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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back Mar 10. 2024

걷기의 인문학 / 리베카 솔닛 / 2000

Wanderlust / Rebecca Solnit

뿌리 깊은 방랑기가 있는 나에게 이 책의 표지는 사막 한가운데에서 발견한 오아시스와 같았다.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 예찬'이 몸과 자연이 만나는 방식에 대한 찬가(詩)라면,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은 인류가 다리를 이용하여 몸을 이끌고 다니면서 사유하는, 즉 정신과 육체의 관계를 역사적 방식으로 서술한 통사(通史)이다. 번역가는 김정아이다. 그는 역자후기에서 걷기의 인문학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에 대해, '두 발로 걷다가 만나는 길목에 인간과 인문이 있기를 바라는 기도이자 저자의 역사와 독자의 역사가 인간, 인문의 길을 함께 걸어왔고 또 계속 함께 걸어가리라는 약속어음이다'라고 거창하게 원제목을 바꾸어버린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내가 보기에 번역가는 작가의 뜻을 오역했다. 이 책의 원제는 'Wanderlust : A History of Walking(방랑벽 : 걷기의 역사)'이며, 이는 인문학이라는 관념적 세계를 붙들고 싶어 하는 번역가의 고상한 기대보다는 오히려 사막에서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밤낮없이 누더기처럼 걸어가면서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단결하고 이 사회가 저지르는 악행을 반대하기 위하여 저항하며 투쟁해 온 저자의 실천의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기행문, 혹은 역사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물론 이 책의 구조에 인문학적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걷기의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된 재료일 뿐, 이 책은 번역가가 인문학적 환상을 품고 싶어 하는 그러한 고상한 교양서가 아니다.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리베카 솔닛이라는 상징이 설명하듯, 이 책의 서두에서는 그녀의 도발적인 자기 투신, 즉 핵실험을 반대하기 위하여 시작한 시위의 과정이 자신의 보행적 여행습관과 방랑벽의 기원이라는 고백이 드러난다. 청명한 하늘 위로 피어오르는 버섯구름과 끝없이 펼쳐진 사막길, 그리고 그 고요하고 은밀하면서도 경이로운 풍경을 조롱하듯 펼쳐지던 미국의 군사폭력을 고발하는 방법은 결국 느리면서도 지치지 않고 질기도록 이어지는 단체의 보행과 행진이었던 것이다. 우리 또한 민주화를 이루어가던 과정에서 누가 등을 떠밀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넓은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서 촛불을 든 시민의 무리 속에 스며들 수 있었음을 상기할 수 있지 않은가.


DNA가 이끄는 대로 항상 어딘가를 쏘다니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나에게, 갖가지 몽상과 회상, 그리고 끝없는 사념을 불러일으키는 이 '걷기'라는 행위에 대하여, 저자는 걷기의 역사적인 서사를 자세하게 설명해놓음으로써 내가 그 속에서 나 자신의 방랑습관과 역마살 버릇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그 걷기의 역사적 과정 속에서 워즈워스와 키에르케고르, 제임스 조이스와 버지니아 울프 등을 비롯한 수많은 작가들이 어떻게 하여 '보행'과 '사유'의 연결고리를 갖게 되었는지, 왜 가만히 앉아 있을 때보다 두 다리를 움직여 몸을 이동시키는 과정 속에서 생각이 활개를 펴는지 독자들이 상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스'와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에서 주인공들의 머릿속에 뒤죽박죽 뭉쳐있는 생각들, 기억들은 그들이 길을 걸을 때 가장 잘 풀려나온다.


막상 집 안에 있기가 답답하여, 가볍게 외출한 후 목적지 없이 길이 나 있는 대로 걷다 보면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들이, 사실은 잠재의식 속에서 깊은 잠을 자고 있다가 육체의 순환과 반복적인 보행적 리듬으로 인하여 그 속에 자연스럽게 올라타 마치 허밍(humming)하듯 사유의 과정 속으로 배어 나오게 되는 이유를 나는 깨닫게 된다. 수년 혹은 수십 년을 이리저리 배회하였지만, 나는 오히려 할 일이 없어서 배회했다기보다는 무언가 머릿속에 담긴 나의 의식들, 그리고 내 기억 속에 내재되어 있는 여러 가지 추억들이 마치 바람을 맞고 흔들리는 나뭇가지 줄기 속 물이 모세관현상에 의해서 위쪽으로 이동하는 것처럼, 내 몸 전체에 퍼지고 녹아들어 오랫동안 망각하고 있었던 장면들 까지 소환하기 위해서 걸었던 것은 아닐까.


매일 30킬로미터씩 날마다 몇 달을 걸어가다 보면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나중에 되돌아보면서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일례로 나는 과거에 일어났던 모든 일과 만났던 모든 사람을 세세하고 선명하게 기억했다. 내가 나눴던 대화, 엿들었던 모든 단어 하나하나가 기억났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유년 시절까지 기억났다. 이런 식으로 나는 과거의 사건들을 정서적인 거리를 두고 돌아볼 수 있었다. 마치 어린 일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일어났던 것처럼. 나는 오래전에 죽은, 잊고 있었던 사람을 다시 발견하고 새롭게 알아가고 있다 (로빈 데이비드슨 / 발자취 中)


나는 비로소 내가 정처 없이 걷는 이유를 인지한다. 나는 배회와 방랑의 구실을 얻는다. 나를 만든 나의 가치관, 나의 의식과 정서, 모두 나의 육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몸과 마음은 분리될 수 없고, 인간은 노력하고 분투하여 눈에 보이는 육신을 움직인 후,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을 만들어낸다. 


당장 걸어라! 사유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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