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by 시진


“세 번째 새아버지가 살던 마을은 이 씨 집성촌이었어. 이 씨들만 사는 마을인 거야. 그러니 동네 사람들 태반이 사촌 당숙의 팔촌 아재인 셈이지. 새아버지의 큰형이 같은 마을에 살고 있었고 금례엄마랑 나는 이사 가고 얼마 안 되어 그 집에 인사를 하러 갔어. 그 집의 자식은 오 형제로 아들만 다섯이라네. “


금례엄마 손을 잡고 따라 걸었다. 대문은 따로 없이 담장이 끊기는 곳이 입구였다. 마당에 들어서자 큰 새아버지의 가족들 여럿이 있었다. 나는 큰 새아버지와 인사를 나누고 있는 금례엄마 뒤에 서서 쭈뼛거렸다. 낯선 장소와 인물들에게 신물이 난다.


나는 시선을 거두고 마당 평상 위에 철퍼덕 앉았다. 그러자 그제야 보였다. 시커멓고 우람한 사내들 사이로 자그마한 키에 땡그란 두 눈을 가진 여자아이 하나가 있었다. 나는 그 애와 눈이 마주쳤다.


그 애는 씩 웃었다. 곧장 거리낌 없이 내게 다가왔다.

“감자 먹을래?”

포슬포슬한 감자 하나를 내게 건넸다. 나는 감자를 좋아하지 않지만 거절하지 못했다. 그 애는 이제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감자를 먹는다.

“몇 살이야? 나는 열 살. “

그 애는 명랑하고 경쾌한 목소리를 가졌다. 나는 어색하게 감자 껍질을 까며 대답했다.

“내가 한 살 위야. “

“이름은 뭐야? “

“송석규.”

“와! 송 씨는 처음 봐.”

“네 이름은 뭐야?”

“나? 학순이. 이학순.”


며칠이 지나 전학 수속을 위해 금례엄마랑 같이 학교에 가려는데 우리 집 마당으로 책보를 맨 학순이가 걸어 들어왔다. 학순이는 같은 학교이니 앞으로 같이 등교하자 했다. 금례엄마는 그런 학순이가 귀여운 듯했다. 학순이는 등굣길 내내 재잘거렸다. 담임선생님은 코 먹는 소리를 자주 내서 거슬리고, 같은 반 짝꿍이 어제 도시락 반찬으로 소시지를 싸왔는데 한 입만 달라고 해도 절대 안 줬다 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자신의 출생의 비밀까지.

오 형제와 학순이는 이복 남매라 한다. 오 형제의 엄마도 일찍이 죽었고, 학순이 엄마는 학순이를 낳다 죽었다 한다. 그래서 아주 어렸을 때는 큰 새아버지의 젖동냥으로 자랐다 한다. 학순이는 막내 오빠하고도 나이차가 10살이 넘게 난다 했다. 그래서 한 살 차이 나는 오빠인 내가 와서 좋다 한다. 나는 왜인지 학순이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또 자꾸만 오빠라 부르는 탓에 나는 진짜 학순이의 오빠가 되어주고 싶어졌다.


나는 금례엄마가 재가를 가는 것이 싫었다. 둘이서만 살면 안 될까 내내 바랐다. 나는 첫 번째, 두 번째도. 그리고 지금 세 번째 새아버지 집에서도 진짜 가족이 되지 못했다. 나는 형제들과의 싸움을 피해 다녀야 했고, 동네사람들 누구라도 금례엄마를 괴롭힐까 싶어 경계해야 했다. 나는 늘 불안했고 긴장했다. 그런데, 학순이를 만나면 그것을 자꾸 잊었다. 학순이는 말이 많았다. 쉴 새 없이 떠들었다. 대부분 하찮은 이야기들이었다. 하찮아서 웃음이 났고, 자꾸 웃다 보니 정이 들었다. 학순이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내 천진하게 웃으며 나를 오빠라 불렀다.


나는 학순이와 십리가 넘는 등하굣길을 매일 같이 걸었다. 가는 길이 멀고 고되니 지름길을 찾아다녔다. 샛길로 빠져 지름길을 찾아가면 논두렁을 지나는데, 그러면 바닥이 울퉁불퉁하여 발이 이리 빠지고 저리 빠지니 손을 잡아주며 의지해 걸었다. 십리가 오리쯤 줄어들면 너른 길이 나오는데, 그 길에 꼭 장난을 치는 놈이 하나 있었다. 뱀을 잡아다 허물을 벗겨서 길 중간에 주욱 늘어놓으면 등교하던 애들이 그것을 보고 겁이 나서 그 길을 못 지나가고 발만 동동 구르는 것이다. 그러면 그놈은 언덕 위에서 그것을 지켜보고 변태처럼 킥킥대며 좋아한다. 나랑 학순이도 당했다. 학순이는 기겁을 하여 소리를 꺅꺅 지르고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사실 나도 그렇다. 나는 진짜 뱀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고 싫다. 근데 나는 학순이의 오빠가 아닌가. 오빠가 뱀을 무서워하면 꼴이 우습지 않은가. 나는 짐짓 점잖은 채로 길 가장자리에 떨어져 있는 기다란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다 뱀 허물을 가지에 걸고 밭으로 던져버렸다. 제법 용감했다. 그럼에도 학순이는 무서움이 안 가셨는지 내 팔에 찰싹 달라붙어서는 등교하는 내내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앞뒤를 살피며 불안하게 걸었다. 그 말 많은 애가 말이다.


나는 동네 애들이 봄이 되면 산에 칡 캐러 가고, 진달래 따러 간다고 신나서 우르르 몰려 가는 꼴이 우스웠다. 물론 나한테 칡이든 진달래든 같이 가자 하는 친구도 없었지만 말이다. 근데 학순이는 진달래 따러 가자 한다. 나는 봄철 내내 학순이를 따라 산으로 가 분홍빛으로 물든 진달래꽃구경을 질리도록 했다. 학순이는 진달래를 따 꽃잎을 먹기도 하고, 꽃줄기를 똘똘 말아 묶어 내 손에 반지를 끼워주기도 하고, 또 어느 날은 화관을 만들어 내 머리에 씌어주고는 잘 어울린다며 헤실헤실 웃었다. 그러면 나는 그 헤실헤실 웃는 학순이를 보는 재미로 즐거웠다. 나는 그 해, 그다음 해, 그 다음다음 해, 그 다음다음다음 해까지도 분홍빛 진달래만 보면 학순이 얼굴이 겹쳐 보였다.


여름이 지나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교실에 있었는데, 학순이가 학순이 친구 손에 이끌려 내게 왔다. 학순이는 울고 있었다. 나를 보자 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눈가는 새빨갛고 눈은 퉁퉁 부었다. 학순이가 우느라 말을 못 하자 같이 온 학순이 친구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운동장에서 고무줄놀이 하고 있었는데요. 만수오빠가 와서 고무줄 끊어서 학순이가 화를 내니까 애들 다 있는 앞에서 학순이한테 아이스께끼를 했어요. 들춘 정도가 아니라 아예 치마를 아래로 잡아당겨버려서 운동장에 있던 애들이 학순이 빤스를 다 봐버렸어요. 어떡하면 좋아요. “


나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만수놈이 그놈이다. 뱀 허물 벗겨서 길가에 늘어놓고 언덕 위에 올라가 변태처럼 킥킥대며 좋아하던 그놈. 언젠가 그놈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벼르고 있었는데, 오늘이 그날인가 보다. 나는 교실문을 박차고 나와 운동장으로 갔다. 만수놈이 안 보인다. 나는 만수놈 교실로 가려는데 문득 강당 옆 창고 생각이 난다. 체육시간에 쓰는 뜀틀이나 매트와 같은 각종 체육용품들을 넣어두는 곳이었다. 창고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용품들 뒤로 잡초 베는데 쓰는 낫이 보인다. 나는 그것을 챙겨 만수에게로 간다.


만수놈 교실에 다다라 나는 숨을 한번 고르게 쉬고 교실 앞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나는 교탁 위에 올라가 낫을 휘두르며 외쳤다.

“김만수 너 이 자식. 따라 나와. ”


만수놈은 낫을 든 나를 보고 겁에 질려 교실 뒷문으로 달아났다. 나는 낫을 든 채로 만수놈을 쫓는다. 복도로 달아난 김만수는 여러 교실을 지나쳐 1층으로 내려갔다. 교실에 있던 아이들은 와 싸움 났다 하며 뛰쳐나와서 나와 김만수를 따라 달렸다. 김만수는 도망치며 1층을 헤집고 다니다가 어느 교실 문을 열고는 쏙 들어가 버렸다. 나도 그 교실 문을 열고 따라 쫓아 들어갔다.


교무실이다. 김만수가 교무실로 도망친 것이다. 선생님들도 나도 김만수도 모두 당황스럽다. 하필 나는 낫을 들고 있지 않은가. 담임선생님이 다가와 낫을 빼앗고 무슨 일이냐 다그치자 나는 갑자기 감정이 북받쳤다. 나는 학순이처럼 울기 시작했다. 울면서 말했다. 만수가 학순이한테 아이스께끼 했다고. 그래서 운동장에 있던 애들이 모두 학순이 빤스를 보았다고. 김만수는 진짜 나쁜 놈이라고.


김만수와 나는 반성문을 써서 제출하기로 했고, 김만수는 담임선생님 손에 이끌려 학순이에게 가서 사과를 했다고 한다. 학순이는 사과하는 김만수에게 꿀밤 한 대만 때리게 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학순이다웠다.


하굣길. 나와 학순이는 눈이 퉁퉁 부은 채 집으로 간다. 나는 아직도 분이 안 풀렸는데 학순이는 기분이 좋은가보다. 콧노래를 부르고 폴짝폴짝 뛰며 걷는다. 앞장서서 걸어가던 학순이가 가던 길을 멈추고는 고개를 홱 돌려 나를 보고 섰다. 나는 왜 그러냐 물었다.


“오빠. 나는 이다음에 크면 오빠한테 시집갈 거야.”


나는 학순이의 손을 꼭 잡았다. 십리가 넘는 하굣길. 그 먼 거리를 걷는 내내 나는 학순이 손 한 번을 안 놓쳤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