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괴한 정원
2.
아침의 따뜻한 볕과 신선한 물방울이 끄덕끄덕 졸고 있는 토란 위로 쏟아졌다. 토란은 날카로운 물방울에 줄기 마디를 떨었다. 아베였다.
토란, 넌 늦잠꾸러기구나.
미인은 잠꾸러기라면서요.
토란은 투덜댔다. 어젯밤에는 먼 언덕 꼭대기 나무까지 갔다 오느라 무척 피곤했다. 도중에 쓰러지지 않은 건 토란의 뿌리가 제법 굵어진 덕분이었다.
아베는 ‘핫.’ 하고 웃었다. 공기가 날카롭게 한데 모아졌다가 엷게 흩어졌다.
미인? 토란 네가?
주변에서 술렁임이 들렸다. 뒷줄의 함박꽃들이 웃고 있었다.
거참 더덕이 춤을 출 노릇이구나.
이제부터 미인이 되려고 많이 자는 거예요.
토란은 잎맥을 실룩였다.
제발 그래 주려무나. 그렇게 푸석한 꽃대를 어디 창피해서 내놓겠니?
내놓지 않아도 돼요.
이런, 그럼 안 되지. 네가 여기서 그렇게 보기 흉한 채로 자라다가 아무도 데려가지 않고 시들어 버리면 난 너무 마음 아플 거다.
토란은 죄책감을 느꼈다. 아베는 좋은 관리자였다. 맘 상하게 하고 싶진 않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전 제 마음이 내킬 때 제 뿌리로 어디로든 갈 거예요.
순간 아베의 겹눈에서 웃는 모양이 사라졌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별로 좋은 방법처럼 들리진 않는구나. 꽃들의 뿌리는 아름답지만 연약해. 멀리 갈 수 없단다. 넌 이 줄 끝까지도 갈 수 없을걸? 게다가 저 울타리 너머엔 무서운 짐승들만 가득하지. 그것들이 너희처럼 약하고 맛있는 먹이를 가만히 둘 것 같으냐? 토란, 네가 맘대로 냥냥냥 지껄일 수 있는 것도 지금 여기서 뿐이야. 밖에서는 아무도 네 말을 듣지 않고 네가 틈만 보이면 널 잡아먹을 거다. 너희 꽃들에겐 이 정원이 가장 안전해.
아베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토란은 꺼림칙했다. 달콤하고 달콤하고 달콤한 꽃분 냄새 속에 있다 보면 뭔가 중요한 걸 잊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도저히 그게 뭔지, 애초에 잊어버릴 게 있기나 했는지 계속 생각하다 보면 알 수 없어져서 토란은 밤새 뒤척이곤 했다. 그런 밤엔 울타리 너머로 아주 멀리까지 걸아야만 했다.
아무튼 토란.
아베가 말을 골랐다.
네 뜻은 충분히 알아들었으니까 이제 내 뜻도 좀 들어줘야지 옳지 않겠니? 장미나 함박꽃처럼 예뻐지라고는 안 하겠다. 제발 네가 무슨 꽃인지는 알아보게 해 다오. 넌 꽃이고 활짝 핀 아름답고 근사한 인생길이 네 앞에 펼쳐져 있어. 네가 조금만 노력한다면 모든 게 다 네 것인데, 그냥 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노릇이잖니.
토란은 쉬지 않고 이어지는 아베의 잔소리에 한숨을 쉬었다. 아베가 말하는 아름답고 근사한 인생길을 토란은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말하면 아베가 이해할까?
그래그래, 아베 말이 맞아. 너무 속상한 일이잖니, 그렇게 아름다운 나비들을 만날 수 없다니.
옆에서 다른 꽃들도 동조했다. 토란은 진지하게 대꾸하기를 멈췄다. 아침을 먹고 잔소리도 들었으니 이제 졸아도 될 것이다. 어젯밤에 토란은 너무 멀리 나갔고, 너무 많은 일들을 겪었기 때문에 피곤했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엉겅퀴는 요새 잠이 많아져 새벽에 깨는 일이 드물어 이야기할 틈이 없었다.
어젯밤 토란은 걸어 다니는 꽃을 만났다.
토란은 울타리 밖에서 자기 외에 걷는 꽃은 처음 보았다. 그 꽃은 언덕 꼭대기에 서 있는 물푸레나무 근처에 쓰러져 있었다. 흙 밖에 나온 뿌리가 유난히 커 보이지 않았다면 토란은 그냥 바람에 쓸린 들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얼마나 바싹 말라 있었는지 뿌리 끝을 달싹이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머잖은 곳에 샘이 있었지만 끌고 가기엔 힘이 벅차서 토란은 포기하고 잎맥을 오그려 물을 담뿍 담은 다음 뿌려 주기를 반복했다. 살아날까 싶었지만 꽃은 연약한 외관과 달리 질겨서 충분히 물을 먹자 쪼그라들었던 이파리를 활짝 폈다.
살았다, 고마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 토란을 놀라게 한 꽃은 떨어진 이파리가 없는지 꼼꼼히 확인하고 말했다.
꼼짝없이 말라죽는 줄 알았어. 난 도토리야.
난 토란이야. 언제부터 그렇게 된 거야?
몰라, 새벽 즈음일까. 어젠지 오늘인지는 기억 안 나.
그렇다면 꼬박 하루도 넘게 말라 있었단 거다. 그대로 죽지 않은 게 신기한 일이고 이렇게 쉽게 깨어난 건 더 이상한 일이었다. 토란은 겁이 났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넌 꽃이 아닌 거니?
도토리는 줄기 맨 끝의 가장 여린 잎사귀를 부벼 웃는 듯한 가르랑 소리를 냈다.
나도 꽃이야. 하지만 너랑 다르지. 난 물만 먹진 않아. 그래서 좀 더 오래 버텨.
뭘 먹는데?
도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 저쪽 정원에서 왔지? 아베의.
토란은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알았어?
흐응, 다 아는 수가 있어. 딱 그렇게 생겼거든. 척 보기에 곱잖아?
토란은 두근거렸다. 곱다니, 정원에선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말이었다.
내가 예쁘게 생겼어?
도토리는 줄기가 끊어질 만큼 박장대소했다.
그런 거짓말은 안 해. 멋모르게 생겼다는 거야.
토란은 기분이 상해서 그만 떠나려 했다.
이봐, 아직 가지 마. 나 아직 잘 못 움직인다고. 네가 좀 도와줘야 해.
도토리는 진짜로 곤란한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부리던 허세와 건방이 쏙 들어가고 잎 색이 창백해졌다. 토란은 하는 수 없이 돌아왔다.
일어날 수 있으면 된 거 아냐?
아니지. 나는 꽃인걸. 아무나 함부로 훔쳐가지 못하게 지켜 줘야지.
토란은 도토리의 말에서 조소를 느꼈다.
나도 꽃이야.
알아. 그러니까 우린 따로 있는 거보다 같이 있는 편이 낫다는 거야.
그리고 또 침묵. 토란은 바람결에 나무가 살랑대는 소리를 들었다. 도토리가 잎을 부벼 희미하게 그 소리에 답했다. 토란은 다른 꽃도 노래를 한다는 것에 충격받았다. 쭉 노래는 자기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 토란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분노와 시기심을 간신히 누그리며 말했다.
그건 어떤 노래야?
노래? 아냐, 난 나무랑 말한 거야. 약간 복잡하지만 꽤 유용하지. 네가 어디서 왔는지도 나무가 알려 준걸.
토란의 궁금증 몇 개가 풀렸다.
도토리는 토란의 도움을 받아 습윤한 나무뿌리 근처에 줄기를 기댔다.
네가 그 노래하는 꽃이구나. 소문으로 들었지.
소문? 너 말고도 또 누가 있어?
토란은 다른 곳에도 꽃이 있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당연하지. 대부분은 화원에 살지만 나처럼 야생에서 사는 꽃도 있어. 아무튼 넌 어떻게 거길 나올 생각을 했어? 아베의 정원은 화원 중에서도 지독하기로 소문났던데. 거기 꽃들은 이미 걷는 법 따윈 다 잊었다며?
토란은 칭찬인지 욕인지 헛갈려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도 걷는 꽃은 나밖에 못 봤어. 하지만 옛날엔 많았어. 그런데 왜 우리 정원이 악명이 높다는 거야?
쪼그만 그릇에 하나씩 묶어 놓고 꼼짝달싹 못하게 한다며? 뭐, 덕분에 물론 유충들에겐 인기 최고라지만.
토란은 그릇이 아니고 아름다운 화분이며, 각자의 독립성을 존중하기 위한 거라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유충이 뭐냐고 물었다.
맙소사! 아베가 아무리 악독하대도 그런 얘기를 안 해 준단 말이니? 유충 몰라? 벌레 말이야.
몰라. 그리고 아베는 나쁘지 않아. 좀 고집쟁이긴 해도. 우리를 돌보고 먹여 살리잖아. 아무 대가도 없이. 난 무척 고맙다고 생각해.
토란의 말은 진심이었다. 아베는 간섭이 심하지만 나쁘게 한 적은 없었다.
흥, 그게 다 속임수야. 넌 아베 없으면 굶어 죽니? 그 안이 그렇게 안전하고 편했어? 진짜?
물론 아베의 정원이라고 완벽하게 안전할 수는 없다. 가끔 큰 짐승들이 뛰어들어 꽃을 꺾거나 짓밟기도 하고 가뭄이 들면 말라죽기도 했다. 그건 아베도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물론이야. 완벽하진 않지만 충분한 곳이야.
흥. 제대로 길들여졌구나.
도토리는 잎 방귀를 뀌었다.
그래, 고무 포대에서 나오는 미적지근하고 오래된 물이 참 좋았겠구나. 너한테 샘물은 너무 냄새가 났겠다? 그 고상한 입맛에는. 빗물은 또 어떻게 먹었니? 안 먹을 수도 없고 말야.
그렇게 비꼴 거 없잖아. 나도 샘물이 맛있다는 건 알아.
토란은 심기가 불편했다. 아베는 완벽하진 않지만 충분히 고마운 존재고, 토란은 배은망덕하고 싶지 않았다.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어.
토란의 말에 도토리는 측은하게 줄기 마디를 휘었다.
넌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저 어둠 구석구석엔 신선한 샘과 얕은 동굴들이 숨겨져 있지. 너도 알 텐데? 찾아내는 건 힘들지만 정말 근사한 일이야. 아베가 가장 나쁜 점이 뭔지 알아? 보호라는 명목 아래 너희가 알 기회조차 빼앗았다는 거야.
토란은 갑자기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바깥은 너무 위험하다고 했어. 그리고 그 물들이 안전한지 어떻게 알아?
토란은 멀리서 토끼나 사슴이 풀을 뜯는 걸 보았고, 바위 밑에 숨어서 아슬아슬하게 지나쳐 보낸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리고 묘한 냄새가 나는 물을 먹었다가 탈도 여러 번 났다.
바로 그걸 배워야지! 너, 여기까지 올 용기가 있었으면서 설마 그걸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토란은 도토리에게 짜증이 확 치밀었다.
내가 왜 그런 걸 해야 해?
흐음, 그럼 넌 대체 왜 여기 있니? 그런 모습을 하고?
도토리가 토란을 가리켰다. 확실히 토란은 제대로 된 행색은 아니었다. 봉오리는 매달릴까 말까 한 채였고 꽃대도 매만져 주지 않아 허술했다. 뿌리는 가느다란 다른 꽃들과 정반대로 굵고 튼튼하고 볼품없게 생겼다.
대답은 네가 알고 있어. 그렇지?
토란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도토리가 한 말이라서 인정하기 싫었다.
내가 왜 네 말을 믿어야 하지? 난 너를 오늘 처음 만났어.
알게 될 거야. 내 말이 진짜란 걸. 거기 있으면 끔찍한 유충들에게 팔려가서 씨받이가 되기만 할 뿐이라는 걸.
토란은 어리둥절했다.
유충이 뭐야, 씨받이라니?
도토리는 잎으로 서글서글한 모양을 만들었다.
아이 참, 그래, 그 얘기 중이었지. 어디서 얘기가 딴 데로 새 나간 거야 대체. 유충은 벌레야. 날개가 달린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고, 둥근 것도 있고, 기는 것도 있고 하여튼 많아.
날개라는 말에 토란은 문득 생각난 게 있었다.
나비 말야?
토란은 아베의 정원 위로 나비 떼가 날아가는 걸 본 적이 있었다. 오색의 날개를 번쩍이며 후드득 하는 굉음과 함께 날아가는 나비 떼는 아름답고 장엄했다. 나비 떼가 지나간 뒤에 꽃들은 한바탕 시끄러웠다. 큰 금색 노랑나비가 자기한테 윙크했다느니, 빨간 점 부전나비가 더듬이로 신호했다느니, 그중에 단연 아름다운 푸른색의 산제비나비가 다음에 자기를 데리러 오기로 했다느니, 어느 것이 사실이고 어느 것이 허풍인지 알 수 없는 말들로 소란을 떨어서 토란은 아연실색했지만, 모든 꽃의 꿈은 나비와 맺어지는 거였고 토란도 별로 관심은 없지만 당연한 일이라고 알고 있었다.
나비?
도토리는 잎 끝을 도르륵 굴렸다.
하! 그렇군. 그렇게 된 거군.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도토리는 잎을 딱딱대며 웃었다.
나비! 좋지! 하지만 세상엔 진짜 나비보다 벌레들이 훨씬 더 많다는 건 알려 주지 않았나 보구나. 나머지는 네가 직접 알아내렴. 네 말마따나 처음 만난 꽃의 말을 모두 믿는 건 어리석은 일이지. 보고자 하는 걸 찾는 건 별로 어렵지 않을 거야. 네가 충분히 부지런하고 강하다면. 뭐, 그 정원이 마음에 든다면 굳이 귀찮은 일을 사서 할 필요는 없어. 하지만 아베가 과연 무엇으로부터 너희를 보호하는지, 나라면 무척 궁금할 거야.
아베는 그냥 우리를 돌보는 것뿐이야.
토란의 이파리 끝이 자신 없게 오그라 들었다.
그가, 왜? 뭣 때문에 너희를 위해 그런 노력 봉사를 해야 하지?
우리는 꽃이잖아.
그래, 꽃이지. 그저 어여쁘기만 하면 되는 꽃.
도토리는 불쑥 꽃대를 디밀었다.
꽃이 뭔데? 그저 보기 좋아서 기른다고 생각하는 거야? 정말로? 너라면 그럴 수 있을 거 같아? 아무 대가도 없는데?
토란은 대답할 수 없었다. 도토리는 아래 잎을 버석거려 낮고 진지한 소리를 냈다.
아베는 내키는 곳에 좋은 물건을 팔고 싶은 거야. 그래서 너희를 키우는 거지. 벌레들에게 아주 잘 팔릴 꽃으로.
토란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뭐?
꽃을 판다고. 그가 왜 너희를 그렇게 애지중지하는데? 너희가 상품이기 때문이야, 물론 너희에게 애착이 없다는 건 아냐. 하지만 너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애착이지. 분명히 해 두는데 애정이 아니라 애착이야. 너희는 물건이니까.
토란은 쏟아지는 이야기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거짓말!
그래, 거짓말이야.
토란은 숨이 막혔다. 도토리는 씩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편하다면. 하지만 그 정원에서 지금 같은 모습을 할 수 있었다면 넌 거기 있는 꽃들과는 달라. 틀림없이 모든 게 궁금해질 거고 모든 걸 알고 싶어질 거야. 그게 쓰든 달든. 만약에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한 번은 도와줄게. 네가 나를 구해 줬으니까.
도토리는 떠났다. 토란은 한밤이 지날 때까지 멍하니 거기 있다가 간신히 여명 때에 맞추어 정원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은 너무 선명해서 토란은 오히려 모든 사물이 뒤얽혀 흐릿해 보였다. 토란은 원치 않았지만, 모든 게 변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모든 건 그대로인데 토란이 변했다. 정원 울타리 앞에서 그걸 깨닫고 토란은 두려워져서 떨었고, 조금 울었다.
토란은 이전에는 미처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기 시작했다. 귀신이나 도깨비 따위가 아니라 더 기분 나쁘고 기묘한 사건이었다. 정원에서 정말로 꽃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화려하거나 좋은 향기가 나는 꽃들이 먼저였는데 어떻게 사라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 밤엔 대개 더 미적지근하고 이상한 냄새나는 물이 나왔다. 토란은 전에는 전혀 몰랐고, 그저 입맛에 당기지 않아 거르기 일쑤였는데 바깥의 신선한 물맛을 알고 나자 그 맛이 더욱 이상했다. 토란은 그 얘길 엉겅퀴와 하고 싶었다. 잘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도토리 이야기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요새 엉겅퀴는 다른 일로 바빠서 토란과 이야기를 할 틈이 없었다. 토란은 하는 수 없이 노래 연습이나 하며 시간을 보냈다. 사실 노래 연습만으로도 시간은 너무 잘 갔다. 아베는 자주 줄에 와서 토란이 노래하는 걸 보기도 했지만 항상 별말 없이 가버렸기 때문에 토란도 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밤 엉겅퀴가 토란을 불렀다. 요새 엉겅퀴는 많이 자고 열심히 가꾸더니 어느새 꽃대를 아홉 개나 올리고 일곱 송이는 이미 활짝 피어서 빨간 구슬을 단 것처럼 화려했다.
토란, 토란, 나 어때?
엉겅퀴는 꽤 들떠 보였다.
있잖아. 나비가 나를 데리러 온대.
뭐?
토란은 아베가 유난히 자주 줄에 들렀던 이유를 알았다. 토란을 감시하러 온 게 아니라 엉겅퀴를 살피러 온 거였다.
저기, 언제 따로 나비를 만난 적 있었어?
토란은 한 번도 나비가 그 줄에 내려앉는 걸 본 적 없었다. 장미 덩굴 줄에는 간혹 왕자팔랑나비나 푸른 부전나비가 날아드는 걸 봤지만 그나마도 아주 가끔 잠깐씩이었다.
아니, 하지만 곧 데리러 올 거라고 했어. 믿을 수가 없어. 난 그냥 이대로 늙고 시들어 죽을 줄 알았는데!
엉겅퀴는 예뻐. 진짜로.
토란은 엉겅퀴의 기쁜 모습이 좋으면서도 마음이 불편했다. 엉겅퀴의 행복을 바랐지만 헤어진다는 것에 섭섭하고, 자꾸만 도토리의 말이 생각났다. 그건 나비가 아니야, 그건 그냥 벌레야. 토란은 머릿속에서 소리치는 말을 지웠다. 나비일 것이다. 엉겅퀴는 행복할 것이다. 그렇게 믿자. 그게 좋다.
언제?
몰라. 하지만 곧. 멋진 나비라면 좋겠다. 꼬리명주나비나 산제비나비처럼 잘생긴 건 부담스러워서 싫고, 호랑나비나 표범나비라면 어떨까? 난 힘이 센 편이 끌리거든. 아냐, 나한텐 부전나비나 배추흰나비도 과분할 거야.
엉겅퀴와 토란은 밤늦게까지 나비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둘 다 물관이 말라서 아베가 엉겅퀴에게 특별히 선물한 작은 단지의 물을 나눠 마셨다. 물은 지나치리만치 달아서 토란은 조금만 마셨지만 엉겅퀴는 기분 좋게 단지를 다 비웠다. 그리고 단잠에 빠져들었다.
한밤에서 새벽으로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토란은 바삭바삭 소리에 설핏 잠이 깼다. 검은 열매에 뿌리만 달린 것처럼 생긴 투구벌레들이 화분을 져 나르고 있었다. 전에도 투구벌레들이 가끔씩 빈 화분을 옮기는 걸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빈 화분이 아니었다. 그 위에서 축 처져 힘없이 흔들리고 있는 건 엉겅퀴였다. 토란은 줄기가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투구벌레들은 아베의 부하로, 아베처럼 검고 매끈하고 튼튼한 외관을 하고 있었다. 토란은 아베가 걸어 다니는 열매가 아니라 꽃들과 전혀 다른 존재라는 걸 그때 처음 깨달았다. 그들은 달랐다. 전혀 달랐다. 왜 그걸 몰랐을까, 왜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걸까?
토란은 어둠을 헤집고 달리는 투구벌레들 뒤를 조심스레 따라갔다. 투구벌레들은 빨랐지만 토란도 그만큼 빨랐다. 토란은 자신이 얼마나 빠른지 깨닫고 조금 놀라고 기뻤다. 그리고 이런 때에 기뻐했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도랑 너머 풀숲에서 토란은 투구벌레들을 놓쳤다. 거기서부터는 너무 어두웠다. 토란은 초조하게 뿌리를 동동 굴렀다. 그때 가까운 가지에서 포로록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술래잡기를 하니, 토란?
밤새였다.
검은 투구벌레를 찾아요.
그거라면 저쪽으로 갔어.
토란은 밤새가 가리키는 큰 나무 너머를 재빨리 훑어보았다. 과연 풀숲이 잔들 대며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언제 또 같이 노래할까?
조만간이오.
토란은 밤새에게 감사 인사를 할 틈도 없이 투구벌레들 뒤를 쫓았다. 가끔 뒷모습을 놓칠 때면 토란은 감각을 기울여 풀이 바삭대는 방향을 찾아가며 따라잡았다. 너무 다가가면 들킬까 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서 자주 놓칠 수밖에 없었다. 행여나 들키면 그냥 길가의 풀 인 척 할 생각이었지만 먹힐 리가 없으니 그런 일은 없어야 했다.
속도를 낼 때마다 어둠이 줄기에 달라붙는 것 같다. 토란은 잎 뒤에서 땀이 흘러 마른 뿌리를 적시는 걸 느꼈다. 새로운 감각이었다.
토란은 한동안 투구벌레들의 모습도 움직이는 소리도 찾을 수 없어서 조금 헤맸다. 그러나 금방 우거진 수풀을 그러모아 매듭지은 빈 공간을 찾아냈다. 엉겅퀴는 화분 채로 거기 있었다. 토란은 엉겅퀴를 불렀다. 꽃들의 대화는 대개 줄기짓 언어라 가깝지 않으면 알아듣기 어려워 엉겅퀴는 듣지 못했다. 어쩌면 아직 잠이 깨지 않은 걸 수도 있었다. 그래서 토란은 노래를 불렀다. 굳어 있던 엉겅퀴의 줄기가 움찔했다. 엉겅퀴는 깨어 있었고 낯선 곳에 놓여 겁먹고 있었다.
저리 가, 토란. 나비가 올 거야.
하지만 엉겅퀴는 의연하게 행동했다. 토란은 노래하기를 멈췄다. 어둠이 깊어지고 밤새가 고오고오 울었다. 시간은 숨 막히게 흘렀다. 어쩌면 전혀 흐르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토란은 풀처럼, 나무처럼 기다렸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괴상스런 형태가 나타났다. 토란은 숨을 삼켰다. 이상했다. 그건 나비가 아니었다.
꽃술보다도 작은 날개를 왱왱대며 부숭부숭한 털투성이에 고약하게 생긴 놈은 겁에 질린 엉겅퀴를 이리저리 들춰 보다 갑자기 꽃잎을 잡아 뽑고 줄기 껍질을 거칠게 벗겨 내기 시작했다. 엉겅퀴는 아파서 줄기를 꼬며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놈은 꽃의 비명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아니 처음부터 들을 생각도 없이 하던 것을 계속했다. 그다음 행동들은 그야말로 이상하고 끔찍해서 더 볼 수가 없었다. 토란은 겁에 질린 채로 달아났다. 하지만 그곳으로 난 길은 확실히 기억해 두었다.
이제 토란은 노래 말고도 더 할 일이 생겼다. 밤이 되면 울타리를 넘어 도랑을 지나 수풀을 뚫고 엉겅퀴를 보러 가는 거였다. 여기저기 껍질이 파헤쳐진 엉겅퀴는 초췌한 꼴 그대로 추스를 생각도 없는 듯 며칠을 있었다. 토란은 엉겅퀴가 죽었을까 봐 겁이 났지만 엉겅퀴는 살아 있었다. 줄기가 꼬여서 마주 볼 수 없었지만 점점 껍질이 아물고 다친 자리에 물이 오르는 게 보였다. 토란은 엉겅퀴가 들을 수 있게 노래를 불러 주었다. 엉겅퀴는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씩 잎을 움찔하며 소리에 반응했다. 토란은 그걸로 만족했다.
며칠이 지나자 엉겅퀴의 줄기는 눈에 띄게 부풀고 윤이 났다. 토란은 여전히 엉겅퀴의 뒷모습만 볼 수 있었지만 건강해 보여서 그나마 안심했다. 기분이 나아지면 엉겅퀴도 토란을 돌아볼 것이다. 토란은 기대와 희망을 갖고 계속 엉겅퀴를 만나러 갔다.
어느 밤, 토란은 여느 때처럼 엉겅퀴에게 노래를 불러 주고 있었다. 엉겅퀴는 노랫소리에 맞추어 줄기를 들썩이는가 싶더니 드디어 토란을 돌아보았다. 토란은 감격에 겨워 달려가려다 멈췄다. 엉겅퀴는 이미 죽어 있었다. 꽃술이 폭삭 주저앉은 채로 아주 오래된 주름만 바싹 말라붙은 채였다. 그래도 이상하게 부푼 줄기는 움찔움찔 움직였다. 토란은 겁에 질려서 뒷걸음질 쳤다. 엉겅퀴의 줄기가 휘어지며 퍽퍽 터져 나가더니 터진 틈새에서 희고 둥근 것들이 툭툭 떨어졌다. 그것들은 잠시 떨어진 그대로 웅크려 있다가 천천히 얇고 딱딱한 막을 벗고 꼬물꼬물 대며 움직였다. 토란은 경악했다. 떨어진 흰 것들이 엉겅퀴에게로 기어가 마른 꽃술부터 뜯어먹기 시작한 것이다. 엉겅퀴는 수십 마리의 애벌레에게 뜯어 먹혀 순식간에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엉겅퀴의 깊은 곳엔 아직 생명이 남아 있어 저항했지만 벌레들은 부름켜까지 남김없이 먹어치웠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뒹굴며 잠들었다.
잠시 후 날개 달린 쇠파리가 돌아오더니 유충을 보고 기뻐하면서 모두 데리고 떠났다. 토란은 쇠파리가 되돌아올까 봐 한참 기다리다가 더 이상 아무것도 움직일 낌새가 없자 살그머니 버려진 화분으로 다가갔다. 엉겅퀴는 남아 있는 게 거의 없었다. 토란은 미어지는 마음을 앉고 흙을 헤집다가 뿌리께에 남은 검고 둥근 것들을 보고 흠칫했다. 아까의 흰 것들과 비슷했다. 하지만 움직이진 않았다.
가져가.
토란은 간신히 몇 가닥 남은 엉겅퀴의 뿌리가 전하는 걸 들었다. 토란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엉겅퀴의 유품을 흙 속에서 모두 찾아내 물푸레나무 구멍에 숨겼다. 새벽빛이 밝아오고 있었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조금 있으면 아베가 꽃들을 둘러보러 나올 것이다. 그때까지 자리에 가 있지 못하면 토란은 아주 나쁜 일을 당하게 될 터였다.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토란도 몰랐다. 하지만 토란이 싹일 때, 걸어 다니는 싹들은 차례로 사라졌다. 그때의 기억은 시간이 흘러 흐릿해졌지만 두려움은 모호한 모양 그대로 심연에 가라앉아 지층처럼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토란은 그 싹들이 어떻게 됐는지 결코 알게 되고 싶지 않았다.
토란은 열심히 달렸다. 그러나 정원 울타리에 닿았을 때는 훤한 아침이었다. 토란은 절망했다. 화분으로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을 때 울타리 벽 안쪽에서 아베의 사각거림이 들렸다. 토란은 울타리 사이로 숨어 들어가 그들을 엿보았다. 아베가 투구벌레들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화분에 남은 씨알이 하나도 없다고? 그럼 꽃도 벌레도 내 몫은 아무것도 없잖아! 이런 손해라니!
토란은 본능적으로 엉겅퀴의 화분을 말하고 있고, 물푸레나무에 숨긴 게 아베가 찾는 씨알이라는 걸 알았다. 그것들이 꽃, 혹은 벌레가 되는 근원이었다.
토란은 아베가 투구벌레들에게 화풀이하는 틈에 울타리 다른 쪽으로 파고들어 재빨리 제자리로 돌아갔다. 훤한 아침에 토란이 걷는 걸 본 모든 꽃들이 웅성였다. 그러나 토란은 시치미를 뚝 떼고 화분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다른 날보다 조금 늦은 아침에 아베가 꽃들을 보러 나왔다. 토란은 아베의 시선에 뿌리가 저렸지만 여느 때처럼 조는 체했다. 그런데 아베는 평소와 달리 금세 토란의 화분을 떠나지 않고 주변을 맴돌았다. 토란은 불안했다. 아베가 지난밤 일을 안 걸까? 하지만 화내는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분 나쁘게 싱글싱글 웃고 있다. 토란은 그 모양을 언젠가 본 적이 있었다. 정원에 오래 남은 꽃들을 해치울 때의 모양, 엉겅퀴에게 나비가 온다고 말했을 때의 시원하고 능글맞은 모양새였다.
왜요?
토란, 네게도 나비가 온단다. 세상엔, 참 여러 가지 취향이 있는 법이지. 암.
토란은 줄기 속이 뒤집어지는 것을 간신히 억누르며 간신히 물었다.
그 나비가, 언제 오는데요?
아무도 모르게 살짝.
아베는 징그럽게 웃었다. 토란은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야, 너네들 나비 본 적 있어?
토란의 온 이파리가 한꺼번에 부러지는 듯 한 큰 소리를 내서 주변의 꽃들이 죄다 토란을 돌아보았다.
나비가 데려간다는데, 너희 진짜 나비를 가까이서 본 적이나 있어?
가끔이야 봤지, 저만치서 나는 걸.
여기저기 몇 마디가 나왔다. 하지만 정말로 나비를 만난 꽃은 한 송이도 없었다. 토란은 심술궂게 잎을 긁었다.
그게 우리를 데리러 온 거 맞아? 우리를 데려가는 거 맞아? 지금까지 사라진 화분 중에 하나라도 나비가 데려가는 거 본 적 있어?
아베가 질색해서 호통 쳤다.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냐, 토란! 당연히 나비가 데려가지, 아니면 누가 너희를 필요로 하고 데려간단 말이야?
토란은 아베가 겹눈을 부라리는 게 조금도 겁나지 않았다.
그래요? 그렇다고 해 두죠, 하지만 난 안 갈 거예요. 설령 그게 나비라 하더라도.
너는 만날 이상한 말만 하더니 이런 때도 기어코 이상한 말을 하는구나. 낯선 곳에 가려니 두려운 모양인데 걱정할 거 없다. 다 잘 될 거야. 모두가 네 행복을 위한 거란다.
아베가 달랬다. 토란은 완강하게 쏘아붙였다.
뭐가 잘된다는 거죠? 낯선 곳으로, 지독하게 생긴 벌레들에게 끌려가서 씨알을 뿌리고 넝마가 돼서 죽는 게요? 그게 잘된다는 건가요? 그게 누누이 말한 꽃들의 행복이에요?
토란은 저질러 놓고 곧장 후회했다. 아베의 얼굴이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 무섭고 낯선, 힘세고 포악한 벌레의 얼굴이었다.
무슨 소리냐, 지독하게 생긴 벌레라니. 너희는 나비와 사랑을 하기 위해 태어났어. 넌 생명을 잉태하는 위대한 일을 하는 거야. 얼마나 행복하고 근사한 일이냐?
그럼 저는요? 생명을 잉태하고, 저는 어디로 가죠?
토란의 대꾸는 갈 데 없이 날카로웠다. 아베는 주변 꽃들을 의식해서 조금 누그러진 소리를 냈다.
어허, 네가 어디 있냐니? 넌 거기 있을 거다. 너무 앞서 걱정하지 마라, 토란. 넌 그게 문제야. 모든 게 다 잘될 거다.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난 싫어요. 잘되든 못되든 난 싫어요. 난 나비에게도 안 가고 아무것도 잉태 안 해요.
그럼 어쩌자는 거야? 쓸데없는 말하지 마라. 넌 꽃이야. 씨알을 낳는 게 네 임무라고! 그리고 그걸 안 하면 네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냐? 네가 달리 뭘 할 수 있어? 그냥 이렇게 살다가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시들어 썩어 버릴 거냐? 그건 좀 나을 거 같으냐?
다른 방법이 없다면 차라리 그러겠어요!
토란이 온 잎을 파르르 떨었다. 아베는 진짜로 화를 냈다.
오호라, 넌 뭔가 다르다는 거냐? 그래, 넌 노래를 할 줄 알지. 참 알량한 재주로구나. 그걸로 뭘 할 수 있다는 거냐? 네가 걸을 줄 안다고도 들었다. 그래, 걸어 봐라. 네 그 얄팍하고 잘난 뿌리로 어디까지 갈 수 있나 보자. 금세 얼마 못 가고 물을 달라고 애걸하게 될 거다. 그러다 바싹 말라죽을걸.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아니야! 그런 게 꽃이라면 난 꽃이 되지 않을 거야!
넌 꽃이야!
아베는 그날 첫 물도 주지 않고 가 버렸다. 토란은 분노에 떨었다. 너무 화가 나서 물관이 마른 것도 기꺼이 참을 수 있었다. 아베는 토란의 뿌리가 얼마나 튼튼한지 몰랐다. 아베조차 꽃들의 뿌리는 보지 않았다. 그건 화분 속에 숨겨진 가장 은밀한 부분이기 때문이었다.
토란은 밝은 동안에 열심히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무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도 판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정원에서 나가야 했다.
토란은 기억을 더듬었다. 그때, 도토리가 어떻게 하라고 했더라.
내 도움이 필요하면 이 나무 밑에서 노래를 불러. 내가 어디서든 듣고 너를 찾아낼 수 있게. 네가 나를 도와줬으니 나도 한 번은 너를 도와줄게.
별로 담아 듣지 않았는데 도토리의 말은 또렷이 떠올랐다. 토란은 날이 으슥해지고 꽃들이 잠들기를 기다렸다. 아베의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토란은 흙을 파헤쳐 뿌리를 꺼냈다. 그리고 달렸다.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토란을 막을 울타리도, 붙잡을 미련도 정원엔 없었다.
토란은 언덕 위의 나무까지 단숨에 갔다. 그리고 나무뿌리 근처에 숨어 노래를 불렀다. 도토리가 오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토란은 생각보다 더 오래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고 각오했다. 어쩌면 며칠이 걸릴지도 모른다. 토란은 다만 아베가 쫓아오기 전에 도토리를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샘가로 내려갔다. 오늘 하루 종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
까꿍!
토란은 샘에 뿌리를 디밀자마자 반대편에서 튀어나온 그림자에 깜짝 놀랐다. 도토리였다.
어떻게 된 거야?
토란은 반가우면서도 너무 때를 잘 맞춘 도토리의 등장이 이상해서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네가 나를 찾을 줄 알았지. 그래서 근처에 있었어. 생각보다 늦었네. 난 좀 더 빨리 부를 줄 알았는데.
도토리가 잎을 살랑였다. 토란은 갑자기 웃음이 났다.
너 무지 한가하구나.
도토리도 따라 웃었다.
그렇게 여유 있게 말할 때가 아니지 않나?
맞아. 따라와.
토란은 도토리를 데리고 엉겅퀴의 씨알을 숨겨 둔 물푸레나무로 갔다. 그리고 나무 구멍에 숨겨 둔 씨알을 모조리 꺼냈다.
좀 도와줘. 이걸 담을 만한 게 있을까?
맙소사. 이게 다 뭐야. 너 뭘 가지고 있는 거야?
도토리는 씨알을 보고 질색하게 놀랐다.
유품이야. 날 도와준댔지? 어디든 좋아. 이걸 가지고 가야 해.
힘세고 날아다니는 벌레들도 피하면서 말이지.
도토리는 토란이 키를 낮추도록 신호했다. 숲이 술렁이고 있었다. 토란은 이파리가 줄기 안으로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너를 찾고 있어. 아베가 단단히 화가 났군. 난 아슬아슬한 게 좋더라. 가자.
도토리는 씨알을 질긴 이파리로 싸서 반을 짊어졌다.
서두르자. 날벌레한테 잡히면 너도 나쁘지만 나도 아주 나빠.
네가 왜?
달리면서 토란이 물었다.
놈들은 자기들의 그 알량한 권위에 도전하는 걸 아주 싫어하거든.
넌 아베를 만난 적도 없잖아?
맞아. 하지만 나는 걷는 꽃이지. 그거 자체가 벌레들에겐 권위에 대한 도전이야. 자, 뛰라고.
둘은 밤을 낮처럼 달렸다. 뒤에서 날벌레들의 웅웅임이 들렸다. 소리는 가까워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했다.
도토리는 절벽 아래를 통과해 긴 숲길을 지나 강가를 따라갔다. 벌레들이 쫓아오는 소리는 더 들리지 않았다.
어디 가는 거야?
위기를 벗어나자 토란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처럼 걸어 다니는 꽃들이 모인 데. 난 거기서 왔어.
그런 데가 있어?
암, 있지. 나나 너처럼 확고하게.
토란은 설레면서도 불안했다. 짊어 진 씨알들이 휜 줄기에 무겁게 달라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