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8 이성목 <폭설>
고요히 소리없이, 함박눈으로 내리는 첫눈을 기다린 사람들은 다시 또 기다리겠지요. 어제의 눈발은 첫눈이 아니라고 부정하면서요. 제가 그런가봐요. 책방에 잠시 있었는데, 세찬 바람으로 화분이 날아다니고요, 우박이 함께 내려서, ‘저래 놓고도 너를 환대하라고? 겨울아!’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더군요. 사람이나 자연이나, 좀 순한 맛이 있어야지 사랑받는 법... 하여튼 오늘도 강풍예고에 몸이 움츠려듭니다.
학원으로 돌아오면서 따뜻한 국물이 생각나고, 뒤 이어 학생들의 발걸음도 생각나고해서 어묵 몇 봉지를 사왔습니다. ‘원장님, 요리사예요? 오뎅 엄청 좋아하는데 맛있겠다.’라는 학생들. 돈 1만원으로 김이 모락모락, 뜨끈 뜨끈하게 어묵탕을 끓여서 주었습니다. 어제 같은 날은 학원에 왔다는 것 만으로도 칭찬받아 마땅한 날이었기에, ‘많이 먹거라. 또 먹거라’하며 영단어 암기하는 입 속에 미식을 탐구하도록 허락했지요.
그러고 나니, 복이 저절로 굴러와서, 한 지인께서 호박죽을 주셨습니다. 마치 보약 재료가 들어가 있는 듯한 호박죽. 무슨 재료가 들어있을까 음미하면서 먹을 만큼, 맛나게 보신이 되는 호박죽을 남편과 학원 선생님들 모두, 정말 잘 먹었습니다. 다 먹기 아까워서, 딱 두 컵을 남겨놓고 저와 남편은 선생님들 몰래 한번 더 먹을거지요.~~~
어제도 4시간이 넘도록 줌으로 하는 시강독에 참여하면서, 오랜만에 제 나이도 그려지는 이미지와 시 세계를 만났습니다. 이성목시인은 시와 시조를 모두 쓰고 있다고 해요. 첫 번째 시가 <폭설>, 시집의 제목이 <함박눈이라는 슬픔>... 마치 어제 시 줌강독이 있는 줄 아는 것처럼 때마침 첫눈이 와서 참여한 사람들은 제각각의 의미를 달고 행복해했습니다. 저도 다섯편이나 읽었는데요, 시에 대한 평을 하기에는 지식도 깊이도 부족하고 소심해서 대부분 시인의 이야기를 청하는 편입니다. 무엇보다도, 어제의 시들은 분명 쉽지 않은데도 읽으면서 떠오르는 이미지 덕분에 언어의 한계성을 뛰어넘는 예술감각형, 그러면서도 현실비판을 우화적으로 한 시를 많이 만났습니다. 오늘 혹시나 예쁜 동글동글한 눈이 올까?? 결코 폭설이 아닌 눈을 기다리면서 이성목 시인의 <폭설>이란 시를 들려드릴께요. 봄날의 산책 모니카.
폭설 – 이성목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할 일이 없어 길을 걸었고
길 위에 내리는 눈도 할 일이 없어 보였다
눈을 맞는 길도 할 일이 없는 것 같았다
눈이 나를 따라 오기도 하고
내가 눈의 꽁무니를 밟고 가기도 했다
눈 밟는 소리가 좋다고 눈이
한 뼘 더 내려야겠다고 했다
나는 할 일이 없었으므로
나도 눈 밟는 소리가 좋다고 했다
길도 끝나는 게 싫어선지 자꾸
골목을 돌아서 가느라 시간이 늦었다
어디로 가기로 한 것도 아닌데
시간이 늦었다고 눈은
길을 더 먼 곳으로 밀었다
길은 기꺼웠고 나는 걸었다
할 일이 없어 뽀드득 뽀드득 걸었다
할 일이 없는 눈이 내렸으므로
우리는 모두 할 일이 없었다
할 일이 없으니 그만
자야만 할 것 같던 밤이었다
그러자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잠결에도 눈은 할 일이 없어 자꾸 내리고
할 일이 없어 길마저 들어간 다음에도
나무 위로 지붕 위로 눈은
할 일이 없이 자꾸 내린 것 같았다
아침이 무슨 할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왔지만
30년만의 폭설이라고 뉴스가 쏟아졌지만
길은 길 위에서
눈은 눈 속에서
나는 이불 아래서 생각을 주물럭거렸을 뿐
우리는 모두
아무 할 일이 없었다
<사진, 네이버 이미지>
<보약같은 호박죽>
<춥지? 소리도 후루룩 마셔버린 어묵꼬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