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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냥금 2 (완결)

가장 소중한 것

by 은림

소리를 지르는 순간 남자는 새빨간 열매가 떠올랐어. 부자가 되게 해준다던 만냥금. 돈 위에 떨어진 빨간 열매! 그건 천원을 만원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에 만냥금이었던 거야! 그래!


남자는 허위허위 칼국수 가게 앞으로 갔어. 주인은 막 문 닫을 준비를 하고 있었지. 계산대 앞에는 빨간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만냥금이 보였어. 흔들리는 초록색 이파리가 어서 나를 데려가 달라고, 인색한 주인을 배부르게 하는건 신물 난다고 속삭이는 것 같았지. 주인이 정말로 인색한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어.


유리문과 만냥금의 거리는 두 발짝 반, 문을 열자마자 몸을 기울여 팔을 뻗으면 가지를 잡아챌 수 있을 거리였지. 남자는 실행했어.


어마맛!


불쑥 문을 박차고 들어온 그림자가 계산대에 뛰어들었을 때, 주인 여자는 본능적으로 금고로 팔을 뻗었어. 하지만 남자는 그 위에 화분을 낚아챘고, 두 개의 사물이 갑자기 허공에 붕 떠서 엇갈리며 두 사람이 엉켰어. 남자는 허부적대는 주인을 밀치고 밖으로 튀었지. 품안에서 화분은 놓지 않았어.


아악!


주인 여자가 내지르는 비명을 뒤로하고 남자는 찬바람 속을 달렸어. 빨간 열매가 뛰는 남자의 뺨을 간질였지. 덜 여문 열매와 이파리 냄새가 푸릇 비릿한 돈 냄새랑 비슷했어.


남자는 뒤에 아무도 쫓아오지 않는 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호주머니를 확인했어.


80500원이었어!


믿을 수 없었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었지. 남자는 당장 마트에 갔어. 훔친 화분을 들고 다니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손에서 놓을 수는 없었어. 다행히 돈 도둑도 아니고 화분 도둑을 죽자고 쫓아오는 사람은 없었지. 편의점에서 담배 한 갑을 훔치려다가 사람이 죽어나가는 세상이니까.


남자는 80500원으로 아까 계산대에 두고 나온 물건을 전부 사고, 20000원을 1000원 짜리로 바꿨어.

20000원으로 둔갑한 2000원을 내미는 남자의 손이 잠깐 떨렸지만 아무 이상 없었어. 계산대의 점원은 시간이 지나 바뀌어 있어서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도 없었지.


남자는 전철역 화장실로 들어갈 때까지 주머니에 넣은 돈을 한 번도 꺼내보지 않았어. 계속 쳐다보고 있으면 변하지 않을 것 같았거든. 눈 속일 시간이 필요한 마술처럼.


화장실 제일 구석 칸에 들어가 화분을 변기 뚜껑에 얹고, 남자는 잠깐 손이 허전했지만 금방 잊었어. 주머니에 두둑한 천 원짜리의 변신에 완전히 정신이 팔려 있었거든. 원래 가진게 없었는데 새삼 허전할 게 뭐람.

빽빽한 지폐뭉치를 급하게 빼내다가 낡은 바지 주머니가 두어 땀 뜯어졌어. 한 벌 밖에 없는 바지지만 남자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어. 왜냐면 지금 남자의 손에는 20만원이 있었거든! 남자는 새 바지를 사는 것 보다 먼저 이 돈을 어떻게 다시 1000원 짜리로 바꿀지 고민했지. 하지만 남루한 옷차림에 20만원을 몽땅 1000원짜리로 바꿔줄 곳은 없었어.


노숙자가 되기 전에 남자는 모토로라 핸드폰을 만드는 파주 공장에 다녔어. 세 글자로는 공돌이지만 외국계 회사인지라 국내외 공휴일은 반드시 놀았고, 노는 날 출근하면 수당이 두 배 였지. 야근 수당은 1.5배, 3교대 중에서 한 타임만 뛰어도 월급이 150인데 두 타임 쯤 뛰어주고 휴일 두 번 반납하면 한 달 추가수당이 월급만큼 묵직했어.

같은 직장에서 만난 아내도 아기가 생길 때까지는 일했기 때문에 둘이 모은 돈은 꽤 됐어. 결혼할 때도 둘이 커플링으로 쓰던 실반지를 계속 끼고 혼수도 남자의 자취방에 여자가 친정에서 쓰던 살림을 들고 와서 청소기랑 냉장고 세탁기 외엔 살 것도 없었지. 집이 좁아 티비 놓을 자리도 없는 게 혼수비용을 아끼는데 일조를 했어. 둘 다 지독스러울 정도로 알뜰했던 거야.


그 아파트만 사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텐데.


처음부터 욕심을 부린 건 아니야. 시작은 보광동에 작고 오래된 다세대 주택을 산 거였어. 회사로 가는 직행 버스가 통하는 중에 가장 집값이 쌌거든.


두 층은 세를 놓고 꼭대기 층에 세 식구가 살 예정이었지. 그런데 덜컥,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이 된거야. 딱지 값만 한 층당 처음 집 살 때 값이 되었지. 남자는 눈이 뒤집혔지. 어떻게 안 그러겠어? 20년을 개미처럼 일해야 모을 수 있는 돈이 한 번에 들어왔는데.


두 층은 딱지를 팔고 한 층 딱지는 뒀다가 재개발 된 아파트를 분양 받아서 두 층 판 돈을 보태 큰 평수로 이사를 가면 딱이었어. 새 아파트에 들어가려면 준공비를 내야 하는데, 그건 딱지 값의 서너 배였거든.


그런데 부동산 맛을 들인 아내가 살살 부추겼지.


딱지 판 돈으로 용산에 아파트를 사요.


우리가 어떻게 아파트를 사? 다음에 새집 들어갈 돈도 모자른데.


아이참, 당신도 머리가 안 돌아가. 우선, 곧 지어질 아파트의 분양권만 사는 거예요. 분양 아파트를 사는 게 다 지은 아파트를 사는 거보다 싸잖아요?


분양권 대금은 그렇다 치고, 중도금은?


그거야 좀 미루고 이자 물면 되죠. 그리고 아파트를 다 지으면 그걸 담보로 중도금을 낼 수도 있대요. 그럼 그 아파트는 우리 게 되는거죠.


그건 다 빚이잖아.


우리 나라에 빚 없는 부자가 어디 있어요? 분양가 보다 분명히 오를 거고, 몫이 좋으면 권리금만 1억이래요. 그럼 팔고 빚을 값아도 1억이 떨어지잖아요.


아내의 계산은 꽤 그럴싸 했어.


하지만 빚을 내긴 싫은데.


아이참 당신도. 요즘 세상에 언제까지 회사에 다닐 줄 알아요? 마흔 다섯이면 정년이라는데 애 초등학교 다닐 때 우리가 당장 쥔 게 아무것도 없어 봐요. 그리고 부모님도 연로하신데 어디 편찮아지시기라도 하면, 우리가 힘써야 하잖아요.


틀린 말이 아니었지.


둘은 딱지 판 돈으로 분양권을 사고, 중도금을 미루다가 아파트가 준공 되자 마자 담보를 잡고 중도금을 치렀어. 아내 말대로 분양가가 2억 5천이던 아파트는 순식간에 3억 5천으로 뛰었지. 남자는 도저히 그 돈 계산이 이해가 가지 않았어. 2억 5천에 샀으면, 낡아 부서질 때까지 2억 5천인거 아닌가? 권리금은 뭐고 시가는 뭐고 공시가는 또 다 뭔지. 그러는 사이 아파트는 4억이 되었어. 이번엔 남자가 좋은 생각이 들었지.


아파트 값이 올라서 담보 대출액도 올랐으니까, 그걸로 한번 더 해보면 어때? 은평구에 소문이 있던데.


어머, 역시 내 남편은 똑똑하다니깐.


부부는 그런 식으로 두 껀을 더 올리고 나자 간이 커졌어. 통장의 빚은 눈덩이처럼 커졌지만, 아파트 시세에 비하면 별거 아니었어.


월세만으로도 대출이자를 내고 남아서 생활까지 가능해지자 남자는 임대사업자 허가를 내고 집에 편히 앉아서 주식을 시작했지. 아내는 사촌 언니를 따라 중국 펀드를 들었어. 펀드는 1년 동안 30%가 올랐지. 이렇게까지 운이 트일 수가 있을까? 남자와 아내는 매일 매일이 꿈만 같았어. 그리고 꿈이 아니란 걸 금방 깨달았지. 전에는 통장에 1억이 있어도 콩나물 값을 깎았는데, 지금은 빚 투성이라도 장어를 먹으러 갈 수 있었어. 세 채 가진 아파트 한 채당 1억씩만 올라도 남는 장사잖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저 시간이 가는 걸 기다리기만 하면.


마지막 히트는 삼성동 아파트였어. 강북도 1, 2억씩 오르는 판에 강남 아파트가 5, 6억 오르는 건 껌이었지. 잘만 되면 10억도 단번에 뛸 수 있었어. 남자와 아내는 열심히 궁리해서 가지고 있는 모든 담보대출을 끌어 모아 강남 아파트 분양권을 샀지.


떡이 커야지 고물도 많지. 어차피 우리가 떡을 먹을 건 아니니까.


남자가 말했어.


이제 남은 건 기다리고 기다리는 일이었지. 놀면서.


하지만 행운이란 건 절대량이 있는 걸까? 석탄을 캐 쓰면 고갈되듯이 빨리 쓰면 쓴 만큼 닳아 없어지는 걸까? 강남의 아파트는 다 짓기도 전에 폭락했어. 때를 같이 해서 강북의 아파트 값도 거품이 팍 꺼졌지. 13억의 이윤을 가져다 줄줄 알았던 아파트들은 최고 3억에서 최하 7000만원씩 떨어져서 팔수록 빚이었어. 회사원이 평생 일해도 살수 없다는 가격 그대로 평생을 일해도 절대 값을 수 없는 빚 말이야. 대출 이자는 턱없이 올라갔지. 모두 남자가 예상했던 정반대였어. 그즈음 잘나가던 아내의 중국펀드도 반 토막을 쳤지. 국가 원수가 보장했던 그 펀드 있잖아.


남자는 변기에 걸터 앉아 마트에서 산 담배를 빼물었어.


아내가 언제부터 바람이 났던 걸까? 정말 바람이 났던 거긴 할까? 남자는 집 나간 아내를 생각했어. 어쩌면 그냥 사라져 버린 게 아닐까? 빨간 딱지가 아내의 0.5캐럿짜리 결혼 반지와 혼수로 가져온 은수저 한 벌까지 가져간 날, 아내도 빨간딱지가 붙여져서 가져가져가 버린 게 아닐까. 빨간 딱지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간 걸까? 통장에 찍히기는 커녕 만져 보지도 못한 그 많은 돈들은 어디서 와서 다 어디로 간 걸까? 남자의 호주머니에 거짓말 같은 10000원 짜리들은 다 어디서 온 걸까?


남자는 길게 마지막 연기를 뿜었어. 그런 걸 알 기회는 영영 없겠지만 별로 상관 없었어. 호주머니 속에는 분명히 10000원짜리가 있었으니까.


구멍 난 구두에 불꽃이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해서 꽁초를 비벼 끈 남자는 먼저 편의점에 들어가서 담배 한갑을 사고 8000원을 받았어. 1900원짜리 88과 2000원짜리 디스 사이에서 잠깐 갈등이 일었지만 100원이 1000원짜리로 바뀌지 않는 바에야 무의미하다는 걸 깨닫고 좀 더 자신을 위하기로 했지.


이거 1000원짜리 스무 장으로 바꿔주쇼.


종업원은 낡은 그의 옷차림을 흘끗 보았어.


잔돈이 부족해서요. 1000원 하고 5000원짜리 두 장으로 바꿔드릴게요.


남자는 눈짓으로 돈 통을 넘겨다봤지만 종업원의 튀어나온 배에 가려 보이지 않았어. 어차피 진짜는 1000원이니까 5000원짜리 두 장이 더 나을 것임에 분명한데도, 남자에게는 너무 손해 같았어. 주식 시장에서 곧 상한가를 칠 싼 종목을 중간가에 파는 기분이었지.


그럼 10000원만 1000원짜리로.


네.


나중에 돈이 빈걸 알고 점원이 쫒아오면 어쩌지라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지만, 남자를 의심할 수는 없을거야. 돈에는 얼굴이 없으니까. 남자는 흘끗 계산대 옆의 CCTV를 봤어. 흐릿하지만 분명 10000원짜리로 보였어.


남자는 비디오 대여점과 편의점과 김밥 가게에서도 잔돈을 바꿨어. 주머니에 10000원짜리가 계속 불어났지. 비디오 가게는 잔 손님이 많으니까 항상 잔돈이 많았고 김밥 가게도 마찬가지였어. 옛날이라면 오락실에 가는 편이 쉬웠겠지만 요즘 어디 그런 게 있어야지. pc방 생각은 안했냐고? 남자는 pc방에 안 다닌 세대였거든.


한 팔엔 만냥금을, 다른 손엔 묵직한 바지 주머니를 거꾸로 싸안듯이 하고 가는데 뻥튀기가 보였어. 구수하고 달콤한 냄새에 입에 침이 고였지. 칼국수로 허기야 면했지만 배가 부르진 않잖아.


뻥튀기 장수는 남자보다 늙었지만 옷은 깨끗했어. 하지만 남자는 호주머니에 40만원이 넘는 돈이 있었고 뻥튀기 장수의 주머니는 얄팍해 보였지.


옥수수 튀긴 거 한 개 얼마요?


2000원이요.


이것도 같이 주쇼.


남자는 옆에 떡 튀긴 봉지도 하나 더 들었어.


아이고 감사합니다.


뻥튀기 장수는 기분 좋게 1000원짜리 여섯 장을 거슬러 주었어. 불황에 간식거리마저 바싹 줄인 메마른 사람들 속에서 바싹 마른 주름만 늘어가던 늙은 얼굴이 잠깐 펴졌지. 기분이 좋아진 남자는 으쓱대면서 10000원짜리 하나를 내밀고 4000원 어치를 더 샀어. 뻥튀기 장수는 연신 고맙습니다를 연발하며 가제나 굽은 허리를 불안스럽게 더 굽혔어.


거 1000원 짜리로 좀 주시지.


뻥튀기 장수가 잔돈을 세주는 걸 보며 남자가 말했어.


잔돈이 별로 없어서요.


그래도. 내 필요해서 그러니. 있는 데로 주쇼. 어차피 같은 돈인데.


남자에겐 다른 돈이라는 걸 뻥튀기 장수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지.


이예, 그럽시다. 고맙습니다.


뻥튀기 장수는 아무런 의심 없이 1000원짜리를 세어 주었어. 초록 돈이 늘었지만 돈뭉치는 한층 더 얇아 보였지.


이거 하나 더 가져가십쇼.


남자는 덤으로 주는 산자는 받을 손이 없어서 거절했어.


괜찮습니다. 들기가 힘들어서요. 많이 파십쇼.


네에, 안녕히 가십쇼.


뒤에서 뻥 하고 강냉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어.


남자는 어렸을 적에 뻥튀기 기계 안에 100원을 넣어 본 적이 있어. 1000원짜리로 뻥 튀겨지나 궁금해서. 하지만 뻥튀기 장수에게 호되게 얻어맞기만 했지. 100원짜리는 뜨거워 졌을 뿐 여전히 100원짜리였어.





남자는 그날 밤엔 뜨거운 찜질방에서 씻고 잤어. 입구에서 더러운 남자를 내치려는 눈이 있었지만 남자가 10000원 짜리 뭉텅이에서 목욕비를 내자 두 번 쳐다보지 않았지.


목욕탕이건 탈이실이건 수면실이건 남자는 화분은 꼭 안고 다녔어. 사람들 눈에 이상하게 보였을 테지만 간섭하는 사람은 없었어. 서울은 그런 곳이잖아. 개인의 취향과 다양성이 존중 받는 곳. 세련된 무관심과 시크함 속에 관심과 간섭은 낡고 오래되고 촌스러운 곳.


찜질방 벽에는 할인 판매하는 등산복이 걸려 있었어. 남자는 마음에 드는 걸로 골랐어. 가능하면 21000원이나 51000원처럼 1000원짜리가 많이 떨어지는 걸로. 자장면과 탕수육도 주문해 먹었어. 탕짜면 셋트에 11000원이었지. 20000원을 내자 5000원과 1000원짜리 넉 장을 주길래 남자는 버럭 화를 냈어.


거 내가 1000원짜리로 갖다달라고 미리 말해놨잖소!


네. 근데 저희도 부족해서요.


이런 니미, 손님이 왕인데 장사 그만하고 싶나.


남자가 쌍욕을 했지만 배달원이 가진 잔돈은 5000원을 1000원짜리로 줄 만큼이 안 되었어. 남자는 투덜대며 자장면 앞에 앉았어. 푸짐한 탕수육을 보고 뭔가 잃어버린 것 같은 허전함에 옆을 더듬는데 만냥금이 만져졌지. 잃어 버린건 아무 것도 없었어. 남자는 배가 터지도록 음식을 먹고 지쳐서 잠들었어. 수면실의 붉은 등속에 만냥금 이파리는 검어 보였지.


깨끗이 씻고 새 옷을 입고 두둑한 주머니를 만지며 화분을 안아들자 세상에 더 부러울 게 없는 남자는 지하철 역에 들어가면서 공짜 무가지를 집지 않고 600원짜리 신문을 사들고 -당연히 만원을 내고! 지하철을 탔어. 어디로 가야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디든 좋았어. 잔돈을 잘 바꿔 줄 만큼 자질구레한 가게들만 있다면. 남자는 어디에 그런 곳이 있을까 생각을 하면서 신문을 펼쳤어. 기사는 언제나처럼 별거 없었어.


- 음식점에 강도! 현금 6만원에 주인 생사 불명.

- 마트에 진열된 라이터에서 발화, 계산원 1명 사망 약 500만원의 피해를 입히고 진화. 경찰 제조 불량 조사.

- 뻥튀기 노인 오토바이치기에게 28000원 든 현금 복대를 낚이고 15분간 도로에 끌려다녀,

전치 16주에 어깨뼈 탈골, 손목 인대는 끊어져. 병원비만 600만원.

오늘 뗄 연탄 한 장도 없는데... 손자에게 너무 미안해요.


- 11세 남아, 노숙자에게 떠밀려 선로에 추락.......

- 편의점 날치기. CCTV에 찍힌 이주 노동자......


남자는 혀를 찼어. 누군가는 공짜로 돈을 팍팍 버는데, 누군가는 앉아서 날리고 있으니 참 불공평하지, 아니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공평한 걸까? 어차피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잖아.


어떤 미친놈이 불쌍한 뻥튀기 장수의 복대를 낚을 생각을 한 걸까. 들어봤자 얼마나 들었다고 사람을 다치게 해? 그러다 잡히면 빵에 갈 텐데. 아무 생각도 없구만. 남자는 기사의 굵은 글씨만 읽고 훌훌 넘기고는 생각에 잠겼어. 언제까지 1000원짜리를 바꾸고 살 수는 없었어. 은행에서야 잔뜩 바꿔주겠지만, 그건 내키지 않았어. 만약이라는 게 있잖아? 지금까지는 아무 일도 없었고, 1, 2만원의 푼돈이야 계산 착오나 잃어버린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누군가 만냥금의 힘을 알고 쫒아온다면?


남자는 떠올리기도 싫은 생각을 서둘러 뇌 주름 구석으로 꾹꾹 처박았어. 좀 더 생산적인 생각을 하자, 뭘 해야 할까? 취직? 언제 짤릴지 모르는 곳에 새벽 6시에 출근해서 야근 수당도 못 받고 새벽 한시에 퇴근하는 생활은 하고 싶지 않아. 목돈을 만들어 부동산을 사? 아파트는 실패했지만, 땅이야 묵혀 두면 언젠가는 오르는 거니까. 아냐 그보다는 당장 지금 살 집을 사야겠다.


이 생각은 1주일 쯤 여관을 전전한 후에 들었어. 여관 전전은 노숙보다 아주 조금 나았어. 매일 밤 얇은 벽 너머에서 들리는 소리들이 예민한 신경을 거슬렀거든.


삐걱 삐걱 끼기긱


낡아빠진 침대의 스프링 소리는 어느새 바닥에 질질 끌리는 오토바이 바퀴 소리로 변했지. 오토바이는 몸체가 없고 바퀴지지대가 자전거처럼 얄팍했는데 바퀴는 대형 트럭만큼 컸어. 그 밑에 뻥튀기 노인의 옷자락이 깔려 있었고 사방에 피가 난무했지. 빨간 핏방울이 이쪽까지 통통 튀어 와서 가만히 보니까 만냥금의 열매였어. 남자는 얼른 집어 입에 넣었지. 지하철역 앞 쓰레기 통을 뒤져 얻은 샌드위치 쪼가리처럼 지독한 맛이 났지만 뱉을 수는 없었어. 따끈한 칼국수 국물로 입가심을 한다면 더부룩한 속이 좀 가라 앉을 거 같은데 칼국수 집을 찾을 수가 없어서 골목을 뱅뱅 맴돌다가 잠에서 깼지.


위와 양옆 삼면으로 침대 삐걱 대는 소리가 한꺼번에 들리고 있었어. 남자는 귀를 막고 웅크린 채 스멀스멀 다가오는 까만 어둠을 노려 보다가 여관 밖으로 뛰쳐나갈 수 밖에 없었어. 차가운 바람이 남자와 자식처럼 소중히 감싸 안은 만냥금과 현금으로 묵직한 가방을 사정없이 흔들었지. 한밤중의 추위 보다도 만냥금이 얼어죽을까봐 남자는 다시 여관으로 들어갔어. 추위에 쪼그라든 열매가 톡, 톡, 발자국 뒤로 굴러갔지. 남자가 혀를 차며 열매를 주워들자 안고 있던 나무에서 우수수, 마른 열매가 떨어졌고, 남자는 황급히 화분을 내려 놓고 열매를 주웠어. 그리고 로비 안쪽 대기 의자에 쪼그리고 누워서 빈 계산대의 벨을 보며 밤을 샜어.




왜 그 동네로 다시 가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어. 화분을 훔친 게 캥기긴 했지만, 주인이 만냥금의 이상한 힘을 알았더라면 그냥 계산대에 놔뒀을까하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렇다는 건, 이 식물과 남자의 궁합이 우주적으로 절묘하게 맞아서 이런 행운이 발생하는 게 틀림없었어. 행운은 그런 거니까. 100억 짜리 로또와 별 이름 없는 주식이 치는 상한가처럼 어처구니 없는 것이어야만 하니까. 그렇지 않으면, 행운이란 얼마나 초라하겠어.


지하철을 나오자 역 바로 앞에 낯익은 뻥튀기 트럭이 있었어. 남자는 넓적하고 얇게 튀긴 뻥튀기 한 봉지를 샀어. 주인이 퍽 젊어 보였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 새 바뀌었나? 뻥튀기 장사도 경쟁이 심하네.


골목을 돌아가는데 대패로 민 것처럼 징그러운 얼굴에 팔에 깁스를 한 늙은 노숙자가 보였어. 남자는 괜히 기분이 찜찜해졌어. 왜 그런 기분이 든 건지 알지 못한 채 노숙자의 돈 통 앞에 만원짜리 지폐를 넣은 남자는 서둘러 자리를 떴지. 1000원짜리는 없었거든.


고맙습니다.


몸을 한참 주억거리는 그 자세가 낯이 익었어. 전에 알던 노숙자인가? 남자는 걸으면서 뻥튀기를 한입 물었어. 바삭하는 소리가 날카롭게 기억을 되살렸지. 예전의 뻥튀기 장사였어. 어쩌다 저 꼴이 됐지, 그 잠깐 사이에?


남자가 뒤돌아보자 노인도 이쪽을 보았어. 뭉개진 얼굴 반쪽에서 눈동자가 뒤틀린 회색 늪의 아득한 구멍처럼 보였어. 구멍이 점점 크고 깊어져서 주위를 빨아들이려는 순간 남자는 깜짝 놀라 얼른 옆 편의점으로 피했어. 그리고 문 안에 서서 노인의 시선이 거두어질 때까지 기다렸지.


손님, 뭐 찾으세요?


점원의 목소리가 남자를 퍼뜩 깨웠어. 남자는 얼른 담배 한 갑을 샀어. 2500원짜리 레종이 맛있었지만 습관처럼 2000원짜리 디스를 샀지. 잔돈을 받아 주머니에 챙기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돈뭉치에 유난히 파란색이 짙어 보인 거야. 남자는 편의점을 나오자마자 허겁지겁 돈을 펼쳤지. 천원짜리가 반, 만원 짜리가 반이었어. 이게 어떻게 된거지? 방금 받은 8000원보다도 1000원 짜리가 많았어, 한 스무장쯤?


남자는 품에 고이 안은 만냥금을 보았어. 물 한모금 못 먹고 끌려다니기만 한 나무는 어느새 조금씩 시들어 가고 있었어. 쪼골쪼골 까매진 열매가 눈속에 박힌 것처럼 남자는 앞이 캄캄해졌지.


놀이터의 간이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남자는 돈가방을 열었어. 저금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진 돈이 몽땅 1000원짜리로 변하면 그야말로 낭패였지. 아직은 파란색이 덜 보여서 남자는 서둘러 은행에 달려가 자동 입출금기에 돈을 넣었어. 텅빈 통장이지만 카드를 죽이지 않은 걸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웬걸, 기계는 속지 않는거야. 남자는 너무 놀라서 기계가 도로 뱉은 돈을 들고 얼른 은행을 나왔어. 은행원에게 직접 건넸다면 괜찮았을지도 몰라. 지폐계수기는 어차피 숫자만 알려주니까. 하지만 돈을 세서 띠지에 엮고 띠지마다 도장을 찍는 꼼꼼한 은행원이라면 나중에 이상한 돈을 발견하고 그를 기억할 것만 같았지. 그걸 감수하고라도 은행에 넣었어야 했을까? 찰나에 수많은 고민이 오갔지만 결국 남자는 돈을 입금하지 못했어. 대신 근방에 꽃가게로 뛰어갔지. 주인은 예쁘장하고 키가 큰 청년이었어.


저, 저기요. 이 꽃 좀 살려 주세요.


예?


남자는 다짜고짜 만냥금 화분을 청년의 손에 내려 놓았어.


이거, 어떻게 하면 살아 납니까?


자금우로군요, 아직 열매가 떨어질 때가 안됐는데. 관리를 잘 못 하셨나봐요.


아, 그러니까 여기 들어왔지. 얼마면 되겠소?


글쎄요, 지금 상태로는 두 주에서 한 달쯤?


아니, 살리는데 얼마나 드느냐고.


돈보다는 시간입니다. 생명이니까요. 한 달 뒤에야 확실히 죽을지 살지 알 수 있어요.


뭐 그렇게 오래 걸려? 당장 살려주쇼. 뭐, 비싼 영양제나 약같은 거 있을 거 아뇨? 돈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정말로 얼마든지 있으세요?


청년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어. 왠지 뭐든지 알고 있다는, 사람을 꿰뚫는 듯 한 시선이었지. 남자는 갑자기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 들었어.


젊은 놈이 싸가지 없게 어른을 꼬려봐.


남자는 화를 벌컥 내고 청년의 손에서 화분을 빼앗아 가게를 나왔어.


가진 돈 만으로 얼른 집을 사야겠다. 부족하면 전세라도. 아냐, 그건 너무 위험해, 돈이 다시 1000원짜리로 바뀌면 주인은 분명히 의심할텐데. 남자의 입술이 바싹 타들어갔어. 만냥금이 없으면 어쩌지? 지금 갖고 있는 1000원짜리로 얼마나 1000원짜리를 바꿔 모을 수 있을까? 바꾼 돈이 10000원짜리로 안 변하면 어쩌지. 1000원짜리라도 많기만 하면 되는거 아닌가? 아니야! 1000원짜리가 1000장이면 800만원이지만 10000원짜리는 8000만원이라고!


남자는 다시 꽃집으로 갔어.


한 달이면 되겠소?


글쎄요.


청년은 살짝 시선을 내리깐 채 대답했어. 생각을 짐작할 수 없는 표정이었지.


영양제 듬뿍 주쇼.


남자는 5만원을 내밀었어. 청년은 받지 않았어.


나중에 꽃이 살면 주세요.


남자는 차마 죽으면, 이라고 물을 수 없었어. 화분을 맞기고 돌아서자 한쪽 팔이 허전했어. 화분을 내려놨다고 허전하다니 웃기잖아. 남자가 씁쓸해하는데, 이전에도 여기 매달려 있던 조그만 것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어. 뭐더라? 기억을 더듬던 남자의 뇌리에 아이가 떠올랐어. 맙소사! 아들이 있었지. 애가 어디갔지?


남자는 갑자기 정신이 까무룩 해져서 길바닥에 주저 앉았어. 만냥금을 얻을 뒤로 며칠이 지났더라? 새로 산 두꺼운 패딩 점퍼 속으로 찬바람이 매섭게 쳐들었어. 이 바람 속에 그 어린 것은 지금 혼자 어디에 있을까?

지나가는 사람들이 길 한가운데 주저 앉은 남자를 흘끔 거렸어. 그 중에 아들 소식을 물어볼만한 얼굴은 하나도 없었어. 남자는 허적허적 아들과 마지막으로 갔던 마트로 향했지.

마트 입구는 까맣게 탄 자리가 남아 있었고, 장사를 하는 거 같지도 않았어. 남자는 그제야 깨달았어. 우주에는 무엇이든 절대량이 있고, 그것이 움직이기만 할뿐 갑자기 없어지거나 갑자기 생기지는 않는다는 걸 말이야. 다이아몬드를 줍는 행운을 얻었다면, 그 다이아몬드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누군가 잃어버려 가슴 아파 하거나 아직 캐내지지 않은 다이아몬드가 손에 온 거라는 걸. 남자에게 생긴 돈도 그만큼의 질량이 사라져야 해서 돈 주인들이 강도를 당하거나 사고를 당하거나 불이 났던거야. 남자는 눈 앞이 어지러웠어.


아빠, 괜찮아요?


어느새 작고 깨끗한 운동화가 남자 앞에 서 있었어. 남자는 눈을 들었어. 아들의 그림자가 이지러지는 햇살을 등지고 어른 거렸어. 세상이 온통 새빨겠어. 꿈속의 피처럼, 만냥금 열매처럼.


진수야?


남자는 그림자의 팔을 잡았어. 아들은 남자의 손아귀에서 바스라졌어. 바람이 차가왔어.


봄이 올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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