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솟아나는 나무
수염이 나다 말고 들러붙어 꼬질꼬질한 면상의 남자와 추레한 옷을 입은 아들이 칼국수 가게 문을 열었어. 바쁜 저녁 시간대라서 주인은 제대로 쳐다 보지도 않았지. 어쩌면 아이 때문에 눈감아 줬을 지도 몰라.
둘은 화장실 옆에 아무도 앉지 않는 외진 자리를 차지하고 가게 안을 둘러 보았어. 벽지는 누르게 바랬지만 상은 끈적기 없이 말끔했고, 좁은 자리마다 안고 뜨는 손님으로 분주했지. 따끈따끈한 온돌 바닥이 새삼 뼛속까지 밴 한기를 깨우쳐서 남자는 부르르 떨었어. 아들은 빽빽한 사람들 사이로 오가는 쟁반들과 상에 놓인 음식들을 삐죽거리며 훔쳐 보았지. 뜨거운 김이 안개처럼 펑펑 쏟아지는 커다란 칼국수 그릇, 기름이 자글자글 끓는 커다란 해물파전 접시에 넘치게 튀어나온 오징어 다리, 군침이 도는 새알동동 팥옹심에 둘은 눈이 빙빙 돌았어.
벽에 붙은 메뉴판엔 칼국수 4500원, 만두(국) 5000원, 팥죽(면, 옹심이) 5000원, 해물파전 10000원, 동동주 6000원, 이렇게가 다였어. 간단한 글자들이 현란해 질 수 있다는 걸 남자는 그때 처음 알았어. 복잡한 주식시장의 전광판과 컴퓨터 프로그램의 주식화면에 익숙해져 있던 남자의 눈은 단순명료하고 실질적인 굶주림과 맞닿은 글자들이 어지럽다며 몸부림쳤지. 그건 남자 뱃속이 요동이기도 했어.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은게 언제인지 잘 기억이 안나.
흠흠, 뭐야, 어디서 오징어 굽나? 아줌마, 오징어 구워요?
누군가 묻자 서빙하는 연변 여자가 냉큼 대답했어.
아니오.
남자는 슬그머니 양말의 구멍을 발가락 틈으로 쑤셔 넣고 긴 외투로 덮었어. 맞은 편의 아들은 새빨개진 얼굴로 상만 보았지.
남자는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주머니 속에서 때에 쩐 지폐를 세었어. 몇 번을 세어도 얄팍한 넉장이었지. 2006년에 발행된 신권은 크기가 작아져서 얄팍해진 주머니 만큼 마음도 얄팍하게 했어. 그 기분대로 위장도 얄팍해 지면 좋으련만. 남자는 연신 주머니 속을 세었지만 넉장이 다섯 장으로 늘어나지는 않았어.
아빠.
한참 있다가 아들이 불렀어.
우리 뭐 먹어요?
뭐든 다 먹고 싶지만 아무것도 고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아들의 목소리는 100원을 쥐고 붕어빵 장사 앞에 서 있을 때처럼 떨렸어. 천원에 세 개 짜리 붕어빵을 결국 한 개도 살 수 없었던 그때처럼 말이야.
뭘 드실래요.
연변 여자가 느릿하게 볼펜과 주문서를 들고 왔어. 배가 고픈 남자는 굼뜬 여자에게 화가 났지만 따뜻한 구들장에 조금이라도 더 오래 엉덩이를 붙일 수 있어서 다행스럽게 여겨지기도 했어. 하지만 결단의 시간이 다가왔지.
저거, 2인분 입니까?
연변 여자는 남자가 가리키는 옆상을 흘끗 쳐다봤어. 대야만큼 커다란 칼국수 그릇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어.
1인분이요.
아이구 많네요. 칼국수 1인분만 주세요.
남자는 더 고민할 것도 없이 그걸 시켰어.
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그게 1인분인 걸. 오랫동안 주변을 배회하면 사전 조사를 했는데 몰랐을 리가. 하지만 지금은 몰랐던 척 하고 싶었지.
둘인데 하나만 시켰다고 할까 봐 조마조마하게 눈치를 살피는데 연변사투리가 남아 있는 여자는 어린 아들 쪽을 흘끗 보고
칼국수 하나요.
라고 주방을 향해 말했어. 그리고 두 사람 앞에 보리밥 그릇 두 개와 열무 김치를 놓고 갔어. 보리밥 열무 비빔은 음식이 몇 그릇이건 사람 수 만큼 넉넉히 내주는 가게 주인만의 특별 에피타이저였지. 남자와 아들은 그릇에 담긴 보리밥에 열무와 고추장을 가득 비벼서 게눈 감추듯 먹었어. 입안이 얼얼하고 달달한데도 아들은 남은 김치를 밥도 없이 다 먹어버렸지.
남자는 배고픈 눈이 아들의 젓가락질을 따라다니지 않도록 옆 상을 쳐다 보았어. 옆 상에는 계모임이라도 하는지 얼룩덜룩한 옷에 울긋불긋한 보석을 단 아줌마들이 게걸스럽게 음식을 입에 떠넣고 있었어. 새알심이 담긴 숟가락을 쥔 손톱에 바른 빨간 매니큐어, 주름이 자글자글한 입술에 지워져가는 주홍색 립스틱 사이로 꿀럭꿀럭 넘어가는 칼국수 면발,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파전을 덥썩 덥썩 삼키는 번들대는 입들이 남자의 바싹 마른 굶주림을 이리저리 후려치고 밀쳐대서 질식할 것만 같았지.
음식의 홍수에 기절하기 직전에 구사 일생으로 칼국수가 나왔어.
이런 그릇은 대체 어디서 살까요?
아들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는 큰 젓가락으로 후루룩 면발을 삼키고 있었어. 아들도 대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뜨거운 칼국수에 연신 입술을 데이면서도 훌훌 뱃속에 넣었어. 보통 어른 둘이 나눠 먹으면 적당할 칼국수 한 그릇은 오래 굶은 어른과 한창 크는 아이에겐 혼자 차지해도 부족한 양이었지. 둘은 가능한 한 천천히 먹으려고 김치도 더 달래고 미역 냉국도 더 달랬지만 먹는 속도를 늦출 수는 없었어.
남자가 마지막 남은 김치 한 점을 쭉 찟어 아들과 나눠 물고 옆 테이블을 건너 봤을 때, 어느새 아줌마 부대는 사라지고 아가씨 둘이 마주 앉아 칼국수 한 그릇과 만두 한 접시를 사이 좋게 나눠 먹고 있었지. 따끈따끈 군침도는 고기 냄새가 이쪽까지 흘러왔어. 칼국수 반 그릇은 배를 채우기는 커녕 졸고 있던 위장을 깨워 오랜 굶주림을 더 강하게 했어. 매서운 바람 속보다 뜨거운 구들장이 뼛속 시려웠던 것처럼.
아줌마, 거, 보리밥 한 그릇 더 줄 수 있소?
남자는 얼굴을 붉히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말했어.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을 창피해하면 정말로 창피해지거든.
연변 여자는 주방 안쪽에 보리밥 하나요, 하고 빈 김치 그릇에 깍두기를 담아 주었어. 아들의 얼굴이 환해졌지. 주방과 좌석 사이에 계산대에 서 있던 주인 여자는 흘끗 이쪽을 보고 살짝 미간을 찡그렸지만 보리밥을 쟁반에 얹어 주었어.
아빠, 돈 더 내래면 어떡해?
남자는 목을 세웠어.
어험. 괜찮아. 아빠가 다 알아서 해.
다 잃었어도 아버지라는 자존심만 남은 남자의 목소리는 엄격했어.
우린 사천원 밖에 없잖아요.
알아서 한다니깐!
보리밥이 담긴 쟁반을 들고 온 연변 여자 때문에 남자는 얼른 목소리를 낮췄어. 칼국수 값이 4500원이고 주머니엔 4000원 뿐인데 보리밥 한 그릇 값을 못내는 망신 쯤이야 문제겠어. 그래도 양심은 남자가 모르는 어딘가에 남아 있었던지 보리밥 그릇의 바닥까지 깨끗이 핥고 나서도 한참 자리에서 엉덩이가 떨어지지 않았지. 뜨거운 칼국수를 호호 불고 덥썩 삼키다 데인 입술과 입안과 목구멍으로 막상 500원을 깍아달라는 말을 꺼내려니 용기가 안나서.
사람이 많을 때 말하는 게 좋을까? 적을 때 말하는 게 덜 창피할까? 주머니 속의 4000원과 덜 찬 뱃속이 너무 가벼워서 남자는 착잡했어. 그 동안 계산대에는 사람들이 속속 지나갔어. 계산대에서 나는 딸랑 드르륵 금고소리, 지폐가 사각이고 동전이 딸각이는 움직임, 목소리, 몸짓 하나하나가 가시처럼 남자를 찔렀지.
어머, 아줌마 이거 금방 만냥금 되겠어요.
아까 만두와 칼국수를 나눠먹은 여자들이 계산대 앞에서 말했어.
봐봐, 이게 내가 말한 천냥금이야, 열매가 예쁘지? 이게 오래 묵어서 더 빨개지면 만냥금이 되는거고... 이제 곧 만냥금이네.
무슨 나무에 돈 이름이 붙었대?
이게 있으면 돈이 많이 들어온대. 그래서 가게마다 계산대에 놔둔다더라.
여자들이 나가자 찬바람이 빈 손님처럼 가게 안으로 쳐들어 왔어. 저녁 시간이 훨씬 지나서 더는 주문하는 사람도 계산할 사람이 없었지.
우리도 나가요.
아들이 남자의 옷을 잡아 당겼어. 밖은 들어올 때보다 바람이 더 불었어. 주인 여자가 계산대에서 부자를 기다리고 있었어. 천년을 거기 서 있던 것처럼, 만년은 거기 서 있을 것처럼 반쯤 열린 금고 서랍을 쥐고 말이야. 남자는 한걸음씩만 걸었어. 하지만 한걸음이면 충분했지. 남자의 옷차림을 본 주인 여자의 눈꼬리가 기이하게 말려 올라갔어. 주머니 속의 4000원이 땀에 젖었지.
저... 500원만 깍아 주세요.
그 말이 어찌나 힘든지. 하기는 했는데 입 밖에 나가지 못한 거 같았어. 아니, 저쪽이 듣지 못한 걸까? 주인 여자는 그저 금고에 손을 얹고 기다리고만 있었지.
저어....
입이 바짝바짝 말랐어. 용기가 없어진 남자는 다음 사람부터 계산하라고 뒤를 보았지만 아무도 없었어. 긴장을 견디다 못한 아들이 아버지 주머니에 손을 쑥 집어 넣었어.
여기 돈이요.
하지만 그 돈은 4000원이었어. 주인 여자는 땀에 쩐 돈을 꺼려하면서 펼쳤어.
손님 돈이 모....
남자는 눈까지 달아올라서 사물이 뿌예 보였어. 아들 앞에서 500원으로 창피를 당하게 되다니! 애초에 4000원으로 뭘 사먹으려던 게 잘못이었어. 아냐, 4000원을 주워온 애새끼가 잘못이야. 4000원이 뭐야, 4000원이. 주울려면 10000원쯤 줍던가, 아니면 아예 말던가. 머릿속에 온갖 후회와 생각이 난무하는데 또르르, 빨간 열매가 돈 위에 떨어졌어. 그러자 돈은 순식간에 초록색으로 변했어. 남자는 눈을 의심했어. 주인 여자는 몇 번 눈을 껌벅였지.
아니, 남네요, 40000원을 내셨어요.
아들이 주워온 40000원을 4000원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걸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하지만 그 돈은 분명히 파란색이 아니라 초록색이었어. 주인 여자도 40000원이라고 석장을 돌려주고 거스름돈 5500백원을 주었잖아. 남자는 믿을 수 없어 하면서도 돈을 받아 나올 수밖에 없었어. 달리 어쩔 수 있었겠어?
가게를 나오자 마자 남자는 아들 팔을 잡아 끌고 모퉁이에 숨었어.
우와, 아빠 돈 많았잖아요?
아들은 기뻐서 소리를 질렀어. 남자도 같은 심정이었지만 아들처럼 꽥꽥 댈수는 없었어. 어른이고, 아빠잖아. 대신 남자의 한손은 내내 주머니 속의 두툼한 돈뭉치를 쥐고 있었어. 35500원이라니!
마트에 가자.
적은 돈으로 많은 음식을 사려면 역시 마트가 최고지. 남자는 어떻게 이런 돈이 생길 수 있는지에 관해서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어. 다만 기적같은 행운이 사라질까봐 초조했지. 아냐 기적이 아니야. 그냥 어두워서, 아니 너무 밝아서 40000원을 4000원으로 착각한 거야. 애초부터 40000원이었던 거지. 당연한 거 아니겠어? 어떻게 4000원이 40000원으로 변할 수 있느냐고.
마트는 겨울 저녁의 어둠 속에서 등대처럼 빛났어. 이름을 외우기는커녕 하나하나 읽는 데만도 한 달은 걸릴 것 같은 물건들이 매대 마다 높게 쌓여 있었지. 아들은 과자 코너로 달려가 올림푸스 가디언 딱지가 든 과자를 집어 왔어.
그건 안 돼. 낭비야.
한 개만요.
안 돼. 그런 건 다 불량 식품이라고. 배탈난다.
쓰레기통에서 나온 빵도 먹었는데 새삼 배탈 운운이라니 순 억지였지만, 주머니가 두둑해진 순간 남자는 정상적인 아버지가 된 것 같았고, 뭐든 기준에 어긋난 것, 해가 되는 것, 불필요하고 쓸모 없는 것에 관해서는 자식에게 엄하게 가르치는 아버지여야할 것 같았어. 정말로 배탈이 나는지 안 나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던 거지.
냄비를 사자. 라면을 실컷 끓여 먹을 수 있을거야.
불은요?
기다려 봐라. 아빠가 다 수를 낼테니.
남자는 아들에게 미처 생각 안 해봤다는 소리를 하기 싫어서 얼른 머리를 굴렸어.
아가씨, 거, 싼 버너 있나?
매대를 정리하는 점원은 다짜고짜 반말하는 그를 한번 노려보고 점원용 조끼를 퍽퍽 잡아 편 다음 퉁명스럽게 대답했어.
저쪽에 쌓인 거 보이시죠?
쌓여있는 버너는 1만원이었어. 다른 버너들이 2-5만원인걸 생각하면 엄청나게 싼 가격이었지.
이거 중국산 아니오?
렌지 코너의 남자 점원은 남자를 노골적으로 아래 위로 훑었어. 하지만 역시 교육받은 직원답게 할일에 충실했지.
손님, 이 물건은 원래 부탄가스 팩 셋트를 사시면 한정으로 끼워드린 사은품인데 본품이 품절 돼서 그냥 파는 거예요. 제품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고, 판촉용으로 저렴하게 나온 겁니다.
허, 그럼 저기 비싼 건 다 도둑이네.
황당한 표정의 직원을 뒤로 하고 남자는 큰 고객이라도 되는 냥 가스버너를 집어 장바구니에 턱 넣었어. 아들은 깜짝 놀랬어.
아빠, 그거 10000원이나 하는데요? 그건 먹을 것도 아니잖아요. 제 올림푸스 가디언은 1500원인데....
이거 하나면 라면을 얼마든지 끓여 먹을 수 있잖아? 저기 냄비도 하나 갖고 와라 3000원짜리 저거 말이야. 그리고 남은 돈으로는 너구리를 사자. 한 스물일곱 개 쯤 살 수 있을거야.
면발이 굵은 너구리는 부자의 선호대상 1위였어.
아마 남자가 조금만 더 물정에 밝았다면 라면보다는 소면이 더 저렴하고, 마트보다는 재래시장이 더 싸다는 걸 알았겠지만 남자는 가계부보다는 부동산 시세 보기를 더 즐겼거든.
과자를 사지 못한 아들은 잔뜩 부은 입을 하고 아버지가 시키는 데로 물건들을 집어 바구니에 넣었어. 시선은 자꾸만 색색 카드가 붙은 올림푸스 가디언 과자에 닿았지.
아들과 라면을 세어 넣으면서 남자는 바구니의 속의 물건 값을 어림 계산했어. 32300원이었어. 남자는 계산대에 바구니를 얹고 1900원짜리 88담배를 한 갑 주문했어.
아빠 나도.
아들이 기어코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올림푸스 가디언 과자를 들고 왔지.
안돼 돈 모자라,
담배도 샀잖아요
담배는 꼭 필요한거야.
하지만 그건 건강에 해롭잖아요. 이거 배탈 안나요. 아껴 먹을게요, 네?
남자는 잠깐 고민했어, 별들이 자리를 바꾸고 어린 별이 크고 늙고 죽고 다시 새 별로 태어날 만큼 아주 오래 고민한 거 같기도 했지. 그리고 또 시간이 흘러 다시 태어난 별도 지고....
그래.
남자는 담배를 포기 했어. 과자를 계산대에 내려 놓는 아들은 환하게 웃었어. 아들이 웃을 때 별이 태어났을까? 남자가 아들을 낳을 때 별이 되라고 기도했던가? 아마 애 엄마는 했을거야. 남자는 확실히 기억나지 않아. 하지만 아들의 웃음에서 별이 터지는 걸 느꼈어.
동전이 좀 남는데 젓가락도 살까요?
그래.
둘은 웃으면서 노란 장바구니의 물건을 차례차례 계산원에게 넘겼어. 남자의 눈은 자꾸만 계산원 위에 높다랗게 걸린 담배장에 머물렀지. 한차례 눈길을 줄때마다 아들이 태어나게 했던 가슴속의 찬란한 햇별이 차가운 백색 왜성으로 식어갔어. 남자는 애써 딤배장에서 눈을 떼고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어.
34200원입니다.
여기요.
34200원입니다.
점원은 고장 난 자동인형처럼 말했어. 남자는 벼락처럼 짜증을 냈어.
아, 거기 있잖소!
점원의 침작한 대답이 들렸어.
34200원입니다, 손님. 돈이 모자라네요. 8500원이예요.
남자의 눈이 번뜩 뜨였어.
뭐요?
점원의 손에는 꼬깃꼬깃한 하늘색 지폐3장과 깨끗한 5장과 500원 동전이 빛나고 있었어. 남자의 땀내가 맡아질 만큼 낯익은 돈과 음식점에서 받은 낯선 돈들이었지. 남자는 순간 점원이 돈을 바꿔치기 한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럴 수는 없지. 여기는 계산대마다 CCTV가 설치된 대형마트고 간이 금고 열리는 소리도 나지 않았는 걸. 그렇다면 대체 이게 어찌된 일일까?
아빠?
아들은 울음이 터질 것처럼 뻣뻣한 얼굴이었어. 남자의 얼굴도 비슷했을 거야.
계산원은 태고의 화산 분화구 두 개를 보았어. 빙하와 폭발이 동시에 존재하고 생명의 기미나 희망의 여지가 조금도 없는 그런 분화구 말이야. 조금도, 전혀.
어떤 걸 빼시겠어요?
8500원으로도 라면을 열 개쯤 사거나, 쌀 한 봉지를 사거나, 계란 두 판, 우유 네 팩, 부침 전용 싸구려 소시지 여덟 개를 살 수 있었어. 하지만 남자는 아무것도 사지 않았어. 불과 냄비가 없으니 라면이 무슨 소용이야? 당장 내일부터 굶게 될 건데 하루밖에 못 버틸 돈이 무슨 소용이냐고.
4500원짜리 칼국수를 먹으면서 옆 상 처럼 만두 한 접시를 더 시킬 수 있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던 그 마음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 전이라면 컵라면 하나를 둘이 나눠 먹으며 하루를 버텨내고 행복해 했을텐데 지금은 컵라면 한 개도 살 수 없었어. 남자는 라면 스물일곱 봉지와 가스 버너를 이미 만져봤단 말이야.
아빠...
아들은 올림푸스 가디언을 꼭 쥐고 있었지. 하지만 남자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나가자.
저기....
아들은 과자를 쥐락펴락하면서 남자의 성난 얼굴만 보았어. 그 돈이면 아들의 1500원짜리 별을 5번 쏘아 올리고도 1000원이 남는 다는 걸, 아니 단 한 번이라도 온전히 쏳아 올릴 수 있었다는 걸 남자가 기억했다면 좋았으련만.
당장 안 놓고 와?
남자는 버럭 소리를 질렀어. 아들은 얼굴이 새빨개져서 마트를 뛰쳐나갔어.
남자는 어리둥절한 마트 안의 사람들을 외면하고 나왔어. 머리 속엔 어떻게 4000원이 40000원이 될 수 있었는지 알아내느라고 여념이 없었지. 주인이 그들을 동정한 걸까? 그러면 있는 돈만 받거나 그냥 주면 될 걸 왜 거스름 돈 까지 준걸까?
아니야, 분명히 40000원이었어! 40000원이었다고!
.....계속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