽자 죽어. “


어스름한 새벽. 나는 훌쩍거리며 금례엄마 손에 이끌려 다시 집으로 간다. 금례엄마는 좀 전의 일이 마음에 쓰였는지 애처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내 머리를 자꾸만 쓰다듬는다.

“석규야 괜찮냐. 아팠지. “

“나는 괜찮어. 엄마 내가 자꾸 말썽 피워서 미안해. “

금례엄마는 나를 끌어안고 산모기가 앵앵대는 그 깊은 산속에서 눈물을 꾸역꾸역 삼키며 울었다.


다음 날 학교에서 돌아와 저녁을 먹으려는데, 이장 손자 놈이 우리 집에 찾아왔다.

“아줌마, 석규랑 같이 집에 오시래요.”

금례엄마는 안 간다며 버티는 내 손목을 우악스럽게 잡아채 이장 영감탱이 집으로 나를 데려갔다. 영감네 집에 도착해 대문을 넘고 들어가 보니 마당의 평상 위에 수박 몇 통이 올려져 있다. 손자 놈의 엄마는 웃으며 나와 금례엄마를 맞이해 주었다. 나는 이장 영감탱이도 꼴불견이고 손자 놈도 딱 싫은데, 손자 놈 엄마는 좋았다. 얼굴도 예쁘고 우리 동네에서 마음씨 좋기로 소문난 아줌마였다.

“석규가 수박이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그랬겠어요. 애들이 크면서 그런 실수도 하는 거죠. 그냥 수박 같이 먹자고 모셨어요. 같이 드세요. “

금례엄마는 황송해하며 한사코 거절했다.

“저는 괜찮아요. 석규야 너 먹고 오너라. 엄마 먼저 집에 가 있을게.”

아줌마는 거절하는 금례엄마를 끝까지 설득해 평상 위에 앉혔다. 손자 놈이 수박 반을 가르고 착착 썰어 한 조각을 제일 먼저 나에게 주었다. 나는 받은 수박을 금례엄마에게 주고 두 번째 수박을 받아 들었다. 수박을 가만히 들여다보는데, 이 수박은 어째서 새카맣다. 왜 새카만가 보니 수박씨가 들이부었다. 과육보다 씨가 더 많은 것이다. 나는 그것이 하도 신기하여 수박을 보며

“이 씨 봐라.” 하였다.


그 순간, 마당의 분위기가 얼음장같이 차가워졌다. 뒤통수가 서늘하다 했다. 금례엄마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내 뒤통수를 또 갈겼다.

“어디 어른들 앞에서 쌍놈들이나 하는 욕을 하냐. “

“내가 무슨 욕을 했다 그래! 나는 그냥 씨가 많아서 씨 보라고 한 거야!”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나는 또다시 금례엄마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화해의 장과도 같았던 수박 파티가 엉망진창으로 끝났다.



“학순이라고. 땅콩만 한 키에 눈도 얼굴도 땡그랗고 나만 보면 오빠 오빠 하며 졸졸 따라다니던 애가 있었어. 매일 등하교도 같이 했고, 봄에는 학순이 따라 산에 진달래 따러도 많이 갔지. 학순이는 마을에서도, 학교에서도 인기가 많았어. 되게 귀여웠거든.

걔야. 걔가 내 첫사랑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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