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28
나의 눈은 ‘세상의 색’을 볼 수 있다.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색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세상이 어떤 색으로 되어 있는지 생각한 적은 몇 번이나 있을까. 무의식 중에 생각이란 걸 한 적도 있었을거다. 그러나 나태주 시인이 말한 것처럼 ‘자세히 보아야’를 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나의 첫 책 <어부마님 울엄마>를 읽은 남편의 지인이 답례로 한강의 소설 <흰>을 주었다.
한국인 최초 맨부커상 수상 작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먼저 읽고 <소년이 온다>를 나중에 읽었다. 지금 같으면 독후감이라도 써 놓았을텐데... 아무 생각없이 시간이 흘렀다.
소설<흰>은 소설이라고 말하기엔 이야기의 전개와 구성이 들쑥날쑥했다. 그러나 영어에서 circulation story라고 부르는 형태처럼 처음과 끝의 소재가 일치하여 소설의 원점으로 돌아간 듯 했다. 때론 짧은 수필이나 시처럼 들려오기도 했다.
이 작품도 역시 2018년 맨부커 인터네셔널 부문 최종후보작으로 선정되었다고 했다. 흰 색을 통하여 삶과 죽음, 그리고 경계를 표현하였다. 우리 인간이 짊어져야 할 세 영역을 때론 무력하게, 때론 숙명적으로 서술해나간 이야기 전개는 마치 한 권의 시집을 읽는 듯 했다.
총 65편의 목록이 있다.
작가 한강이 생각하는 ‘흰’색에는 이런 단어들이 나열돼 있다. ‘강보, 배내옷, 소금, 눈, 얼음, 달, 쌀, 파도, 백목련, 흰 새, 하얗게 웃다, 백지, 흰 개, 백발, 수의...’
강보와 수의를 읽으면서 인간 삶의 처음과 끝을 생각했고, 그 삶의 과정에 펼쳐진 흰 색아닌 색들을 보았다. 동시에 나에게 ‘흰’ 색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를 생각했다. 순서 없이 써봤다.
‘엄마, 1월 1일, 정월 대보름, 쌀떡, 하얀 두부탕 백기, 마스크, 갈매기의 아랫배, 제사음식, 복탕, 외할머니의 치마, 홍합 껍질 위 좁쌀 같은 암초조각 , 찔레꽃, 조약돌을 감싸던 포말, 섬 상여대의 깃발, 백목련, 감자꽃 등등...
작가는 ’흰‘것을 자신 속에 들어있는, 죽은 어머니가 스물세 살에 낳았다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었다는 ‘언니’로부터 시작한다.
현재를 살지만 마치 현재가 아닌 듯한 지구의 반대편, 오래된 어떤 도시로의 이동 후에도 현재가 묻고 있는 과거의 기억들을 얘기한다. 얘기의 줄타기에는 ‘흰’ 것을 가진 곡예사가 서서 하나하나 질문을 던진다.
너의 ‘흰’자리에는 무엇이, 누가 있느냐고.
작가를 따라 아직 살아보지 않은 시간 속으로, 쓰지 않은 책 속으로 무모하게 걸어들어갔다.(11쪽)
배내옷(18쪽)
-산통을 참으며 무서워서 눈물이 떨어지는 대로 바느질을 했다. 배내옷을 다 만들고, 강보로 쓸 홑이불을 꺼내놓고, 점점 격렬하고 빠르게 되돌아오는 통증을 견뎠다. 마침내 혼자 아기를 낳았다. 죽지마라 제발.-
동생 넷 중에서 세명을 엄마는 혼자서 아이를 낳았다. 나는 외할머니가 받아주었고, 막내는 산부인과를 만날 수 있던 때였다. 엄마가 혼자 낳은 동생 중 여동생의 탄생은 아직도 생생하다. 혼자가 빙글빙글 돌던 엄마, 새집 지은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여자를 낳으면 부정 탄다고 말했던 주인아줌마. 결국 방안에서 내려가 부엌 바닥에 지푸라기를 깔고 그 엄청난 아픔을 참았던 엄마. ‘나오지 마라 나오지 마라’를 주문처럼 외워도 밀리고 밀려서 저절로 세상 밖에 나와버린 동생. 그 모든 것이 작가의 글을 통해 다시 한번 생생해졌다.
빛이 있는 쪽(31쪽)
- 해독할 수 없는 사랑과 고통의 목소리를 향해, 희끗한 빛과 체온이 있는 쪽을 향해, 어둠 속에서 나도 그렇게 눈을 뜨고 바라봤던 건지도 모른다. -
빛은 정말 흰색일까. 두 시간 동안 살아 있었다는 작가의 언니는 빛이 있는 엄마를 향해 있었다고 했다. 태어나서도 빛을 향하고, 죽음을 향해서도 빛을 향하는 우리.
시집에 온지 3년차, 뒤 늦게 결혼했다고 우리 부부에게 어지간히 넘치는 사랑을 주셨떤 남편의 어머니가 아프셨다. 그것도 결토 되돌아 갈 수 없을 만큼 아프셨다. 매일 어머니늬 복수가 차 오르고, 매일 의사는 채워진 복수를 뺐다. 그것도 난생 처음 본 커다란 주사바늘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머니의 둥근 배를 둥글게 둥글게 어루만지는 것 뿐. 어머니의 마지막이 가까워 올수록 어머니는 창밖 빛을 보았다. 갈 때마다 빛을 보는 어머니의 눈동자는 병실마저 희미해져갔다.
소금(66쪽)
- 어느 날 그녀는 굵은 소금 한 줌을 곰곰이 들여다봤다. 희끗한 그늘이 진 굴곡진 입자들이 서늘하게 아름다웠다. 무엇인가를 썪지 못하게 하는 힘, 소독하고 낫게 하는 힘이 그 물질에 있다는 사실이 실감되었다.-
어디 상처만 낫게 하랴. 소독하고 낫게 하는 힘을 가진 소금의 물성이. 낫게 하는 것은 변화하는 것, 변화하는 것은 다시 살게 하는 것. 다시 사는데 필요한 것이 그 무엇이든 귀하지 않은 것은 없다. 그 옛날 소금으로 일 값을 받고, 소금으로 목숨을 구하고, 소금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것. 그러니 소금의 그늘이 내어주는 그늘은 진정 ‘흰’색이다.
하얗게 웃는다(78쪽)
- 쓸쓸하게, 아득하게, 부서지기 쉬운 깨끗함으로 둣는 얼굴, 또는 그런 웃음 -
내 아버지의 마지막 웃음은 정말로 ‘흰’색 그 자체였다. 일 년을 가야 열 마디도 많다 했던 아버지의 고요 속에 늘 하얀 웃음이 있었다. 아버지의 마지막 김장이 마친 날도 하늘 빛이 게슴푸레 해지더니 흰눈이 내렸다. 갈색 빵모자를 쓰고 하늘을 바라보던 아버지의 하얀 입속에서 나온 입김은 세상 속으로 사라졌다.
마치 신기루처럼.
모든 흰(135쪽)
- 당신의 눈으로 흰 배춧속 가장 깊고 환한 곳, 가장 귀하게 숨겨진 어린 잎사귀를 볼 것이다. 낮에 뜬 반달의 서늘함을 볼 것이다. 자작나무숲의 침묵 속에서 당신을 볼 것이다. 그 흰 모든 흰 것들 속에서 당신이 마지막으로 내쉰 숨을 들이마실 것이다. -
이제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흰 것을 본다. 깊을수록 어둠을 지배하는 흰 심지, 어릴수록 어른을 자애하는 흰 미소, 낮에 뜬 달의 외로움을 달래줄 흰 사위, 끝이 없을 장작불을 대령할 자작나무의 흰 정기를 바라본다.
작가는 말한다. “모국어에서 흰색을 말할 때, ‘하얀’과 ‘흰’이라는 두 형용사가 있다. 솜사탕처럼 깨끗하기만 한 ‘하얀’과 달리 ‘흰’에는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함께 배어 있다. (「작가의 말」, 186쪽)”
“어쩌면 아직도 나는 이 책과 연결되어 있다. 흔들리거나, 금이 가거나, 부서지려는 순간에 당신을, 내가 당신에게 주고 싶었던 흰 것들을 생각한다. 나는 신을 믿어본 적이 없으므로, 다만 이런 순간들이 간절한 기도가 된다. (「작가의 말」, 188쪽)
<흰>을 통해 내 사유는 롤러코스터를 타고 다녔다. 어느 때는 복잡해지다가 또 어느때는 단순해지다가. 보여지는 사물의 색도 그랬다. 흰빛을 모아 각 스펙트럼으로 분산시키는 프리즘처럼, 한강의 <흰>은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모든 만물에 각기 다른 스펙트럼의 파장을 달아놓았다. 그리고 모든 만물의 색 바탕에는 늘 ‘흰’색이 있음을 전했다. 흰색을 통해 결코 더럽혀지지 않을 우리의 생각과 사유, 우리의 침묵과 고요, 우리의 슬픔과 사랑을 느껴본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