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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시작 : 10대 시절

-말랑말랑 감성으로

by 고요한밤

1. 첫 소설을 쓰던 때


86년 Y여중 1학년 때로 기억한다.

특별활동으로 문예반을 선택했었다.

키 크고 검정 뿔테 안경을 쓴

약간 음울한 눈빛의 남자 선생님께서

겨울방학 숙제로 원고지 100장 내외로

창작 단편 소설을 제출하라고 하셨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숙제를 완료하여 제출한 용자는

문예반 전 학년에서 나 혼자 뿐이었다고 한다.

짧은 독후감이나 생활문, 시 정도를 쓰는 기회는 흔했으나

단편 소설이라, 그것도 200자 원고지 100장 분량이라니.

긴긴 두 달간의 겨울방학 동안 방구석에서

두툼한 원고지 뭉치를 썼다 지웠다 해가며

나만의 스토리 구상을 해보았었다.

주인공은 당시 옆집에 거주하던,

지방에서 상경하여 서울 친척집에서 학교를 다니는

키 크고 꺼벙한 몇 살 위의 오빠였다.

어릴 적 부뚜막 걸쳐둔 뜨거운 솥에 다쳐서

뒷머리 숱이 거의 없다는 건

아줌마들끼리의 대화에서 진즉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친하게 지내지도 않고

말도 나눠본 적이 거의 없었던 인물이었는데,

그 방학 기간 동안 그 오빠를 주인공으로 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몇몇 에피소드를 엮어

꾸역꾸역 100장 분량을 채워서 제출한 걸로 기억한다.

한 글자, 한 글자의 중요성을 조기에 체득했다고나 할까.

갑작스럽게 그 오빠의 부고를 전해들은 걸로

결말을 서툴게 마무리했었는데

문예반 선생님은 얘 꽤나 독특한 물건이라 느끼셨는지

3월 신학기에 같은 재단의 Y여고로 옮기시면서

자기가 제대로 키워 줄테니

2년 후 꼭 그 학교로 오라고 하셨었다.

그 분은 몇 년 후 정식 등단하시고

여러 권 소설을 출간하신 중견 작가가 되셨다.

친언니도 진학한 그 Y여고로

나도 당연히 배정되겠거니 했건만

생각지 못한 신생 공립 남녀공학 고등학교로 정해졌다.

신생 학교에 골고루 안배한다는 취지에서

전교에서 연합고사 성적 기준 6명이 뽑혀진 결과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2. 한국 근대소설 독파의 시기


각종 책이나 잡지, 신문 등 가리지 않고

눈과 머리로 받아들이던 10대 시절,

집에는 더 이상 읽을 문학 쪽 책이 없었던 시기에

방학마다 옆집에 가서 전집으로 쌓여있는

한국 중장편 근대소설을 집중적으로 읽었었다.

이광수의 '흙'이나 심훈의 '상록수'부터 시작하여

수십 권의 세로로 활자가 배열된 두꺼운 책들을

하나하나 씹어 삼키듯 읽어갔다.

작가와 책제목으로만 알던 교과서 속의 작품들은

내 머릿속에서 새롭게 기억되기 시작했고

특별히 익히고자 해서 익힌 게 아닌 속독의 습관은

나중에 모의고사, 학력고사 등 긴 지문을

술술 읽어내리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다른 친구들은 하이틴 로맨스나

만화 가게의 순정만화에 빠져있을 무렵에

날밤을 새며 빌려온 책들의 세상에 빠져있던 나.

소설 작품 속의 세상에서나 가능한

순정파의 순수 연애와 사랑 장면을

기필코 대학 가면 현실서 이뤄보리라

남몰래 꿈꾸어 보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래서 내게 있어 대학이란 ‘해방구’의 소망이었다.


3. 고등학교 문예반 시절


학교가 생긴 지 몇 년 안 되고 (본인이 7기 졸업)

석탄 공장과 지하철 선로 근처에 위치하여

매일 날리는 시커먼 분진으로 인해

아침마다 등교하면 화장지로

책상 의자를 닦고 앉아야 했다.

당시엔 흔치 않았던 남녀공학 학교라

건물의 1,2층은 남학생 반,

3,4층은 여학생 반이 사용했으며

ㄷ자 모양 건물에 쉬는 시간마다

저마다 창가에 매달려 이성을 구경하던 곳이었다.

거기다가 당시 흔치 않던 학생 민주화의 시작으로

학생회장 직선제 등을 실시한

진보 성향이 너무도 뚜렷한 학교였다.

서울시 교육청 산하 공립이므로

서울 시내 각 학교에서 전근 와서 이동 근무하는 교사들은

빡빡한 강남 학군으로 옮기기 전에

쉬어가는 코스 정도로 여기는 분들이 많았다.

열정적으로 학생을 챙기는 분들은 극소수였고

전반적으로 수업이나 진도, 입시에 대한 열의가 없었다.

서울 사대 출신의 젊고 깨어있는 교사들이 적지 않았지만

89년 전교조 파동 이후 여러 명이 학교를 떠나셨다.

대학 진학률 따위에 연연하지 않고

의무적 보충수업이나 야간자율학습이 따로 없었으며

남녀 혼성의 다양한 클럽활동 등.

당시로서는 정말 자유로운 학교 분위기였고

주변에서는 그저 기피하고 싶어 하는 후진 학교였던 것이다.

두 살 위 언니는 내가 갈 거라 생각하던 사립 여고에서

전교권 등수를 다투며 서울대에 가려고

한밤중까지 학교에서 공부하고 오는 우등생이었고

그에 비해 나는 대낮에

근처 초등생들과 같이 하교하여

집에서 잘 거 자고 소설책이나 읽는 한량이었으니

내가 굳이 열심히 하지 않아도

잡다한 지식들이 많아 똘똘하단 소리를 들으며

한자리 등수는 쉽게 나오던 시기였다.

내가 선택한 문예반 클럽활동에서도

문학의 밤이나 시화전 등

지금 같으면 오그라드는 창작 활동에 참여하긴 했지만

그에 대한 기억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4. 언감생심 국문과?


서울대를 가고자 공부만 했던 언니는

첫해 낙방하고 종로학원서 재수까지 했건만

두번째 낙방하고 난 후 후기대학으로 진학하게 되었고

그 시대 장녀의 서울대 입학에

모든 것을 올인하신 부모님의 실망이 특히 컸다.

언니가 쓰던 문제집, 참고서를 물려받아야 해서

지우개로 언니가 쓴 흔적을 빡빡 지워가며

새 교재로 공부해 보는 게 소원이었던 나.

서울 사대를 억지로 지원하면

언니처럼 떨어질까 우려되는 마음에

막판에 학교를 바꾸고 전공 방향도 틀어서

재수의 과정 없이 한 번에 합격을 했다.

국문과나 국어교육 쪽이었으면

수십 년 후 나의 인생이 달라졌을까?

글쓰기나 책읽기는 좋아했지만

평생 업으로 삼기에는 웬지 꺼려졌고

어딘가 취업을 하고 돈을 모으려면

현실적인 공부가 필요하다는 조언에

수긍하며 선택한 길이었지만.

결과적으론 취업도 못했고 돈도 벌지 못했고

이제 본연의 ‘작가’의 이름으로

다시 인생 후반을 달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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