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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숲 1

춤추는 토란

by 은림

1.


바람이 살랑인다. 선선하고 물 내 가득한 늦봄바람이다. 토란은 흙 위에 얕게 내밀고 있던 싹을 힘차게 밀어 올렸다. 달빛이 부드럽게 떡잎에 닿으며 사방에서 어둠이 속살댔다. 소리가 아니면서 소리인 것들이 토란의 작은 이파리를 부드럽게 흔든다. 토란은 떡잎 끝에 맺힌 이슬을 살짝 핥았다. 보얀 안개가 공기 중에 녹아서 포근 촉촉하니 기분이 좋다. 토란은 가느다란 줄기를 이리저리 흔들어 보았다. 부드럽다. 여린 미역처럼 질기고 갓 쪄낸 달걀처럼 탱탱하다. 토란은 바람이 없어도 스스로 살랑이며 잠시 놀았다. 반듯하니 이어진 화분 줄에 토란 그림자 하나만 올록볼록 춤춘다. 토란의 양 옆으로 끝도 보이지 않게 늘어선 화분 속의 다른 꽃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끙차.

살랑이기에 싫증난 토란은 흙 속에 누워 있던 뿌리를 뽑아냈다. 먼지처럼 가벼운 흙으로 덮여 있던 가느다란 뿌리가 쏙 빠져나왔다.

너무 멀리 가지 마. 꼬마.

토란이 꼬물대는 기척에 설핏 깬 옆 화분의 엉겅퀴가 굽이진 가시 줄기를 흔들었다.

뿌리가 마르면 오도 가도 못 하게 돼. 그럼 말라죽는다.

토란은 그러겠다고 작은 이파리를 흔들어 대답하고 냉큼 화분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엉겅퀴도 같이 가요. 재미있을 거야.

난 안 돼.

왜요?

내 뿌리는 너처럼 튼튼하지 않아.

엉겅퀴는 마르고 딱딱한 땅 위에 꼿꼿이 서 있는 토란을 보면서 감탄했다.

나도 싹일 때는 그런 뿌리가 있었지. 너처럼 튼튼했는진 모르겠지만. 하지만 지금은 너무 가늘고 줄기는 너무 무겁구나.

엉겅퀴는 화분에 심긴 다른 꽃들과 다를 바 없는 가느다랗고 창백한 뿌리를 내보이며 한숨처럼 이파리를 흔들었다.

왜 그렇게 됐어요?

글쎄다. 다들 이렇게 되니까, 원래 그런 건가 보다 하는데.

에이. 난 그렇게 안 될래. 그럼 아무 데나 놀러 갈 수 없잖아요.

토란은 뾰족한 떡잎을 저었다. 엉겅퀴는 웃었다.

부디 그러렴.

토란은 엉겅퀴를 뒤로하고 도로록 화분 줄 끝까지 달렸다. 화분의 줄 사이사이 그늘엔 토란처럼 어린싹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싹들은 밤새 달빛과 그림자 틈새를 뛰놀며 놀았다. 그리고 마지막 달빛이 지기 전에 자기 자리를 찾아 되돌아갔다.

왜 가야 하는데?

토란은 더 놀고 싶었다.

밤에 놀러 다니는 거 아베한테 들키면 야단맞아.

장미 싹이 말했다. 아베는 정원을 관리하고 꽃들을 보살피는 관리자로, 크고 둥글고 딱딱한 열매에 싹도 트지 않은 채 세 쌍의 뿌리로 걸어 다녔다.

왜.

몰라. 아무튼 저번에 미나리가 크게 혼나는 걸 봤어.

토란도 미나리를 알았다. 미나리는 언젠가부터 밤놀이 때 나타나지 않았다. 화분에서 자나 싶어 몇 번인가 줄로 찾아갔지만 어디에도 미나리는 없었다. 우연이겠지만 토란은 기분이 나빠졌다.

내일 밤에 보자.

밤에 봐.

토란은 홀로 화분들 사이를 걸었다. 꿈에 젖은 꽃들이 잠든 밤은 다른 쪽 밤보다 훨씬 더 깊고 농밀했다. 아름다운 돌기들을 가진 화분 무늬가 희미한 달빛 속에 음영 져서 웅크린 작은 괴물처럼 보였다. 토란은 괴물에게로 다가갔다. 그림자 괴물은 모양이 변하면서 조금씩 뒤로 달아날 뿐 잡히지 않다가 가시 울타리 근처에서 사라져 버렸다. 토란은 위를 쳐다보았다. 달이 마지막 힘을 모아 비추는 정원의 울타리는 하얗고 날카롭고 견고해 보였다. 토란은 화끈대는 뿌리를 문지르며 잠시 울타리에 기댔다. 세상에서 가장 무디고 견고해 보이던 가시 울타리는 의외로 성기고 푸근했다. 아래쪽의 늙은 가시들은 날카로운 위쪽과는 달리 공격적이기보단 까칠까칠할 뿐이다. 토란은 오래되어 말라 도드라진 울타리 껍질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이 안에도 누군가 있을까?

울타리는 그냥 울타리고 돌멩이나 화분처럼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토란은 울타리도 꽃들이랑 같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다. 말이 통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니까 알 수 없을 뿐, 사실은 울타리도 울타리들끼리는 뭔가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꽃들은 대체 왜 저기 있는지, 뭘 하는지 이상해하고 있겠지. 토란은 황당한 생각에 피식 웃었다. 뒤에서 울타리를 따라 희미한 진동이 느껴졌다. 딱딱한 가시 아래 흐르는 수분이 토란의 마음을 읽고 화답하는 것 같았다. 토란은 울타리 틈을 비집고 나갔다. 순간 온 줄기를 뒤흔드는 청쾌한 ‘소리’가 쏟아졌다.

맴 맴 싸르르르.

토란은 벼락을 맞은 것처럼 놀랐다. 그때까지 토란은 소리가 뭔지 몰랐다. 아베의 정원엔 바람 소리와 꽃들이 대화하기 위해 줄기를 움직일 때 바스락대는 울림 외에 다른 ‘소리’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토란은 그게 올해 첫 매미 소리라는 걸 알지 못했고 매미는 밤에 울지 않는다는 것도 몰랐다. 하지만 그 매미는 밤에 울었고, 아마도 그게 매미의 마지막 순간이었겠지만 토란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홀려서 듣기만 했다.

날카롭고 시원하고 애처롭다.

매미 소리가 그치자 토란은 세상이 변했다는 걸 느꼈다. 밤이 공허했다. 친숙하고 안전한 고요는 더 이상 토란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너무 허전해서 토란은 울고 싶어졌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왜 이렇게 마음이 먹먹한지 제대로 알 틈도 없이 모든 것이 그렇게 갑자기 달라졌다.

토란은 소리의 잔영을 쫓아 울타리 너머로 뿌리 돋움 해 보았다. 아직 키가 너무 작았다. 게다가 위쪽 가시들은 크고 날카로워서 여린 줄기에 아프게 파고들었다. 토란은 물이 말라 버석대는 뿌리를 주물렀다. 이쯤에서 화분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가는 중에 넘어져서 일어날 수 없게 될 거다. 그리고 다음 날 아베가 발견할 때까지 꼼짝도 못 한 채 누워 있거나, 아니면 그전에 말라죽겠지. 둘 중에 어느 게 더 나쁜지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둘 다 절대로 싫었다. 토란은 떡잎 마디를 늘어트리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먼지보다 가벼운 토란의 뿌리 자국이 미련스레 거기 남았다.


늦었구나.

엉겅퀴는 일찌감치 깨어 파르스름한 새벽빛 아래 부숭부숭한 줄기와 꽃받침을 다듬고 있었다. 엉겅퀴의 꽃은 이제 막 피는 참이었는데 꽃잎이 작고 모양이 날카로워서 주변의 꽃들에 비하면 초라했다. 아베가 꽃잎을 다듬는 법이나 줄기 관리에 대해 충고해 주었지만 엉겅퀴는 별로 나아질 게 없었다. 하지만 엉겅퀴는 실망하지 않고 의연하게 받아들였다.

오늘 신기한 걸 보았어요.

토란은 엉겅퀴의 도움으로 높은 화분 위를 어렵잖게 기어올라 뿌리로 흙을 헤쳤다.

뭘 봤는데?

그게, 봤다고 해야 하나, 뭔가……. 아무튼 이런 거였어요.

토란은 싸르르한 소리의 느낌을 작은 가지랑 이파리를 율동적으로 서로 부벼 흉내 냈다. 별로 비슷하진 않지만 그래도 아주 다르지는 않은 어떤 느낌이 전해져 왔다. 토란은 자기가 그런 걸 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랐고, 엉겅퀴도 신기해했다.

다시 해 볼래?

아, 나도 잘 모르지만……. 아마 이렇게?

토란은 여러 가지로 움직여서 다른 소리도 내 보았다. 더러는 들을 만했지만 대부분은 이상했다.

근데, 이건 아닌 거 같아요. 음, 어떻게 해야 하지?

토란이 꼬물대는데 갑자기 엉겅퀴가 신호했다.

쉿, 아베가 온다.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토란과 엉겅퀴는 다른 꽃들이 그러하듯이 얌전히 아베가 고무나무 포대로 뿌려 대는 물세례를 받았다. 토란은 진득한 고무 냄새나는 물보다 이슬이나 몇 번 맛보지 못한 빗물이 좋았지만 비는 바라는 대로 와 주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좋대도 마음대로 먹을 수는 없었다. 엉겅퀴는 지금이 가물다고 말했고 규칙적으로 물을 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했다. 게다가 엉겅퀴와 토란이 있는 줄은 장미나 나리꽃이 있는 줄보다 물이 빨리 떨어졌다. 토란은 한동안 물이 모자라서 화분 밖으로 걸어 다닐 수도 없었다.

그때는 모두가 힘들고 어려운 시기였다. 토란은 엉겅퀴의 충고에 따라 물을 줄기 안에 모으는 법을 연습했다. 밖에 나갈 수가 없으니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토란은 심심한 동안에 ‘소리’ 연습을 했다. 다른 꽃들은 서로를 들여다보며 가물어 부스스한 꽃잎을 다듬었다. 엉겅퀴도 불안했는지 막 피어난 작은 꽃잎들이 타서 오그라드는 걸 막으려 애썼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토란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엉겅퀴는 우울한 저녁이면 토란이 들려주는 소리를 위안 삼았고, 토란도 제법 듣기 좋은 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먼지가 적은 저녁이면 밤새가 날아와 울타리 근처에서 노랫소리에 화답하기도 했다. 토란은 밤새의 고오고오 소리에 맞춰 사르륵사르륵 노래했다. 덕분에 밤놀이를 못해도 지루하지 않았다.


가문 시기가 지나자 여름비가 따갑게 꽃들을 때렸다. 소슬하게 시작한 빗방울은 금세 크고 날카로워져서 그간 말라 있던 꽃들은 이파리가 부서지는 게 아닌가 떨었다. 더러는 곱아 있던 꽃잎이 떨어지기도 했지만 비가 개이자 꽃들은 대리석 기둥처럼 견고해진 줄기에 반질반질한 질감까지 더해 한층 생생해졌다.

대기는 습기를 머금어 투명하고 촉촉했다. 토란은 처음 숨을 쉬는 것처럼 가지 마디가 벅찼다. 상쾌하고 깨끗한 공기가 줄기 안에 가득 차자 토란은 나비처럼 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밤에 나갈 거지?

엉겅퀴가 물었다. 토란은 잎자루를 끄덕였다. 밤에 나가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가끔 뿌리에 물기가 있는 장미 싹들이 밤에 토란을 방문해 주긴 했지만 토란은 물관이 말라서 대답할 기운도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드디어 모두와 어울려 실컷 숨바꼭질을 하고 화분 사이를 뛰어다닐 수 있을 것이다. 상상만으로 기분이 좋아져서 토란은 노래를 흥얼거렸다.

뭐냐, 토란?

토란은 가까이서 아베가 꿀을 따고 있단 걸 잊고 있었다.

지금 뭘 한 거냐?

토란은 겁이 나서 화분 속으로 줄기를 오그렸다. 하지만 당당하게 노래를 자랑하고 싶기도 했다. 지금까지 아베의 정원에서 노래하는 꽃은 없었다. 토란은 자신이 무척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노래요.

아베는 잠시 침묵했다. 토란의 체관이 긴장으로 두근거렸다.

노래? 노래라, 거 참.

아베는 무시무시하게 겹눈을 부라린 것치고는 조용하게 대꾸했다.

신기한 재주로구나.

토란은 날아갈 듯이 기뻤다.

다른 것도 할 수 있어요, 해 볼까요?

그러렴.

아베의 음성이 자상해서 토란은 안심하고 가장 즐겨하는 노래를 하나 불렀다. 부드러운 잎이 팔락이고, 두꺼운 잎이 서로 부딪고 날카로운 잎 모서리가 줄기를 긁어서 산뜻한 음률과 구성진 가락을 만들어 냈다.

괜찮구나. 그런데, 그걸 연습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니?

토란은 솔직하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네가 노래하는 걸 반대하진 않지만 별로 좋은 생각도 아닌 거 같구나. 토란.

아베가 말했다.

왜요?

남들과 다른 건 좋지 않아. 다른 꽃들을 보렴. 매혹적인 장미도 우아한 나리꽃도 노래 같은 건 하지 않는단다. 그 애들은 꽃잎을 가꾸고 더 향기로워지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모자랄 지경이지. 게다가 제일 중요한 나비들이 그걸 좋아할지 모르겠다. 곱고 향기롭고 꿀이 많은 건 확실히 좋아하지만. 그리고 넌 고작 노래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거 같구나. 넌 아직 이파리도 부스스하고 이렇다 할 꽃대 하나 올리지 못했잖니? 거기에 더 신경 쓰는 편이 좋겠다. 미래를 위해 주어진 시간은 짧단다.

아베의 말에 토란은 조그맣게 ‘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아베는 토란의 화분 턱을 토닥여 주고 가 버렸다.

한동안 토란은 불편한 침묵 속에 서 있었다. 노래는 부풀었던 마음과 함께 허공으로 사라졌다. 토란은 갑자기 너무 창피해져서 흙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괜찮아, 토란.

엉겅퀴가 흙 위를 토닥였다. 하지만 토란에겐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날 밤은 이상하게 고요했다. 포근하고 습윤한 공기가 대기에 가득 차고 달도 휘영청 늘어지게 밝은데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토란은 울타리를 따라 정원을 한 바퀴 돌았다. 그때까지도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토란과 함께 노래하던 밤새가 울타리에 날아와 앉았다.

뭘 하니? 오늘은 노래하지 않을 거니?

토란은 이파리를 흔들었다.

친구들을 찾고 있어요.

친구? 너랑 비슷한 걸어 다니는 작은 풀들 말하는 거니?

우린 풀이 아니라 꽃이에요.

나한텐 다 같은 거란다. 먹을 수 있는 열매가 아니라면 다 비슷해. 아무튼 네가 말하는 친구가 내가 본 작은 풀들이라면, 그건 큰 검은 투구벌레들이 죄다 뽑아 갔단다.

큰 검은 투구벌레?

몰라? 이 근처에 잔뜩 살잖아. 크고 딱딱하고 검은색이지.

크고 딱딱하고 검은색?

그래. 등껍질은 반짝반짝하고 다리가 바삭바삭하고 뱅뱅 소리를 내지.

토란은 밤새의 설명이 자세해질수록 뭐가 뭔지 알 수 없어져서 원래 알고 싶어 했던 것을 다시 물었다.

제 친구들을 누가 데려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응, 작은 걸어 다니는 풀…… 아니, 꽃들을 큰 검은 투구벌레들이 뽑아 갔다고. 그 애들이 좀 시끄럽게 뛰어다녔잖아. 큰 검은 투구벌레들은 꽃들이 뛰어다니는 걸 무척 싫어해.

토란은 뽑아 갔다 이후로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 거기에서 이미 줄기가 차가워졌다. 누군가 걸어 다니는 꽃들을 죄다 뽑아가 버렸다. 대체 누가? 검은 투구벌레라는 게 누구지?

투구벌레가 왜 우리가 걷는 걸 싫어하죠?

토란이 묻자 밤새가 대답했다.

그럼 꽃들을 자기들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까.

토란은 이상하게 체관이 쿵쿵 뛰었다.

꽃들을 가지고 뭘 마음대로 한다는 거예요?

토란은 가지를 갸웃했다. 아무도 꽃들을 갖고 뭔가를 하지는 않았다.

글쎄. 아무튼 너도 조심해. 너도 작고 걸어 다니니까.

네. 밤새님.

토란은 언짢았다. 뭔가 이상한 일이 정원에서 벌어졌는데 토란이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토란은 터벅터벅 가시 울타리를 따라 되돌아가다가 문득 멈춰 섰다.

싹들이 어디로 갔을까?

토란은 가시 울타리를 비집고 반대편의 어둠을 응시했다. 거기엔 안쪽보다 더 검고 농밀한 어둠뿐 아무도, 아무것도 없었다.

다들 잡혀서 어디로 간 걸까?

토란은 두려움에 떨면서 한 발짝 어둠 속으로 뿌리를 디뎠다. 적막이 두려움으로 바뀌기 전에 토란의 속에서 달콤하고 알싸한 진동이 울렸다. 매미 소리였다. 토란은 용기를 얻어 좀 더 나아갔다.

그날 토란은 아무도 찾아내지 못했지만 울타리 밖으로 가는 법을 찾았다.

정원 울타리는 틈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어지럽게 덩굴지고 가시까지 달려 꽃들은 절대 통과할 수 없었다. 토란은 울타리의 거칠고 빡빡한 밑동을 계속 문대서 부드럽게 한 다음 틈을 점점 벌렸다. 줄기가 생채기투성이가 됐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울타리 안쪽은 겉벽보 다는 성겼다. 토란은 넓게 드러난 구멍에 흙을 살짝 덮어 가린 다음 그 너머로 나갔다.


울타리 밖에서 처음 토란을 맞이한 건 차고 촉촉한 바람이었다. 아직 여름인데 울타리 하나 차이로 정원과 바깥은 공기의 밀도가 달랐다. 토란은 첫 몇 발짝은 막막한 어둠이 두려워서 울타리를 바싹 등지고 둘레를 훑었다. 그리고 주변이 익숙해지자 앞으로 나아갔다. 먼저 도랑이 보였다. 정원에 물이 넘치는 걸 막기 위해 판 도랑은 졸졸졸 물이 흐르는 실개울이 되어 있었다. 토란은 뿌리를 살짝 담가 물을 맛보았다. 도랑의 물은 포대나 빗물이나 이슬과도 맛이 달랐다. 길게 굽이치며 반짝이는 은 뱀의 비늘 한 조각처럼 차고 약간 비릿하고 흙내가 났다. 토란은 물을 조금 더 마신 다음 도랑 턱과 도랑의 깊이를 가늠했다. 폭이 좁아서 훌쩍 뛰어넘을 수 있어 보였지만 토란은 굳이 뿌리를 물에 담가 도랑 깊이를 확인했다. 다음에 다시 올 때는 수위가 달라져 있을 수도 있었다.

토란은 도랑의 느리고 탁한 물살을 조금 즐긴 다음 반대편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잠깐 뒤돌아보았다. 어둠 속에 뿌옇게 정원의 울타리가 떠올라 있었다. 안쪽에 잡벌레를 쫓는 냄새나는 야광 이끼를 키우기 때문에 정원은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토란은 뒤돌아서 어둠 속을 나가다가, 길섶에 우거진 풀들을 보고 멈춰 섰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저희들끼리 부대끼며 수런대는 풀들은 마르고 질겨 보였다. 말을 걸어 보고 싶었지만 풀들이 토란에게 아무 관심도 없어서 잠자코 그 옆을 스쳐갔다.

토란은 계속 걸었다. 뿌리가 마르기 전에 돌아가려면 거리에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의외의 것으로 해결되었다. 우묵해 보이는 곳이면 어디든 작은 빗물 웅덩이들이 있었고, 흙이 축축한 곳에 뿌리를 박으면 아주 적은 물기나마 얻을 수 있었다. 낯선 흙은 달콤하고 향기로웠다. 토란은 비틀린 이파리까지 부푸는 것 같았다.

밤은 모든 사물을 더욱 가까워 보이게 했다. 처음 목표로 삼았던 언덕은 꽤 멀어서 한밤중이 지났는데도 닿을 수 없어서 토란은 근처 나무 둥치에 앉아 잠시 쉬었다.

야생의 밤은 높은 나무 등걸에서 검게 웅크린 채 살아 있는 짐승처럼 고동치다 때론 토란 뒤에서 어슬렁대기도 했다. 토란은 갑자기 두려워졌다. 어린싹을 환영하던 모든 낯선 길들이 갑자기 매정해지며, 돌아가는 길은 너무 멀고 컴컴해 보였다. 두 번 다시는 정원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토란은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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