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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숲 3

수선화! 투쟁!

by 은림

3.


토란과 도토리가 도착한 곳은 바위투성이 폭포였다. 토란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거대한 물소리와 시원한 물맛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흙이 너무 적고 퍼석퍼석해서 꽃들이 살기엔 부적합해 보였다.

여기서 산다는 거야?

토란이 미심쩍게 물었다.

응. 물살이 거세고 먹이가 없어서 귀찮게 구는 벌레들이 별로 없거든. 이쪽이야.

도토리가 안내한 곳은 폭포에서 이는 물보라가 적당히 닿으면서 단단한 흙이 고인 돌출된 바위틈이었다. 토란이 도토리를 따라 좁은 입구로 들어가자, 안은 의외로 넓고 폭신폭신한 흙으로 채워져 쾌적했다. 위쪽도 깎아지른 돌투성이라 그늘 없이 볕이 잘 들었다.

여어, 내가 왔다.

도토리가 호기 있게 온 잎을 들썩이자 조용하던 바위틈 곳곳에서 꽃들이 튀어나왔다.

도토리다. 도토리가 돌아왔다.

주변에서 수런대는 소리가 토란에겐 ‘떠돌이가 돌아왔다’로 들렸다.

이번엔 꽤 오래 걸렸네? 뭘 갖고 있는 거야?

꽃대도 올리지 않은 작은 수선화가 도토리의 잎자루에 매달려 물었다.

도토리는 짊어진 묵직한 잎 주머니를 추슬렀다.

내 거 아냐. 토란 거야.

토란? 누구야?

작은 수선화의 물음에 토란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꾸무럭댔다. 그 틈에 도토리가 잎을 바삭였다.

토란은 노래하는 꽃이야. 아베의 정원에서 도망쳤어.

뭐? 그 끔찍한 곳에서?

꽃들은 저마다 놀라워하며 토란을 구경했다. 토란은 거북스럽게 이파리를 줄기 안으로 웅크렸다.

누가, 어디에서 왔다고?

안쪽에서 느린 걸음으로 창백한 흰 꽃이 나타났다.

토란?

그 꽃이 토란을 불렀다. 토란은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옛 기억을 더듬어 흰 꽃을 알아보았다.

미나리? 어떻게 네가 여기 있어?

둘은 반갑게 해후를 나누었다.

아베가 짐승한테 먹히라고 길가에 버린 걸 도토리가 구해 줘서 여기 있게 되었어. 토란, 너를 다시 보게 되다니, 너무 반가워.

토란은 어리둥절했다.

너를? 왜?

걸어 다니다가 걸렸거든.

토란은 줄기가 뻣뻣해졌다. 미나리는 껴안은 이파리를 풀었다.

혹시 정원에서 사라진 꽃들이 다 여기 있어?

토란이 묻자 미나리는 꽃대를 저었다.

나처럼 운 좋은 꽃은 별로 없었어.

토란은 잠시 침묵했다. 토란의 마음을 아는 듯 미나리가 이파리로 쓰다듬었다.

이젠 괜찮아. 여긴 안전해.

토란과 미나리가 더 긴 이야기를 나눌 틈도 없이 작은 수선화가 끼어들었다.

도토리는 아무나 막 데려와. 가제나 좁아터진 데.

도토리가 작은 수선화를 야단쳤다.

못된 소리나 하려거든 이제 밤에 얘기 들으러 오지 마.

작은 수선화는 금방 울상이 되어서 ‘잘못했어요.’라고 싹싹 빌었다. 도토리는 엄한 모양을 풀었다.

솜다리는 어디 있니? 만나야겠는데.

이쪽이야.

작은 수선화는 기다렸다는 듯이 앞장서 갔다.

오늘 밤에 얘기 들으러 가도 돼?

솜다리가 허락하면.

허락할 거야. 가도 되지? 응?

그래.

도토리는 위로 난 바위 길에서 작은 수선화를 돌려보냈다. 토란이 물었다.

솜다리가 누구야?

우두머리 꽃이야. 만나 보면 알아.

솜다리에게로 가는 길은 아찔한 절벽 위였다.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서 토란은 숨도 쉬기 힘들었지만 도토리는 익숙해 보였다. 가파른 절벽 길옆을 지나자 오목한 구석이 나왔다. 거기 솜다리가 있었다.

아래가 소란하다 했더니 이야기꾼께서 돌아오셨군.

솜다리는 이파리 끝까지 잔털로 뒤덮인 단단해 보이는 흰 꽃이었다. 도토리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다음 토란을 소개했다.

아베의 정원에서? 노래를 하는 꽃이라고.

솜다리는 토란이 하는 도토리를 만난 일과 엉겅퀴가 죽은 이야기, 도망쳐서 여기까지 오게 된 이야기를 경청하더니 솜털을 사박였다.

힘든 일을 겪었구나. 여기 온 꽃 중에 편했던 꽃은 거의 없지만 말이야. 한동안 여기 머무르는 것은 괜찮아. 하지만 정착할 건지는 신중해. 사실, 여긴 이제 거의 포화상태거든.

토란은 작은 수선화가 무례하게 군 까닭을 알았다.

그런데 그 짐은 뭐지?

솜다리가 토란이 지고 있는 잎 주머니를 가리켰다.

아, 이건 씨알이에요.

토란이 대답했다. 순간 솜다리의 눈이 반짝였다.

씨알? 여기서 키울 생각이야?

아직 잘 모르겠어요. 먹을 게 부족하다면 어려울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흐음, 그렇군.

솜다리는 뭔가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때 도토리가 끼어들었다.

저기, 방해해서 미안하지만, 더 말할 게 없다면 우린 그만 가서 쉬고 싶은데?

아, 그렇군. 비탈에서 오른쪽 둘째 단 이끼 바위 아래에 공간이 좀 있을 거야. 첫날이니까 공동 방보다는 혼자 쉬는 게 좋겠지.

고마워.

도토리는 토란을 데리고 다시 비탈길을 되짚어 내려갔다. 둘은 곧 솜다리가 말한 이끼바위 아래 거친 흙더미에 도착했다. 별로 좋은 쉼터는 아니었지만 도망 길에 지친 토란에겐 찰흙처럼 포근해 보였다.

토란.

여기까지 오는 내내 이상스럽게 조용하던 도토리가 잎을 부볐다.

신중하게 생각하는 게 좋아.

뭘 말이야?

도토리는 차분히 대꾸했다.

너는 도착한 게 아니라 시작에 서 있는 거야. 여기는 네가 상상하던 곳이 아니고 네게 맞지 않을 수도 있어. 우리가 반드시 옳지는 않아. 우린 거기서부터 시작해. 우리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것부터. 나는 그게 퍽 좋은 점이라고 생각했지만…….

도토리는 잎 끝을 되말았다. 토란은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지만 도토리는 그대로 잘 쉬라고 인사하고 가 버렸다.

난 바로 아래 바위에 공동 방에 있어. 잘 자.

홀로 남은 토란은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노을이 황금빛으로 바위 위에서 반짝였다. 생전 처음 보는 넓고 긴 하늘이었다. 토란은 짊어진 씨알들을 구석에 내려놓았다. 도토리는 이미 다른 쪽에 나머지 씨알을 두고 갔다. 토란은 망설이다가 씨알들이 썩거나 성급히 깨어나지 않도록 마르고 바람이 잘 부는 통로에 놓았다. 토란에겐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토란, 그쪽으로 가도 돼?

씨알들을 대강 정리했을 무렵 가늘고 상냥한 바삭임이 들렸다. 곧이어 창백한 흰 꽃이 바위틈에서 뾰족 튀어나왔다.

미나리? 그래.

미나리는 하늘하늘하고 위태위태하게 걸어왔다. 토란은 척 보기에 미나리가 별로 건강치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도토리한테 도움 받을 때 이미 심하게 다친 채였어. 살아 있는 게 용한 거야.

미나리가 잎을 사각였다. 토란은 꽃대를 끄덕이고 촉촉한 흙자리를 미나리에게 양보했다. 미나리는 사양치 않고 고마워하면서 앉았다.

여긴…… 어떤 곳이니? 흙도 퍼석하고 먹을 것도 없어 뵈는데. 다들 어떻게 견뎌? 물은 솜다리가 주니?

미나리는 나직이 웃었다.

여긴 정원이 아니야, 토란. 우린 스스로 먹을 걸 찾아. 물은 폭포 근처에 가면 마음껏 마실 수 있어. 미끄러지거나 물살에 휩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지만. 먹을 건 바위를 벗어나서 좀 위로 올라가면 붉은 흙이 있고, 아래로 내려가면 검은흙이 있어. 하지만 거기 갈 땐 벌레가 어디 있는지 잘 살피면서 가야 해. 가끔 벌레들이 기승을 부려서 바위 밖으로 나갈 수 없으면 저장식을 먹어.

저장식?

미나리는 대답을 주저했다.

벌레야. 썩은 벌레.

뭐?

토란은 경악했다.

어떻게 그런 걸 먹어?

미나리는 부끄러운 듯 이파리를 모았다.

먹을 수 있어. 영양가가 무척 높아. 그걸 먹지 않았다면 나도 지금까지 살지 못했을 거야.

토란은 그제야 도토리가 어떻게 그렇게 질기고 강할 수 있었는지 깨달았다. 도토리가 말했던 정원에서 자란 꽃이 몰라도 되는 다른 음식은 썩은 벌레였다.

난 먹지 않을 거야.

물론 안 먹어도 돼. 난 먹을 수도 있다고 말해 준 것뿐이야. 어차피 우리가 먹는 거름은 다 그런 것들이 썩어서 된 것인 걸.

토란은 진저리를 쳤다.

그래도 난 안 먹어.

미나리는 토란의 감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여기서 네게 이러쿵저러쿵 시키거나 강요하는 꽃은 하나도 없을 거야. 그러니 여기서 살려면 몇 가지 알아 둬. 아무도 네게 물을 가져다주지 않을 거야. 흙도 퍼석해서 영양가도 별로 없고. 다행히 우린 걷는 꽃이니까 얼마든지 먹을 걸 구하러 다닐 수 있어. 다만 벌레들은 조심하는 게 좋아. 이미 알고 있겠지만. 그들은 우리보다 힘도 세고 날 수 있으니까 재수 없으면 끌려가서 폭행당하거나 알이 까여 만신창이가 된 채 버려지게 돼.

토란은 이미 직접 그걸 보았다.

알아.

다행이네. 많이 걱정 안 해도 되겠다. 그럼 잘 자. 언제든 내가 도와줄 게 있다면 말하고. 별로 큰 도움은 못 되겠지만 말이야.

토란은 새삼 미나리가 고마워졌다.

응. 고마워.

별말을. 옛 친구를 만나게 되서 기뻐.

나도 너를 만나서 무척 기뻐, 미나리.

미나리는 공동 방으로 내려갔다.

그새 해가 저물어 있었다. 토란은 어둠 속에서 딱히 형태가 잡히지 않는 생각들 사이를 헤매다가 어느새 잠들었다.


토란을 데려다준 도토리는 그 길로 솜다리에게 갔다.

어서 와. 다시 올 줄 알았어. 너한테 부탁할 게 있어.

뭔데?

도토리는 솜다리가 무슨 얘길 할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토란이 여기에 정착하도록 설득해 줘. 한동안 어디 가지 말고 좀 도와주라고.

내가 왜 그런 귀찮은 일을 해야 하지? 게다가, 여긴 이미 포화상태라고 네가 말했잖아?

솜다리는 웃었다.

왜냐면, 넌 네가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귀찮은 일을 좋아하니까. 아니라면 네가 지금 여기 있을 리가 없지. 그 꽃에겐 살 곳이 필요해. 물론 여긴 포화상태긴 하지만…….

솜다리는 잠깐 생각하고 솜털로 뒤덮인 잎을 부볐다.

우리에겐 그 꽃이 가진 씨알이 필요해. 알다시피 여긴 조건이 열악해서 씨알을 잉태하는 꽃이 없어.

잘됐잖아. 어차피 여긴 너무 좁다고. 왜 갑자기 씨알이 필요해진 거야? 누굴 이용하려 들다니 그건 너답지 않아. 난 찬성할 수 없어.

솜다리는 빙긋 웃었다.

너도 곧 생각이 달라질걸, 도토리. 내 멋진 계획을 다 듣고 나면 말이지.


다음 날 일찍 토란은 도토리를 따라 먹을 걸 구하러 갔다. 미나리와 작은 수선화가 따라오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일행이 두 배로 늘었다.

이렇게 한꺼번에 가면 다들 별로 못 먹을 텐데.

도토리가 걱정했다.

괜찮아요. 요새 괜찮은 땅을 찾아냈거든요. 좀 멀지만. 그리고 숫자가 많으면 벌레가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거예요.

미나리의 공손한 태도에는 도토리에 대한 존경심이 가득했다..

오히려 더 눈길을 끌 거 같은데.

작은 수선화가 잎을 바삭였다. 미나리는 작은 수선화를 무시하고 앞장섰다.

아침나절을 걸어서 꽃들은 흙이 검붉은 땅에 도착했다. 위로 큰 나무들이 쭉쭉 뻗어 있어서 그늘 때문에 아래에 자라는 풀이 없었다.

이거 꽤 아늑하고 한가한데.

도토리의 환호를 칭찬으로 들으며 미나리는 조심스레 흙 속으로 뿌리를 뻗었다.

토란은 오랜만에 뿌리를 감싸는 풍족하고 안락한 느낌에 황홀해졌다. 땅은 낯설지만 신선했다.

적당히 먹고 볕으로 나가야 해. 여긴 먹을 건 있지만 볕이 없어서 흡수시킬 수가 없을 거야.

도토리가 충고했다. 꽃들은 흙 속의 양분을 빨아들이다가 몇 걸음 나가 볕을 쪼이고 다시 흙에 묻히기를 반복했다. 토란은 걸을 수 있기 때문에 여기 흙도 먹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걸을 수 없다면 아무리 먹을 게 있어도 볕을 쪼일 수 없으니 꽃은 살 수가 없었다.

일행은 해질녘에 바위의 보금자리로 돌아왔다. 토란의 줄기는 더 탄탄해졌고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하늘대던 이파리 몇 개도 단단히 달라붙었다. 온 줄기가 상쾌했다.

내일부터는 혼자 다녀 볼게.

토란이 잎을 부비자 도토리가 반문했다.

괜찮겠어?

응. 혼자서 할 수 있을 거 같아. 그 편이 낫겠어.

토란은 이제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두려워해 봤자 더 두려워지기만 할 뿐이고, 이도 저도 못하고 벌벌 떠느니 보다 행동하는 편이 더 쉬웠다. 토란은 왜 더 빨리 아베의 정원에서 벗어나는 걸 생각 못 했는지 안타까울 뿐이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벌레들을 조심하고. 동쪽 늪 가까이는 가지 마.

미나리가 충고했다. 토란은 그러겠다고 했다.

토란은 그해 늦여름을 바위 보금자리에서 지냈다. 거기 있는 동안 토란은 뭐든지 혼자 해냈다. 혼자 신선한 물을 찾아 마시고, 흙에서 먹이를 찾고, 바람이 좋은 날이면 바위에 걸터앉아 노래를 했다. 토란의 서늘한 노랫소리는 바위 보금자리를 맴돌아 멀리멀리 퍼져나가다 폭포에 녹아 사라졌다. 노래하는 꽃을 처음 본 다른 꽃들은 낯설어했지만 금방 좋아하게 되었다. 건방진 작은 수선화조차 토란의 노래에 흠뻑 반해서 저녁마다 조르러 왔다. 평화로운 날들이었다. 토란은 지극히 만족했다. 매일매일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위해서 해야 할 바를 한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었다. 항상 뭐든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게 때로는 힘들고,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서 굶주리는 날들도 있었지만, 그럴수록 토란의 긍지는 날카롭고 의지는 강해졌다. 토란은 처음으로 성장했다고 느꼈다.


첫 가을비가 왔다. 습윤한 구름이 걷히자 토란은 공기가 달라졌다는 걸 눈치챘다. 봄이 되돌아온 것처럼 서늘하고 촉촉했다. 하지만 풀잎을 스치는 바람은 다가올 환희를 기대하는 설렘에 떠는 게 아니라 미진한 불안과 미혹에 흔들리는 것 같았다. 토란은 평상시처럼 먹고 마시고 때때로 씨알을 들여다보고 노래하기를 계속하면서도 뭔가를 기다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먹이도 전처럼 그날 필요만큼만 취하고 다음 날을 위해 남겨 두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닿는 한 취해 곳곳에 비축했다. 토란도 자기가 왜 그렇게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순간들이 있었지만 적어도 하고 나면 초조감은 좀 잦아들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토란은 더 멀리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상해, 이상하다고.

밤늦게 돌아온 토란 앞에 작은 수선화가 불쑥 튀어나왔다. 작은 수선화는 어느새 제법 키가 자라서 토란과 줄기마디를 견줄 정도가 되었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날이 점점 차지는데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는 거야? 밖에서 얼어 죽을 셈이야?

내가 왜?

토란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토란은 도토리만큼 아량이 없어서 작은 수선화의 말투가 거슬리는 걸 참기 싫었다.

그럼 매일 어딜 가는지 말해 줘.

아무 데도 안가.

작은 수선화는 못마땅하다는 듯 잔가시를 부볐다.

수상해. 날이 차져서 다들 자리보전하기도 바쁜데 매일 싸돌아다니면서 어디 가는 지도 말할 수 없다니. 아주 수상해.

토란은 그때까지도 작은 수선화의 사각임에서 풍겨 나는 은밀하고 불쾌한 냄새를 몰랐다.

뭐가 그렇게 수상하다는 거야?

토란, 넌 의심받고 있어.

의심?

그제야 토란은 바위 보금자리에 고인 불온한 어둠을 느꼈다. 그건 흔들리는 바람처럼 근거도 없고 봄 날씨처럼 변덕스러웠다.

소문이 돌아다녀. 벌레처럼 스멀스멀. 머지않아 벌레랑 꽃이랑 전쟁을 한대. 그래서 지금은 서로에게 배반자를 심어 놓고 첩자로 쓴다는 거야.

말도 안 돼.

토란은 딱 소리 나게 이파리를 꺾었다.

진짜야. 그걸 대비해서 솜다리는 벌레 여럿을 생포해 놓았고, 심지어 늪의 실험실에선 벌레를 잡아먹는 병정 꽃들이 자라고 있댔어.

누가 그런 엉터리 소리를 해?

토란이 반문했다.

너만 모르고 다 알아, 토란. 소나무 숲에 사는 꽃들까지 다 안다고!

작은 수선화가 줄기를 파르르 떨었다.

없는 말 지껄이지 마.

토란도 거세게 줄기를 흔들었다. 둘 사이에 흰 꽃이 끼어들었다.

작은 수선화는 소나무 숲까지 가 보지도 못했잖니. 네가 직접 듣지 못한 걸 사실인양 떠들고 다니는 건 나쁜 버릇이란다.

미나리를 보고 토란은 안도했다.

칫. 잘난 척은.

작은 수선화는 투덜댔지만 미나리가 엄한 모양을 하자 마지못해 비켜났다. 둘만 남게 되자 토란이 물었다.

전쟁이라니. 무슨 소리야? 뭔가 알아?

미나리는 얄팍한 줄기를 으쓱했다.

늘 떠돌던 소문인걸, 계절마다. 작은 수선화는 처음이라 조금 흥분한 걸 거야. 신경 쓰지 마.

토란은 잎을 끄덕였다. 하지만 작은 수선화의 태도가 영 찜찜했다.


바위의 꽃들이 겨울나기를 준비했다. 한 해를 지내본 꽃들은 첫겨울을 맞은 꽃들에게 여러 가지로 충고해 주었다. 토란도 얼어 죽지 않게 솜털을 입는 방법이랑 잉여양분을 줄기 안에 저장하는 법을 배웠다.

미나리는 공기가 차지자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토란은 아늑한 자기 바위틈을 미나리에게 양보하고 도와줄 게 있는지 물었다. 미나리는 오래 망설이다가 낮은 소리로 잎을 바삭였다.

벌레가 필요해.

토란은 잠시 잎 흔들기를 멈췄다.

어떻게 벌레를 구하지?

고민 끝에 토란이 잎을 펼치자 미나리가 대답했다.

동쪽에 가 봐.

거긴 가지 말랬잖아.

그래, 거기엔 솜다리의 실험실이 있거든.

실험실?

가 보면 알아. 거기에 아마 썩은 벌레가 있을 거야. 도토리가 전에 거기서 가져왔다고 말해 줬거든.

미나리의 설명이 끝나자 토란은 즉시 떠났다. 걸음이 결코 가볍지 않았지만 미나리를 생각하면 한시가 급했다.

동쪽 늪지대는 바위 보금자리보다 훨씬 따뜻해서 나무엔 아직 푸른 잎들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미적지근하고 텁텁하게 달라붙는 공기는 불쾌했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머리를 풀어헤쳐 무시무시한 왕버들과 인동덩굴이 뱀처럼 켜켜이 꼬여 있고, 흙은 기름지다 못해 질척댔으며, 시커먼 물풀들이 도사린 사이로 썩은 부유물이 떠다니는 얕은 흙탕물이 넓게 고여 있었다. 토란은 어둡고 습한 길을 지날수록 점점 더 기분이 나빠졌다.

가끔 위에서 새들이 시끄럽게 까옥대며 날아다녔다. 그중 하나가 걷는 토란을 벌레로 착각하고 움켜쥐고 날아올랐다가 꽃인걸 알고 허공에서 팽개쳤다. 토란은 진흙탕에 어이없이 나동그라져 있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왔던 길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토란은 여기저기 헤매다가 버드나무뿌리 근처에서 보이지 않는 구덩이로 미끄러져 떨어졌다.

한동안 컴컴한 구덩이 바닥에서 토란은 간신히 숨만 쉬고 있었다. 미끄러지다가 작은 가지 하나가 부러져 나갔고 여기저기 긁혔지만 대체로 무사했다. 토란은 위를 보고 그곳이 꽤 넓은 공동임을 알았다. 토란이 떨어진 곳은 공동에 빛과 바람이 통하게 마른 낙엽과 이끼로 천장을 덮은 틈새였다.

토란은 어둠이 조금 익숙해지자 출구를 찾기 위해 앞을 더듬어 나갔다. 천장은 하나로 이어져 있지만 떠받치고 있는 흙벽들이 공간을 구분 짓고 있어서 미로나 다름없었다. 토란은 가능한 한 넓고 밝은 쪽으로 나아가려 노력했지만 모퉁이마다 방향이 달라져서 옳은 길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때, 저편에서 ‘소리’가 들렸다.

소름 끼치게 사각이는, 토란이 오랫동안 잊고 있던 벌레 소리였다. 토란을 반사적으로 뒷걸음쳤다. 그때 한쪽 벽에 쌓여 있던 이파리 더미가 토란의 뿌리에 걸려 흩어지며 그 안에 있던 애벌레들이 꽃대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토란은 기겁했다.

이봐요, 함부로 뛰지 말아요, 그럼 애벌레가 밟혀서…….

갑자기 옆에서 튀어나온 커다란 갈색 애벌레의 톱니 발이 토란을 붙잡았다. 토란은 꺼칠한 발을 확 뿌리치고 정신없이 도망쳤다. 천장에 늘어진 잔뿌리들이 줄기를 할퀴었지만 하나도 느끼지 못했다. 그때 갑작스럽게 벽이 사라지고 토란은 넓은 장소에 서 있었다.

주변엔 뿌리 디딜 틈도 없이 벌레들이 우글우글 대고 있다. 토란은 얼어붙은 꽃줄기를 움켜쥐었다.

이건 꿈이야. 난 꿈을 꾸는 거야.

토란?

멀리서 도토리의 바삭임이 들렸다. 토란은 그 소리에 어서 깨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꽃대를 저어도 악몽은 떨쳐지지 않았다.

살려 줘, 도토리!

토란은 온 잎을 흔들었다. 저 너머에 있던 도토리가 벌레 떼를 헤치고 토란에게 다가왔다.

호들갑 떨지 마. 벌레들이 놀라겠어.

토란은 어안이 벙벙했다.

무슨 말이야, 놀란 건 나야. 빨리 여길 빠져나가자.

토란이 미친 듯이 도토리를 잡아끌었다.

정신 차려, 토란. 이건 기르는 벌레들이야. 아무 짓도 안 해.

토란은 도토리에게 한 대 얻어맞고야 정신이 좀 들었다.

기르는 벌레들?

그래. 솜다리가 키운 거야.

도토리가 잎 마디를 으쓱하며 뒤를 보이자, 얌전한 얼굴의 솜다리가 나타났다.

쓸모가 무척 많거든.

벌레를 써요? 어디다가? 잡아먹는 건가요?

토란은 여기 온 목적을 떠올렸다. 미나리에겐 벌레가 필요했다.

아니. 벌레는 중요한 노동력이야. 흙을 파내거나 나르는 일은 사실 꽃들이 하기엔 힘에 부치지만, 벌레들에겐 아무것도 아니거든. 가끔 죽은 걸 퇴비로 만들긴 하지만 일부러 죽여서 먹지는 않아. 길들인 벌레는 너무 소중하거든.

솜다리는 가지를 저었다. 토란은 오싹 소름이 끼쳤다. 너흰 다 소중하지, 너희는 꽃이니까. 아베도 그렇게 말했다.

솜다리는 토란을 벌레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위쪽으로 데려갔다. 거기서는 벌레 농장 전체가 보였다. 가시나무에 옻 진을 바른 울타리 안에 우화 하기 전의 종령 애벌레들이 득시글대는 게 보였다. 날개가 난 성충은 날개가 묶인 채로, 풀 그물로 엮은 비행 방지 장치가 있는 다른 울에 넣어져 있었다. 토란은 경이와 오한으로 줄기를 떨었다.

어떻게 우리보다 힘센 걸 기를 수 있죠?

솜다리는 빙긋 웃었다.

세상이 힘으로만 된다면 오히려 불공평하지. 태어났을 때부터 길들이면 돼, 벌레들이라고 다 처음부터 그렇게 위험하거나 나쁜 건 아니거든.

갓 태어난 벌레를 어떻게 구해요?

네가 한 거랑 똑같아. 몰래 지켜보다가 훔치는 거지.

도토리가 심술궂게 사각였다.

난 안 훔쳤어!

알아. 예가 그렇다는 거야.

토란은 혼란스러웠다.

이건 아베가 우리에게 한 거랑 같잖아요. 똑같이 나쁜 짓이야.

도토리는 가지 마디를 으쓱했다.

그럼 여기라고 별다를 게 있는 줄 알았어? 산다는 건 원래 다 그래. 어디나 불공평하지.

난, 난 여기가 낙원이라고 생각했는데…….

낙원은 아무 데도 없어, 토란. 있다면 네 착각 속이지.

둘은 침묵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토란은 간신히 여기까지 온 이유를 생각해 냈다.

미나리에게 벌레가 필요해요.

이런 상황에서 하기엔 곤란한 말이었지만 해야 했다. 솜다리는 꽃대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 상태론 겨울을 나기 벅찰 테지.

토란은 슬퍼졌다. 솜다리는 토란이 안심하도록 부드럽게 잎을 부볐다.

걱정 마. 벌레는 귀하지만 목숨보다 귀하진 않으니까. 나중에 도토리 편에 보내도록 하지. 미나리가 건강해질 때까지 충분히 먹을 수 있게.

솜다리가 쳐다보자 도토리는 삐뚜름이 줄기를 꼬았다. 도토리가 대답이 없자 솜다리는 가지를 으쓱했다.

고마워요.

토란은 진심으로 감사했다.

공짜는 아니야. 대신 부탁이 있어.

솜다리의 사각임에 토란은 약간 놀랐다.

제가 도울 일이 있나요?

솜다리는 꽃대를 끄덕였다.

때가 되면 알려 주지. 이쪽 길로 해서 죽 가다가 애벌레 방에서 갈림길이 나오면 오른쪽 통로 위로 올라가. 그럼 금방 바위로 돌아갈 수 있어.

토란은 길을 보고 망설였다. 갈색 벌레가 튀어나왔던 바로 그 길이었다.

저, 솜다리. 벌레들은 다 울타리 안에 있는 거죠?

물론이지.

솜다리가 단호해서 토란은 더욱 곤란해졌다.

저쪽에 따로 움직이는 큰 갈색 애벌레가 있었어요.

토란이 솜다리가 가라고 한 방향을 가리키자 솜다리가 잎을 튕겼다.

아아, 주름벌레 말이구나. 그놈은 괜찮아. 영원한 애벌레거든.

영원한 애벌레?

절대로 성충이 되지 않는 벌레지. 처음 나무뿌리 근처에서 발견했을 때 모습 그대로 늙고만 있거든. 굴 파기의 명수야. 힘은 세지만 유순하지. 이 굴도 원래 주름벌레 거였어.

솜다리와 도토리는 토란이 벌레 농장을 가로지를 때까지 바래다주고 되돌아갔다.

토란은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홀로 굴속을 걸었다. 처음 작은 애벌레들을 발견한 장소에 다다르자 주름벌레가 보였다. 토란은 바싹 긴장했다. 주름벌레는 토란을 보고도 꼼짝하지 않았다. 토란은 가만히 그 옆을 지나가려다가 주름벌레 발치에 있는 것을 보고 멈춰 섰다. 밟혀 죽은 작고 하얀 애벌레 두 마리가 거기 있었다.

왜 그래요?

애벌레들이 죽었어요.

주름벌레는 슬픔에 잠겨 있었다. 토란은 아까 정신없던 통이 떠올랐다.

그 애벌레들 설마 내가 아까…….

주름벌레는 흙손처럼 생긴 앞발을 내저었다.

죽었지만, 당신 탓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냥 가세요. 꽃.

토란은 주름벌레 앞에 쭈그려 앉았다.

미안해요. 죽이거나…….

토란은 숨을 삼켰다.

다치게 하려는 건 아니었어요. 그냥 난, 너무 무섭고 놀라서…….

알아요. 아무도 잘못하지 않았어요. 그냥 운이 나빴을 뿐이에요. 길을 잃은 거라면 오른쪽으로 가면 돼요.

주름벌레의 말이 끝나고도 토란은 한참 그 앞을 떠날 수 없었다.

어쩔 거예요?

토란은 차마 죽은 애벌레 쪽을 볼 수 없었다. 주름벌레는 죽은 한 마리를 주워 들었다.

묻어야죠. 뭐든 가야 할 자리는 있는 거니까요.

도울게요.

토란은 망설이던 생각이 의외로 쉽게 나가서 놀랐지만 만족했다. 주름벌레는 소리 없이 앞장섰다. 토란은 순순히 다른 애벌레를 안고 그 뒤를 따랐다. 무섭고 징그러웠지만, 자기가 저지른 일만큼 끔찍하지는 않았다.

주름벌레는 얕은 두엄터에 죽은 애벌레들을 묻었다. 둘은 한참 그 앞에 서 있었다.

이름이 뭐예요, 꽃?

주름벌레가 불쑥 물었다.

토란이에요.

토란은 얼떨결에 대답해 놓고 이상했다. 처음 보는 벌레와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하게 되다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 조금도 이상하지 않아서 오히려 이상한, 그런 복잡한 기분이었다.

난 굼벵이예요.

에? 주름벌레라던데요?

솜다리는 원래 마음대로 이름 붙이는 걸 좋아해요. 난 굼벵이예요.

주름벌레가 하도 강경해서 토란은 꽃대를 끄덕끄덕했다. 그러나 주름벌레는 계속 그냥 주름벌레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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