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숲
5.
토란과 엉겅퀴의 씨알들이 함께 지내던 언덕에 가을이 왔다. 토란은 더 이상 겨울을 버텨 봄을 맞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줄기가 더 이상 빛나지 않았고 잎 모서리도 누렇게 일그러져 노래는커녕 형태 보전하기도 바빴다. 뿌리는 늦여름부터 이미 너무 무겁고 뻑뻑해서 짧은 이동에도 불편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토란은 결정했다.
파란 하늘이 녹아든 바람은 청명하기 그지없었다. 매미의 무덤은 한산했고 그 옆의 샘은 평온해 보였다. 토란은 느긋하게 주변을 걸으며 가장 가느다란 잎맥까지도 바람이 통하도록 모든 숨구멍을 열고 시간이 더께 진 뿌리를 흙 속에 내렸다. 썩은 흙의 알싸한 내음과 온 줄기를 감싸는 부드러운 촉감에 절로 한숨이 났다.
토란은 이파리에 인 거대한 하늘과 뿌리 아래의 웅장한 땅 사이에서 마지막 맥동을 멈추기 전에 잠깐 아베를 생각했다.
너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남기지도 못하고 죽을 거야.
그 말은 옳았다. 하지만 토란은 그 말을 하는 아베의 등딱지가 여느 때처럼 반들거리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했다. 분노로 부푼 껍질 속에 아베는 초라하고 무력해 보였다. 그는 나이 먹어 있었다. 이제 토란도 나이를 먹었다. 그래서 토란은 그 말이 자기를 향한 저주가 아니라 아베 자신의 메아리라는 걸 알았다. 누군가를 향한 가장 중요한 말들은 자기 자신을 향한 말일 수도 있다. 아베는 몰랐다. 하지만 토란은 알았다. 그래서 미소 지었고, 마침내 움직임을 멈췄다.
토란과 씨알들이 함께 했던 한 해는 토란의 죽음과 함께 덧없는 먼지처럼 시간 속에 흩어졌다. 이제 거기엔 아무도 없었고 아무 흔적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이듬해 봄바람이 언덕 숲으로 불어왔을 때 연둣빛 파도가 봄풀 위에 너울져 춤추며 기이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풀 그늘 사이에 쉬고 있던 날벌레들도 힘차게 날아올라 유리빛 날개를 반짝이며 노래에 합세했다. 쏴드득 내리는 봄비 소리와 닮은 경이로운 이중주는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퍼져 나가 세상을 술렁이게 했다. 그것이 첫 번째 노래하는 숲의 전설이었다. 그리고 아득히 오랜 후에는 세상의 모든 숲이 노래하는 숲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