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름벌레 짜잔!
4.
바위를 훑는 바람이 점점 가볍고 건조하고 차가워졌다. 토란은 씨알이 얼어 죽지 않도록 질긴 풀줄기를 말려 엮은 속에 넣었다. 첫눈이 내리고 이틀이 지난날 갑자기 도토리가 토란을 찾아왔다. 벌레 농장 이후로 처음이었다.
어디 갔다 왔어? 보고 싶었어.
토란, 넌 떠나는 게 좋겠어.
도토리는 토란의 반가운 인사에 답인사도 없이 용건부터 꺼냈다. 토란은 어리둥절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솜다리가 너를 이용하려 해. 정확히 엉겅퀴의 씨알들을.
도토리는 그간 무척 마르고 창백해져 있었다. 너무 말라서 껍질 아래 물관이 도드라져 보였다. 토란은 갑자기 도토리가 무서워졌다.
엉겅퀴의 씨알을? 왜?
너도 소문은 듣고 있겠지.
토란은 불안스레 잎을 부볐다.
뭘 말야?
도토리는 힘없이 웃었다.
토란, 넌 늘 알면서 모르는 척하더라. 전쟁 말이야.
토란은 꽃대를 붉혔다.
들었지만, 하지만 모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말하던데.
도토리는 가지를 저었다.
안타깝지만 솜다리는 진짜로 벌레들과 전쟁을 할 거야. 새봄이 오는 즉시. 늪에 있는 실험실에서는 벌레를 직접 공격해서 먹이로 삼는 꽃들이 성공적으로 탄생했어.
토란은 벌레들이 우글거리는 기이한 농장과 그 너머의 기분 나쁜 늪 냄새를 떠올리곤 언짢아졌다.
벌레를 공격해? 그리고 꽃이 직접 먹는다고? 말도 안 돼.
사실이야. 신종 식충식물들이지. 내가 직접 봤어. 솜다리는 거기에 네 씨알들도 끼워 넣고 싶어 해.
끔찍한 소식이었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나는 씨알을 내놓지 않아.
물론 그러고 싶겠지. 하지만 너 가을에 솜다리에게 진 빚이 있지, 미나리 건으로.
토란은 신음했다.
그건…….
내 말부터 들어, 토란. 아무튼 나는 네가 거기 휩쓸리길 원치 않아. 그러니까 여길 떠나.
도토리는 냉정했다. 토란은 벌레 농장에서부터 줄곧 도토리가 뭘 생각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갈 곳이 없어.
지독히 바보 같은 소리란 걸 알지만 토란은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넌 어디든 갈 수 있어. 이 겁쟁이야.
도토리가 줄기를 거세게 부볐다. 토란은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도토리, 넌 왜 만날 나쁜 소식만 갖고 오는 거야!
토란은 울먹였다.
왜냐면, 세상이 그런 곳이니까, 토란.
도토리는 뿌리 방향을 돌렸다. 토란은 다급히 도토리를 붙들었다.
가지 마. 도토리. 난 정말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넌 이미 다 알고 있어, 토란. 네가 뭘 해야 하냐면 네가 생각한 바로 그걸 실행하는 거야.
순간 토란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도토리가 옳았다. 토란은 응석받이가 된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럼 벌레들은, 거기 울타리 안에 애벌레들과 큰 벌레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토란은 주름벌레를 잊지 않았다.
우리 전쟁을 돕겠지.
토란은 도토리가 ‘우리’라고 말한 것에 떨었다. 도토리는 전쟁을 할 생각이었다.
그럼, 자기들끼리 죽이게 되는 거야?
거부한다면 죽일 수밖에 없어. 뒤에 적을 놓고 전쟁에 나갈 순 없잖아?
토란은 갑자기 지독한 피로를 느꼈다. 몇 마디밖에 안 했는데 어디서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맞은 것 같았다.
너는, 도토리?
토란은 이미 도토리의 대답을 알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확실히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해. 하지만 너는 떠나도 돼. 넌 여기서 태어나지 않았어. 네가 짊어져야 할 의무는 없지. 생각이 다르다면 가야 해. 그게 너에겐 옳으니까.
도토리는 토란이 묶어 둔 씨알주머니를 던졌다.
가. 가능하면 빨리, 솜다리가 모르게.
토란은 씨알 주머니를 꼭 안았다. 토란의 마음은 처음 아베의 정원을 떠날 때처럼 불안했지만, 그때처럼 두렵지는 않았다. 지금 토란에겐 할 일이 있었고, 그걸 어떻게 해내야 하는지에만 신경을 쏟기도 바빴다.
토란은 바로 떠나지 않고 늪 동굴로 먼저 내려갔다. 주름벌레는 여느 때처럼 애벌레 방에 있었다. 날이 추워져 깨어나는 알도 없고 먼저 깨어난 애벌레들은 이미 농장으로 보내졌지만 주름벌레는 제자리를 지켰다.
숨 차 있네요, 토란. 뭐가 그리 급해요?
토란을 보자마자 주름벌레는 태평하게도 말했다. 토란은 급히 달려온 것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전쟁한다는 거, 알아요?
물론 들었어요. 여긴 솜다리의 작전 기획실인걸요.
주름벌레는 느릿하게 앞다리를 벌려 보였다. 토란은 주름벌레의 여유에 아연하면서도 침착한 분위기에 덩달아 차분해졌다.
그쪽은 어쩔 거예요? 싸우게 하거나 죽인다는데.
글쎄요. 제겐 늘 선택권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물어보니 좀 부담스럽네요. 이번 것도 그렇고요. 전 그냥 제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가장 좋아요. 무슨 일이건 간에요.
토란은 용기를 내어, 생각을 잎으로 사각였다.
전 떠날 거예요. 같이 갈래요?
예?
절 좀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저도 그쪽을 도울 수 있다면 좋고요.
주름벌레는 잠시 생각하더니 흔쾌히 답했다.
그럴 수 있다면 제겐 가장 나은 방법일 거 같네요.
그럼 우선.
토란은 생각한 바를 실행에 옮기기 전에 숨구멍을 크게 열었다.
굴을 파요, 우리가 달아날 수 있는 안전한 탈출로를요. 지상으로 가면 솜다리에게 들킬 거예요.
기꺼이 그러죠.
주름벌레는 기찬 솜씨로 빠르고 능숙하게 벽 모서리를 파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파고 나서 토란과 씨알들을 먼저 안에 들어가게 하고 뒷벽을 막았다. 둘은 잠시 사방이 막힌 흙 속에 있었다. 토란은 갑자기 두려워졌다. 사방에 죽음이 있었고 그 안에 꼼짝없이 붙들린 기분이었다.
겁먹지 말아요, 토란. 당신도 씨알일 때 흙 속에 있었잖아요.
어둠 속에서 주름벌레의 사각임이 들렸다. 신기하게도 토란은 그 소리에 안심되었다.
주름벌레는 적을 따돌릴 만큼 뒷벽이 충분히 단단한지 확인하고 앞을 파나 가기 시작했다. 토란은 앞인지 뒤인지 위인지 아래인지도 알 수 없어 공황 상태에 빠졌지만 주름벌레는 이리저리 구불구불 잘도 나아갔다. 만약의 추격자를 대비해 중간중간 거짓 굴을 만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토란은 자기 선택이 옳았다는 것이 기뻤지만, 홀가분하게 기뻐할 만한 때가 아니었다.
토란은 잔뜩 짊어진 씨알들의 무게를 느끼면서 문득 궁금해졌다. 이 씨알들은 벌레가 될까, 꽃이 될까? 첫 시작은 같은데 어디서부터 달라지는 걸까?
토란이 중얼거린 소리를 들은 주름벌레가 말했다.
그건 제 번데기가 뭐가 되느냐와 비슷한 문제네요, 토란.
번데기요?
네. 전 곧 번데기가 되요. 아직 성충이 아니니까요. 당신이 번데기를 지켜 주면 제가 어떤 벌레가 됐든 당신을 돕겠어요. 성충이 되면 날개가 생기고 힘도 세지니까 지금보다 더 도움이 될 거예요.
토란은 주름벌레가 변한다는 얘기에 놀랐고 겁이 났다.
그쪽은 영원한 애벌레라던데요?
솜다리가 그랬죠? 정말 제멋대로 생각하길 좋아한다니까요.
토란은 주름벌레가 보통 벌레랑 같다는 것에 안심한 한편 두려워졌다. 주름벌레는 지금도 충분히 크고 강하고 험상궂게 생겼다. 여기서 더 심하게 변한다면?
그쪽이 아주 위험한 벌레가 될지도 모르는데요?
토란은 차마 자기가 잡아먹힐 거라는 망상을 했다는 건 전하지 않았다.
그럼 좋죠. 남들에겐 위험하겠지만 당신에겐 더 안전할 거예요.
다른 선택은 없었다. 토란과 주름벌레는 약속을 나누었다.
주름벌레는 어두운 땅 속에서도 마실 물이나 먹을거리를 잘도 찾아냈다. 토란은 솜다리의 벌레 농장이 있는 굴이 원래는 주름벌레 것이었다는 걸 상기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죠?
토란이 물었다.
뭐가요?
굴을 뺏기고, 마음대로 부려지거나 하면서도 어떻게 솜다리와 친할 수 있는 거죠?
주름벌레는 천천히 흙을 골라 다지면서 말했다.
토란이라면 어쨌을 건데요?
에?
토란은 예상치 반문에 어리둥절했다가, 잠깐 생각하고 답했다.
저라면, 솜다리를 죽였을 거예요. 그리고…….
스스로도 그 생각이 무서워서 토란은 약간 떨었다.
그리고, 음. 제 대답이 틀렸나요?
주름벌레는 동그랗게 몸에 달라붙은 머리를 저었다.
아뇨.
벌레는 잠시 흙손을 놓고 말을 이었다.
저도 그럴 수 있었어요. 얼마든지요.
토란은 숨을 죽였다.
하지만 안 그랬잖아요. 왜죠?
주름벌레는 바싹 마른 앞발을 펼쳐 보였다.
솜다리를 죽이고요? 그다음은요? 다른 꽃들도 죽일까요? 도토리도? 토란도? 꽃들을 전부 죽일 순 없어요. 완벽히 제거할 수 없다면,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해요. 그래서 저는 솜다리를 안 죽이고 굴을 줬어요.
토란은 주름벌레의 결정을 쉽게 수긍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굴속을 걷는 내내 몇 번이고 그 말을 끄집어내 생각했다.
긴 토굴을 지나 마침내 만난 지상은 눈이 소복한 한겨울이었다. 주름벌레는 토란을 굵직한 뿌리가 잔뜩 얽힌 아늑한 고목 속 빈 굴에다 올려다 놓고 땅 속에서 말했다.
저는 곧 번데기가 돼요.
토란은 토굴에서 나눈 약속을 상기했다.
그 번데기를 새나 작은 짐승이 노리지 못하게 지키면 되는 거랬죠.
그래요. 다시 만나요. 안녕.
토란은 작별 인사가 어색했지만 따라 했다.
안녕.
주름벌레는 기어올라 오자마자 나무 벽 안쪽에 매달리더니 곧 딱딱해졌다. 주름벌레의 껍질 안쪽은 이상하게 텅 비어 보였다. 마치 지금까지 움직이던 주름벌레는 진짜가 아니고, 그 안에 있는 주름벌레라고 이름 붙어 있던 뭔가가 갈색 표피 아래까지 가득 차 주름벌레인 척하다가 도로 안쪽으로 움츠러든 것 같았다.
토란은 주름벌레의 번데기를 살펴보고 나무 구멍 안쪽에 씨알 주머니를 내려놓았다. 잠잠했던 바람 소리가 거세게 나무 바깥벽을 할퀴었다. 토란은 줄기를 부르르 떨고 입구 바로 옆 얼지 않은 좁은 흙 틈새에 뿌리를 박았다. 험한 겨울이었다. 토란은 긴 겨울이 되리라고 예감하고 각오를 다졌다. 토란이 죽으면 주름벌레와의 약속도, 씨알을 보호하려고 힘들게 바위 보금자리를 떠나온 것도 소용이 없어진다.
토란은 매일 번데기와 씨알들을 지켜보는 것으로 하루를 보냈다. 겨울은 꽃을 너무나 무력하게 만들었다. 땅도 물도 얼어붙었다. 토란은 아무 데도 갈 수 없었고 하루하루 죽지 않도록 버티는 거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하얗게 펼쳐진 하늘과 땅 사이에 살아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토란은 지쳐 갔다. 눈보라에 시달리며 홀로 세우는 밤이면 적막 속에서 아베의 말이 저주로 되살아났다.
너는 죽을 거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토란은 오기로 버텼다.
가끔 낮에 따뜻한 햇살이 나무 굴 안쪽까지 비쳐 들면 토란은 혼곤한 잠 속에서 몽롱한 꿈을 꾸곤 했다. 봄이 오고 땅이 꿈틀대며 씨알들이 파릇한 싹을 뾰족하게 내민다. 그 위로 주름벌레의 번데기가 툭 터지며 오색 안개를 드리운 아름다운 날개가 천천히 움직였다. 싹들은 황금색 날개 그늘에서 노래를 불렀다, 싸르륵 싸르륵. 따사롭고 시원한 바람 같은 소리들이 빈 나무속을 날아다녔고, 마침내 나무 꼭대기까지 가득 차올라서 말라죽은 가지 끝에 매달려 푸른 싹으로 피어났다. 토란은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꿈을 깨면, 겨울은 아직 사나운 짐승처럼 밤의 지상을 헤매고 있었다. 토란은 얼어붙은 눈물을 핥았다. 짜다. 어둑해진 벽 그늘에 말라빠진 번데기가 바싹 매달려 있는 게 보였다. 씨알들도 추위에 쪼그라들어 섬뜩하게 차가웠다. 토란은 모든 게 죽어 버린 것 같아서 겁이 났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이면 번데기 껍질 속엔 미약하게나마 온기가 있었고, 씨알들도 조금은 따뜻해진 것 같았다. 토란은 그저 믿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싱싱하고 부드럽던 토란의 줄기는 점점 두껍고 주름지며 늙어갔다. 시간도 공평하게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봄이 왔다.
첫 빗방울과 함께 몰아치던 폭풍이 잠시 수그러든 새벽에 주름벌레의 번데기가 찢어졌다. 토란은 칼날처럼 얇은 햇살이 번데기를 가르며 투명한 감촉의 무지갯빛 날개가 솟아오르는 걸 보았다. 토란은 꿈속에서처럼 황홀하게 나타날 나비를 기다렸다. 그러나 안에서 나온 건 무자비하게 거대한 몸통과 얇고 투명한 날개를 가진 시커멓고 낯선 벌레였다. 토란은 본능적으로 나무 굴 입구로 움직였다.
저예요, 토란. 약속했잖아요.
토란은 벌레가 내는 싸르르한 소리에 정신이 확 들었다.
진짜, 주름벌레예요?
굼벵이라니까요. 이젠 매미지만.
토란은 웃음이 났다. 하지만 실제론 울고 있었다.
왜 이러죠, 바보같이.
어리둥절해하는 토란에게 주름벌레는 상냥하게 말했다.
긴장이 풀려서 그래요. 끔찍한 겨울을 버텨 냈잖아요. 참 잘 해냈어요.
푸르스름한 광택을 띤 매미의 검은 껍질은 보기와는 달리 따뜻했다. 토란은 잔물결 같은 다독임을 받으며 잠깐 기댔다. 토란의 속에 남아 있던 겨울 조각이 녹아 나갔다.
이제 씨알을 깨워야죠.
안정을 되찾은 토란을 내려놓고 주름벌레, 매미가 말했다. 토란은 늪에서 나올 때 어두운 굴 속에서 떠올랐던 불안을 다시 느꼈다.
이게 깨어나면 제가 뭘 할 수 있을까요? 도대체 이 안에 든 게 뭘까요?
토란은 오랫동안 두려워하던 걸 잎 밖에 냈다. 주름벌레는 느긋이 씨알을 묻은 흙에 신선한 공기가 통하도록 날개를 부비며 말했다.
뭐건 간에 토란이 아는 걸 가르쳐요. 걷는 것도 좋고, 노래도 좋겠죠. 나머지는 그 애들이 생각하게 두지요. 아무것도 미리 정할 필요는 없잖아요.
주름벌레의 여유는 모습이 변해도 그대로였다. 토란은 혼란하던 마음이 차분해지는 걸 느꼈다. 둘은 주름벌레가 날아서 물색한 양지바른 언덕에 씨알들을 묻었다. 뭐가 깨어날지는 아직 아무도 몰랐다. 토란은 봄의 일상을 시작했다. 눈이 녹아 흐른 물이 꽃의 이파리를 부풀리고, 하루가 다르게 따스해지는 햇볕에 흙이 부푸는 게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첫 씨알이 깨어났다. 연둣빛 잎을 가진 새싹이었다. 토란과 주름벌레는 기쁘게 새싹을 맞이했다. 두 번째는 꼬물대는 애벌레였다. 나머지도 금방 깨어났는데 벌레건 싹이건 곧 너무 많아져 셀 수가 없어서 토란은 금방 포기했다.
그날 밤은 축제의 밤이었다. 토란은 그간 모아둔 물과 음식으로 새 식구들을 반겼다. 주름벌레는 노래를 불렀다. 부드럽고 싸르르하게 가슴을 훑는 노래가 축복처럼 모두를 감싸고 멀리멀리 퍼져 나갔다. 그 속에서 토란은 처음 ‘소리’를 만났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거기서 토란은 다시 작은 싹이 되었고,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노래가 끝나자 현실이 돌아왔고 토란은 여전히 토란이었다. 하지만 토란은 조금도 섭섭하지 않았다. 울타리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그냥 싹이었던 토란이 그 너머의 길고 혼란한 밤길을 지나 마침내 진짜 토란이 되었기 때문이다.
고마워요.
토란은 잎을 사각였다. 주름벌레는 뭐가 고맙냐고 되묻지 않았다. 그냥 웃었다.
그날 밤, 주름벌레는 매미로서 짧은 생을 마무리했다. 토란은 모두가 잠든 고요한 속에서 홀로 조용히 주름벌레를 배웅 보냈다. 그리고 작은 샘가에 무덤을 만들고 씨앗과 애벌레들에게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