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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그리고 한강

말랑말랑 감성을 적시던 시

by 고요한밤

1. 나희덕 시인의 '뿌리에게'


10대 시절을 지나는 한 소녀에게

감정적인 따스한 위로를 안겨주었던 작품으로 기억한다.

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수상작으로

신문 지상에 우연히 발견한

이 시 한 편이 마음에 꽂혀버린 탓일까

신문에서 오려낸 이 시 한 편을 한동안 방문 옆에 붙여두고

드나들 때마다 한 구절씩 되뇌어 보았던 것 같다.


89년 봄은 새로운 학교에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하루하루가 분주하게 돌아가던 고등학교 1학년 시기였다.

대졸 후 초임교사로 첫 담임을 맡은

재치발랄 20대 여자 불어선생님,

새로운 과목 선생님들과

새롭게 만난 급우들이 있었고

다양한 동아리들에서 신입생을 모집하고 면접하던 그때에

당연히 좌고우면 하지 않고

내가 직진한 곳은 '문예반'이었다.

내가 생각한 만큼의 다양한 글쓰기의 기회는 별로 없었고

고2, 고3 선배가 후배들을 불러 모아

군기를 잡고 단체 기합을 주기도 했다.

뭔가 마음 둘 곳을 찾아 헤매느라,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누군가의 눈에 뜨이고

지식으로든 점수로든 뭐라도 잘 보이고 싶어 하던

제대로 형태가 이뤄지기 전의 덩어리 반죽 단계에 해당했던

알록달록한 감성의 시기를 함께 했던 작품으로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뿌리에게 / 나희덕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나는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

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

네 숨결 대이던 그 자리에 더운 김이 오르고

밝은 피 뽑아 네게 흘려보내며 즐거움에 떨던

아 나의 사랑을


먼 우물 앞에서도 목마르던 나의 뿌리여

나를 뚫고 오르렴,

눈부셔 잘 부서지는 살이니

내 밝은 피에 즐겁게 발 적시며 뻗어가려무나

척추를 휘어 접고 더 넓게 뻗으면

그때마다 나는 착한 그릇이 되어 너를 감싸고,

불꽃같은 바람이 가슴을 두드려 세워도

네 뻗어가는 끝을 하냥 축복하는 나는

어리석고 은밀한 기쁨을 가졌어라


네가 타고 내려올수록

단단해지는 나의 살을 보아라

이제 거무스레 늙었으니

슬픔만 한 두릅 꿰어 있는 껍데기의

마지막 잔을 마셔다오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내 가슴에 끓어오르던 벌레들,

그러나 지금은 하나의 빈 그릇,

너의 푸른 줄기 솟아 햇살에 반짝이면

나는 어느 산비탈 연한 흙으로 일구어져 있을 테니


나희덕 시집 / 뿌리에게 <창비>


2. 한강 작가 '편지'


89년이 고등학교 신입생 시기였다면

92년은 그토록 원하던 대학생이 되어

캠퍼스를 누비던 시절이다.

캠퍼스 곳곳을 또각또각 구두 소리로 찍고 다니며

남자들 가득한 학과에서 신입생의 자유와 특권을 누리던 때.

한편으론 집으로부터 경제적 독립을 선언하여

부지런히 과외를 뛰며 매 학기 등록금 돈을 모아야 했고

또다른 한편으론 마음속 깊이 꾹꾹 눌러오던

불만과 반항이 스물스물 삐져나오며

읽지 말라는 책, 약함에도 들이켰던 술,

끼지 말라는 모임과 시위 등등.

안 맞는 전공을 잘못 택했다는 후회까지 겹치며

새로운 누군가로 다시 태어난 듯이

하루하루 눈빛이 변해갔다.


그 해 하반기 11월, 여러 혼돈을 통과해 가던 그 때

아침 등굣길 받아 든 학보에서

윤동주 문학상 수상작 시 한 편을 접했다.

국문과라면, 4학년이라면, 대상을 수상하려면

이 정도 수준으로 써야 하는구나 경이롭기까지 했던

읽은 순간의 그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곤 오랫동안 그 이름을 잊고 살고 있었다.

작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발표되었을 때에

미처 읽지 못한 그녀의 여러 작품들 대신

30여 년 전의 시가 다시금 뇌리를 스쳐갔다.



편지 /한강


그동안 아픈데 없이 잘 지내셨는지

궁금했습니다

꽃 피고 지는 길

그 길을 떠나

겨울 한번 보내기가 이리 힘들어

때 아닌 삼월 봄눈 퍼붓습니다

겨우내내 지나온 열 끓는 세월

얼어붙은 밤과 낮을 지나며

한 평 아랫목의 눈물겨움

잊지 못할 겁니다

누가 감히 말하는 거야 무슨 근거로 무슨 근거로 이 눈이 멈춘다고 멈추고

만다고… 천지에, 퍼붓는 이… 폭설이, 보이지 않아? 휘어져 부러지는 솔가지

들, … 퇴색한 저 암록빛이, 이, 바람가운데, 기댈 벽 하나 없는 가운데, 아

아… 나아갈 길조차 묻혀버린 곳, 이곳 말이야…

그래 지낼 만하신지 아직도 삶은

또아리튼 협곡인지 당신의 노래는

아직도 허물리는 곤두박질인지

당신을 보고난 밤이면 새도록 등이 시려워

가슴 타는 꿈 속에

어둠은 빛이 되고

부셔 눈 못 뜰 빛이 되고

흉몽처럼 눈 멀어 서리치던 새벽

동 트는 창문빛까지 아팠었지요.

……… 어째서…마지막 희망은 잘리지 않는 건가 지리멸렬한 믿음 지리멸렬한

희망 계속되는 호흡 무기력한, 무기력한 구토와 삶, 오오, 젠장할 삶

악물린 입술

푸른 인광 뿜던 눈에 지금쯤은

달디 단 물들이 고였는지

보고 싶었습니다 한번쯤은

세상 더 산 사람들처럼 마주 보고

웃어보고 싶었습니다.

사랑이었을까… 잃은 사랑조차 없었던 날들을 지나 여기까지, 눈물도 눈물겨

움도 없는 날들 파도와 함께 쓸려가지 못한 목숨, 목숨들 뻘밭에 뒹굴고

당신 없이도 천지에 봄이 왔습니다

눈 그친 이곳에 바람이 붑니다

더운 바람이,

몰아쳐도 이제는 춥지 않은 바람이 분말 같은 햇살을 몰고 옵니다

이 길을 기억하십니까

꽃 피고 지는 길

다시 그 길입니다

바로 그 길입니다

출처 : 연세대학교 대학신문, 『연세춘추』, 1992.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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