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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봄날 아침편지 205

2025.11.9 김현승 <가을의 기도>

by 박모니카

지난밤 내린 가을비가 묵은 시간의 먼지를 씻어낸 듯, 하늘이 화창하네요. 새벽까지 이삿짐 정리로 또 왔다리 갔다리, 3년 넘게 한 번도 손대지 않았던 물건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어요. 어느 것은 재활용 상자로, 어느 것은 분홍 쓰레기봉투로, 또 어느 것은 투명색 비닐백으로... 이 좁은 공간에 이사 와서 그대로 놓였다가, 어쩌면 주인의 마지막 손길이려니, 하는 마음이 있을 느낄지도 모르죠.


정리하다 보면 뜻밖의 물건들이 발견되지요. 저게 큰 기쁨은 누군가의 편지를 다시 읽어보는 일,,, 어제도 그랬어요. 지금부터 10년 전 생일날, 딸이 만들어준 팝업북 형태의 커다란 편지 스케치북, 함께 일하던 원어민 레이철의 감사편지, 또 병원생활을 하던 남편의 편지도 있더군요. 이 글은 모두 다시 접어 고이 넣어두었어요. 또 아들 딸의 학교 때 교복들도 다시 빨아서 접어두고, 딸아이 초3 때, 처음 프랑스여행에서 입었던 노랑 티를 포함하여, 저와 함께 느낌표를 달아 놓을 수 있는 옷들과 물건들... 정말 어쩔수 없이 남겨두어야 할 것들만 담아두었네요.


이번에 이사가게 되는 집은 아마도 제 인생의 마지막 보금자리가 될 곳... 말랭이 마을 아래에 작은 주택입니다. 그 집 역시 크지 않은 곳인데, 봄날의 산책 2호점을 염두에 두고 있어서 지난 몇 달 동안 작은 공사를 했지요. 그러니 또 다시 살림살이가 들어갈 공간이 작아질 수 밖에요. 책방문화에 대한 제 욕심이 날로 늘어나는 것 또한 경계할 일인 줄을 알면서도, 현재진행형으로 살아가는 제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이라, 또 다시 도전하는 셈입니다.


이삿짐을 정리하다 보니, 요즘 세상은 정말 소유할 필요가 없는 것 같아요. 지금 당장, 먹고 입고 사용해야 할 물건들은 한 발자국만 나가면 24시간 가게에 다 있는데요. 다시 소용될 수 있는 것만 정리하는데도 몇 날 며칠이 걸린다는 것은 제가 얼마나 부질없는 소유욕과 함께 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뚜렷한 증거. 헛된 삶을 자백하고 있는 현장입니다.


어제는책방 가는 근대의 골목길에 노란 은행길이 열리기 시작했더군요, 시를 쓰는 누군가가 그곳에 와서 천천히 낙엽 되는 그들을 향해 글 한 줄을 남겨도 좋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네요. 이왕이면 계절의 변화에 몸을 맡기고, 펜 한 자루 잡는 손가락의 리듬과 커피 한잔의 숨결을 따라간다면 저절로 글이, 시가 써지지 않을까 싶군요. 사랑하는 지인들께서 오늘 하루를 그렇게 보내신다면 이 가을 속 당신도 빨갛게 노랗게 물드는 나뭇잎의 정령으로 환생하실 거예요... 저는 열심히 이삿짐 싸고요.^^ 김현승시인의 <가을의 기도>입니다. 봄날의 산책 모니카.


가을의 기도 -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 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

11.9이삿짐2.jpg

사진, 안준철 시인님

11.9 이삿짐1.jpg

사진, 앞집 주택을 지나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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