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
옛 메모를 본다. 누가 쓴 것일까. 메모가 하얀 내복약처럼 책상에 놓여 있다. 메모는 행복했던 유세프 시절 '그라나다' 같다. 에메랄드와 히아신스와 추억의 음악이 가득한 은항아리.
메모를 읽는다. 아니다. 본다. 이때 메모는 읽는 게 아니고 보는 게 맞다. 검은 눈동자의 흰 종이의 스침과 섞임과 얼룩짐 그리고 부풀어오름.
언제 쓴 것일까. 메모를 보다가, 나는 기여코 파스칼 메르시어Peter bieri의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탑승한다. 저마다의 다른 빛깔의 누더기를 펄럭이며 앉아있는 메모 속 사람들. 그때 경악과 환멸과 흐릿한 차창 속에 노파가 가래를 끓어올리며 묻는다. '켕에Quem e?
메모는 지워지고 고쳐진 다시 덧쓴 양피지palimpsest. 내가 본 메모는 그에 대한 기록이다. 그는 누구였던 걸까. '켕에'.
메모는 이렇게 써 있다.
'그는 갈수록 자신에 대해 무뚝뚝하다. 팔도 다리도 마음도 무엇 하나 가눌 수 없다. 그와 외출을 한다. 꽃박람회장이다.
'은검초'란 걸 거기서 본다. 사람 손이 닿으면 시들어 죽는다는 힐데아킬라 분화구 주변에서만 군생하는 식물 '은검초silver swords'.
그는 은검초처럼 누군가 손에 닿으면 시들어 버린다. 예전의 그가 아니다. 그와 은검초를 본다. 금목서의 반대편 먼 분화구 '은검초'.
'켕에'. 메모 속의 그는 누구인가. 그이며 그녀, 노인이며 갓난아이, 백치이며 천재. 현자이며 우민. 우리와 그들. 내 안에서 웅성거리는 무수한 그들.
다시 이 메모가 내가 적어놓은 거 맞나 갸웃댄다. 멀다. 나로부터 또각또각 나가버린 탈존의 메모. 송전탑의 파란 전선이 찢어대는 구름의 질문.
이때 메모는 '특별한 사물specific object'의 탈각한 빛. 빛이라는 환청 속의 노랑무늬메아리. 시선과 관점과 문양을 벗겨놓은 은항아리 백합. 어떤 박물지의 바랜 기록. 백치의 깊고 드높은 의미론semantics.
누가 썼는지 분간되지 않는 생각의 곤두박이. 곤두박질의 하얀 분산. 산책로 곤줄박이의 컹컹거림. 지나가는 개의 지저귐.
이걸 이슬외투를 말끔하게 차려입은 행랑거미의 딴집살이, 이걸 그냥 허접쓰레기 '망각'이라 불러야 하나.
그건 내가 쓰지 않았어요. 않안안않안안. 흐른다. 표류한다. 흔적에서 적을 뺀 흔. 어떤 상태의 지속.
너무 심심해 '파손주의fragile' 소포를 쌌던 뽁뽁이를 하나씩 터뜨릴 때, 리스본행 야간 열차의 차창 속 노파는 묻는다. '켕에'.
'캥에'는 가래끓는 쉬식거리는 납청 목소리로 묻는 '누구요?'라는 뜻의 낯선 분화구에서의 말.
우리 모두는 파손주의 연약한 짐승. 그렇지만 누구요. 손이 쩍쩍 달라붙는 살얼음 낀 닫힌 내부의 문고리를 잡아당기며 가끔 '켕에'라고 물어줘요. 물물물물물.
발육되기 전 툭 떨어지는 열매. 노린재와 진딧물도 개미도 핥기를 거부한 불가촉의 유월. 유월의 전당포에 놓인 패물처럼 빈약하고 우스운 '켕에'. 그건 말벌이 아니고 꽃등에가 아니고 단지 '켕에'. 쏘여도 급성 탈수도 발열도 없으니 걱정 말아요. '켕에'.
리스본행 야간 열차가 달려간다. 그 객실에선 '글로리아'가 외적이고 시끄러운 명예와 내적이고 조용한 축복이란 두 가지 뜻이 있다 쓴다. 그러므로 탑승자들은 열차의 덜컹거리는 이 소리 속에 섞여오는 질문에 귀가 화끈댈 수밖에 없다. '켕에'.
메모 속 금목서와 은검초. 두 개의 서로 다른 누더기도 결국은 겹치고 눅지고 섞여 바래어 자꾸만 낯선 분화구의 말로 내게 묻는다. 점차 자주 뜬금없이 물어온다.
'켕에'.
* ‘켕에’는 ‘누구시오’라는 뜻의 말, ‘너는 도대체 누구인가?’
*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 (페터 비에리) 저 / 전은경 역 | 들녘 | 20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