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9.28 고운기 <밀물드는 가을저녁무렵>
기분이 말투가 된다면... 큰일나겠다 싶은 그런 날이 있잖아요. 일이 쏟아진 어제가 그런 날이었어요. 평소 멀티플레이어 같은 속도로 생각하고 일처리를 한다 자부했는데, 갑자기 병목현상처럼 머리를 죄어오는 순간이 반복되었죠. 갑자기 스스로에게 화가 나고, 이러다가 학생들에게 마저도 화를 낼까 싶어 핸드폰부터 한쪽으로 치웠답니다.
언제나 말씀 드리지만 제게 가장 중요한 일은 학생을 만나 수업하는 일. 그런데 하필 어제는 출판 관련 일들이 연속 겹쳐지고 수업에 방해물(?)로 등장하는 거예요. 그 모두가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고, 특히 작가들의 세상에서 자신들만의 꿈을 펼치려는 문우들이 연결된 일들이라 가벼이 할 수도 없는데... 잘 해야 되는데... 요청은 많고 일의 능력은 뻔히 보이고... 그러다보니 순간 밧데리 폭발하는 듯한 불꽃이 보였답니다.
그럴때는 오로지 하나의 선택. ‘내 본분에 집중하자’. 학생들과의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 그냥 눈을 감았습니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고 다짐하면서요. 역시나 오늘 새벽은 용수철처럼 회복하는군요. 오늘도 학생들 수업이 아침부터 쭉~~~ 시간을 내어 마음과 눈을 풍요롭게 하는 자연을 찾아 가야겠습니다. 어딘가에 저를 치유해 줄 곳이 있겠지요.^^
갑자기 가을이 지배해버린 요즘이지요. 옷장정리는 못했을지라도, 시시각각 변해가는 풍경은 손에 쥐어보시길, 그리고 마음속 저 밑바닥에 쌓여있을 스트레스를 집어내 멀리 던져버리시길. 이번에는 누군가와 말고, 혼자서, 아니면 정말 함께 있어야 되는 딱 한 사람과... 사실 어제도 전주에 다녀오면서 쉬고 싶었던 풍경이 있었는데, 할 일이 많다 보니, 그냥 돌아왔었답니다. 오늘은 책방문 닫고 가까운 곳으로 가을을 낚으러 떠나야겠습니다.
밀물드는 가을 저녁 무렵 - 고운기
먼 바다 쪽에서 기러기가 날아오고
열 몇 마리씩 떼를 지어 산마을로 들어가는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
사립문 밖에 나와 산과 구름이 겹한
새 날아가는 쪽 하늘 바라보다
밀물 드는 모랫벌 우리가 열심히 쌓아 두었던
담과 집과 알 수 없는 나라 모양의
탑쪼가리 같은 것들을 바라보면
낮의 햇볕 아래 대역사를 벌이던 조무래기들
다 즈이 집들 찾아들어가 매운 솔가지 불을 피우고
밥 짓고 국 나르고 밤이 오면 잠들어야 하는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
분주히 하루를 정리하고들 있었다
그러면 물은 먼 바다에서 출발하여
이 마을의 집 앞까지 밀려와 모래담과
집과 알 수 없는 나라 모양의
탑쪼가리 같은 것부터 잠재웠다
열심히 쌓던 모든 것을 놓아 두고
각자의 집으로 찾아들어간 조무래기들의 무심함이나
물은 사납거나 거세지 않게
천천히 고스란히 잠재우고 있었다
먼 바다 쪽에서 기러기가 날아와
산마을 어디로 사라지는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
<사진제공, 박세원문우, 장소는 전남 함평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