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가 울린다.
받을까 말까 고민을 하다 발신자를 본다.
서둘러 받는다.
기다리는 전화가 없어 무음으로 핸드폰을 방치했던 적이 있었다. 그렇게 몇 번 연속으로 엄마의 전화를 받지 못했던 마지막 날, 엄마가 찾아 왔다. 대중교통을 타고 왔으면서 양손 가득 무겁게 짐을 든 엄마는 나에게 마중나오라는 전화도 하지 못한 채 얼굴 가득 땀을 흘리며 계단을 올라왔다.
언제나 나에게 미안한 엄마. 어른이 되면 그 미안함을 씻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다.
어른이 되면,
어른이 되면,
어른이 된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줄 알았더라면 어른이 되기를 포기했을 것이다. 지금은 포기하지 않았다기보다는 포기하게 되면 내가 무엇인지 모를까봐 스스로 어른이 되어가는 중이라는 정의 속에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어려운 취업난 속에 책상 한 자리를 얻게 되어 밥벌이를 하고는 있지만 나에게 밥과 잠 잘 수 있는 방을 준다는 이유를 빼면 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
"밥은 먹었어~?"
더운 날 양손 가득 찾아온 엄마의 첫마디는 밥이었다.
대학교 1학년 경제학원론 시간에 엥겔지수라는 개념을 처음 배운 날, 우리집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계의 총소득에서 식료품비가 차지하는 비율로 가계의 생활수준을 객관화한 지수이다. 빈곤을 측정하는 척도로 활용되는데 식료품비는 일정할 수 밖에 없으므로 총소득에서 식료품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적을 수록 생활수준이 높다고 판단하는 수치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수업을 들었을 무렵에는 이 개념을 만든 엥겔이 미웠다. 밥을 먹을 때마다 나는 나의 생활수준을 스스로 평가하게 되었다.
엄마가 가지고 온 짐들을 하나씩 풀어 냉장고에 넣었다. 얼마나 무거웠을지 장바구니를 들고 온 손가락이 벌겋게 된 것으로 추측해 본다. 다먹지도 못할 뿐더러 이렇게 많은 것을 이고지고 왔다는 생각에 화부터 버럭 내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는 내가 빨리 어른이 될 수 있을 줄 알고, 빠른 시일 안에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을 줄 알고 큰 소리를 내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몇 해가 흐르고 나는 더이상 소리치지 않는다. 내가 어른이 되지 못한 이유도 있지만 이런 나를 생각하며 반찬통을 채웠을 엄마의 마음에 목청이 오그라졌다.
반찬을 정리하는 동안 잠시 앉아 있던 엄마는 마지막 반찬통이 냉장고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자 자리에서 일어난다. 좀 더 앉았다 가라는 나의 만류에도 너도 힘들텐데 어서 쉬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신발을 구겨 신는다. 어떤 말로도 신발을 다시 벗지 않을 걸 알기에 나도 얼른 신발에 발을 쑤셔 넣고 따라 나선다. 스킨십이 적었떤 우리는 모녀사이지만 팔짱도 끼지 않는다. 적당하게 가까운 거리로 종종걸음으로 엄마의 속도를 맞춘다. 이런저런 일상적인 이야기로 지하철역까지 걷는다. 엄마와 개찰구에서 헤어지고 나는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온다.
돌아가는 길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며 하늘을 본다. 엄마에게 전화대신 고맙다는 메시지를 보낸다. 나는 언제 어른이 될까. 엄마같은 어른이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