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부를 묻는다

by 슈퍼엄마

주말에 읽은 <눈부신 안부>의 여운이 길게 남는다. 저자에 대한 글을 찾아보다 어느 인터뷰에서 "작가님의 유년을 대표하는 물건이 있다면 무엇인가요?"란 질문에 "편지"라고 답한 내용이 인상적이다. 수없이 많은 편지를 쓰게 한 경험이 그녀를 작가로 만들었고 이 소설을 쓰게 했다고 한다.

<눈부신 안부>에서는 편지가 중요한 화두로 등장한다. 그러다 내 삶에서도 편지가 중요한 화두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어릴 적엔 잡지책 뒷장에 펜팔을 원하는 사람들의 간단한 소개와 주소가 적혀있을 정도로 전 국민들이 편지 쓰기를 취미로 던 시절이 있었다. 학교에선 겨울 초입이면 위문용품과 함께 국군아저씨께 위문편지 쓰게 했는데 어느 날 학교로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그때 선생님께서 그 편지를 내게 주시며 말했다.

"ㅇㅇ이의 지가 국인 아저씨에게 큰 힘이 되었나 보다^^"


편지 쓰기에 소질(?)이 있다는 걸 본격적으로 알게 된 것은 중학교 3학년때이다. 중3 때 우리 반에 복학생 언니가 있었다. 나이는 한 살 차이밖에 안 나지만 탈색이 살짝 된 머리에 화장까지 하고 다니는 언니는 리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 같았다. 게다가 언니는 군인 남자친구를 사귀고 있었다.(지금 생각하면 맙소사!!)

언니에게 군인아저씨께 답장받은 전적이 있음을 자랑삼아 얘기했더니 언니는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바로 그 사람'이 나라는 듯 애원했다.

"나 대신 울 오빠한테 편지 좀 써줘..ㅠ"

글씨체가 별로인 건 둘째치고 맞춤법도 헷갈린다는 언니는 오빠와의 러브스토리를 내게 들려줬고, 난 마치 사랑에 빠진 소녀가 된 듯 편지를 대필해 줬다.

언니의 (내가 쓴) 편지를 받은 군인 남자친구는 '너에게 이런 면이 있는 줄 몰랐'으며, '매우 감동'했고, '너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고 전했다. 편지가 도착할 때마다 언니는 나를 옆구리에 끼고 매점에 데리고 갔다. 난 마치 성은을 입은 궁녀가 된 듯 의기양양했다. 언니의 연애가 끝나고 나도 궁에서 내쳐졌지만;;


중학교에 올라오면서 받은 편지가 100통이 넘어섰다. 편지 100통 기념으로 팬시점에서 예쁜 플라스틱 통을 사서 담아 놓았다. 하루는 내 보물들 잘 있나.. 하며 편지함을 열었는데 거짓말처럼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할머니 여기 있던 내 편지 못 봤어??"

"그거 쓰레기통 아니여?? 할미가 쓰레기통 죄다 비웠지"


대성통곡하며 울고 있는 내게 할머니는 요구르트에 빨대를 꽂아주며 사과를 했고, 아빠는 그깟 편지 또 받으면 되지 뭘 그러냐며 핀잔을 줬다.

물론 편지야 또 받을 수 있지.. 그러나 같은 내용, 같은 마음의 편지는 두 번 다시 받을 수 없지.ㅠㅠ


사춘기 시절에는 더욱 격렬하게 편지를 썼고, 아예 친한 친구와는 교환일기장을 만들어 일기 쓰듯 편지를 썼다. 중3 때 처음으로 좋아하던 남학생에게 고백할 때도 편지로 했고, 거절 역시 편지로 받았다. ㅠㅠ

군대에 간 애인 없는 동기, 선배, 후배들은 모두 내 주소를 받아갔고 난 그들의 군생활을 편지로 열심히 들어주기도 했다. (콜렉트콜은 안 받아줌;)

지금 남편과 결혼을 결심한 것도 내 생일에 쓴 4장짜리 편지를 받고 감동했기 때문이었는데,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10대 때 주고받은 편지들은 몇 번의 이사를 거치면서 행방불명되었지만 20대 이후에 주고받은 편지는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베란다와 창고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발견했다!!!(심봤다)

이 상자 안에서 20대에 나를 스쳐갔던 반가운 이름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대학시절 친하게 지내던 친구이름, 학원 강사 하던 시절에 가르쳤던 제자들 이름, 누구인지.. 이제는 희미해진 름들까지...


다 잊고 사는 줄 알았는데 편지 봉투에 쓰인 이름을 보자마자 기억들이 끝도 없이 딸려 나온다. 처음에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도, 신기하기도 하다가.. 여기에 적힌 이름 중에 지금까지도 가깝게 지내는 이가 많지 않다는 데에 생각이 머물자 조금 슬퍼졌다. 작정하고 멀어지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계절이 지나듯 자연스럽게 멀어져 갔다.

나의 생각, 말투, 습관 등 어딘가에 그들의 흔적이 조금씩 묻어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비록 지금은 멀어졌어도 그들이 내게 준 관심과 애정이 그 당시에 나를 위로하고 버티게 했으리라 생각하니 고마운 마음도 든다.


매일같이 안부를 주고받으며 가깝게 지내던 인연들, 한 때는 애틋했으나 결국 비슷한 일들로 멀어져 간 인연들이 지금은 다른 인연들로 대체되어있다는 것이 슬픈 동시에 다행스러웠다.

그때는 누군가를 향해 드는 감정이 말로 하면 금세 달아날까 봐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편지를 썼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은 감정들이 서글플 만큼 빨리 지나간다는 걸 깨달았을 때부터 편지 쓰는 횟수가 줄어든 것 같다. (환경이 변한 탓도 있겠지) 그래도 그 순간들은 모두 진심이었다는 것, 여기 이렇게 증거가 남아있다는 것이 위안이 된다.


오늘은 지금의 나를 있게 하는데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 인연들을 떠올리며 안부를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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