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편지218

2022.11.22 이해인<내 나이 가을에 서서>

by 박모니카

말랭이마을 어른들의 이야기가 담긴 ‘인터뷰 에세이’ 최종편집본이 왔습니다. 저를 믿고 <봄날의 산책>출판사 이름으로 출간할 지인들의 교정할 원고도 쌓여있구요. 제 글만해도 책을 출간한 경험이 짧은 터라 볼 때마다 실수 투성이입니다. 분명 다 고쳤다 싶은데 또 오류가 보이고 이제 그만 봐야겠다 싶어도 개운하게 원고를 덮을 수가 없구요. 그러다보니 어느새 대 여섯시간이 지나있더군요. 그사이 지인이 보내준 이해인시인의 <내 나이 가을에 서서>시낭송 영상이 있어서 들었습니다. 아마도 이해인시인이 제 나이쯤 이 시를 썼을까 싶게 시를 듣고 있는 제 양심이 움찔했습니다. 시인이 말한 ‘내 나이 가을에 겸손의 언어로 채우겠습니다’를 몇 번이고 되뇌이면서 글자의 오류만을 잡아내던 원고교정에 물음표를 던졌습니다. 얼마나 겸손된 언어로 글을 쓰고 있는가. 부끄러움에 저절로 고개 숙였죠. 글쓰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 그런데 아무 생각없이 글자만 쓰고 있는 것 같아 이 무거움을 고백합니다. 봄날의 산책 모니카.


내 나이 가을에 서서 - 이해인


젊었을 적

내 향기(香氣)가 너무 짙어서

남의 향기(香氣)를 맡을 줄 몰랐습니다

내 밥그릇이 가득차서

남의 밥그릇이 빈 줄을 몰랐습니다

사랑을 받기만 하고

사랑에 갈(渴)한 마음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세월이 지나 퇴색의 계절

반짝 반짝 윤이 나고 풍성했던

나의 가진 것들이 바래고

향기도 옅어지면서

은은히 풍겨오는 다른 이의 향기(香氣)를

맡게 되었습니다

고픈 이들의

빈 소리도 들려옵니다

목마른 이의 갈라지고 터진 마음도 보입니다

이제서야 보이는

이제서야 들리는

내 삶의 늦은 깨달음.

이제는

은은한 국화꽃 향기(香氣) 같은 사람이 되겠습니다

내 밥그릇 보다

빈 밥그릇을 먼저 채우겠습니다

받은 사랑 잘 키워서

풍성히 나눠 드리겠습니다

내 나이 가을에

겸손의 언어로 채우겠습니다.


11.22가을은행1.jpg 샛노랗게 풍요로웠던 은행나무는 단 며칠사아 온전한 겸손을 보여준다
11.22가을은행2.jpg 같은 은행나무의 일주일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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