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떨결에 인생의 첫 책
1.
북아일랜드 시절 아기가 잠든 낮 시간을 이용하여
느리디 느린 인터넷을 연결하여
일기글을 써 내려가던 때가 있었다.
유난히 활동량이 많은 아기는
깨어있는 동안 그 에너지를 몽땅 소진하고
낮잠으로 오후 3-5시 사이 두 시간 남짓 푹 자고 일어났다.
그 두 시간이면 나도 옆에 같이 누워
꿈나라로 둥둥 떠날 수도 있거나
빨래를 돌리거나 어질러진 공간을 정리한다던가
퇴근하고 돌아올 남편을 위해 저녁을 준비한다던가
좀더 생산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었던
금쪽같은 재충전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귀한 시간마다 구형 노트북을 열었고
‘베이비드림'이라는 육아일기 사이트에 접속하여
육아일기라는 명목 하에
아기의 일상과 엄마의 마음을 담아
멀리 있는 가족과 친지, 지인들을 향해
한줄한줄 자유로운 기록을 남겼다.
한편으론 황량한 무인도와도 같은 유럽의 서쪽 끝에서
비싼 국제전화로도 다 표현할 수 없었던
"나 여기 이렇게 살아 있다고요!"
처절하고 간절한 외침,
그야말로 소리없는 아우성이었다
2.
한창 베이비드림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던 2001년 봄에
2번째 생일맞이 선물로 엄마가 마음먹은 건
그간의 육아일기 모음집이었다.
베이비드림 사이트에 쌓인 글들을
날짜 별로 카피&페이스트 하여
일일이 철자와 문법을 검수하는 절차를 거쳤다.
느리디 느린 ADSL 인터넷으로
밤늦게까지 눈 빠지게 검색한 결과
내가 준비한 분량의 원고를 출판해 줄 수 있는
맞춤형 책 출판 시스템이 있긴 있었다.
대신 사진이나 삽화 삽입은 불가하다 하고
권당 가격이 5만 원 정도 나온다고 해서
시가와 친정에만 드릴 용도로
소량 5권 정도만 준비하는 것으로 했다.
긴 기다림 끝에 내 인생의 첫 책은 그렇게 탄생/배송되었다.
<책의 뒷표지>
<목차 페이지 1>
<목차 페이지 2>
<목차 페이지 3>
<목차 페이지 4>
3.
2년 남짓 상당히 많은 분량의
사진과 글들, 방명록이 모여있던 저장고였지만
2001년 연말이던가 어느 날 갑자기 사이트가 폐쇄되었다.
한국에 있던 사용자에게는
백업된 시디를 신청자에 한해 발송했다는데
나처럼 외국에서 상황파악이 늦었던 사람들에게는
백업 신청의 기회도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고
개인적인 통보 절차조차 따로 없었다.
당시 이메일로 강력히 항의했었으나
서버 정리를 마친 이후라 더 이상 방법이 없다는
지극히 차갑고 단순하고 황당한 답변만이 돌아왔다.
눈물을 머금고 내 손 안에 남은 책 분량을 지킨 게 어디냐며
자체 백업을 제때 해놓지 않은
나 자신의 과오를 자책할 뿐이었다.
그 사이트에서 온라인으로 교류하며 두런두런 삶을 나누던
다른 엄마들과도 하루아침에 연결이 끊기게 되었다.
4.
4년 전 1인 독립출판을 결심하고
한국서 설립절차를 마친 후
가장 먼저 이 첫 책을 다시
개정증보판으로 발간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간 사용한 노트북이 몇 번 교체되고
백업된 원고 파일들은 사라져버린 덕택에
종이책이든 전자책이든 출간 작업 시작을 하려면
다시 노트북으로 자판 두들기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아직 1/3 정도만 진행되어 앞으로도 시간을 더 내야겠지만
언젠가는 꼭 해보고 싶은 과업 중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