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 회의

출근했는데 나밖에 없다

by 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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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 회의

- 은상’s #인스타소설



난 그렇게 꽉 막힌 사람이 아니다. 사실 이 사업체를 운영하는 이유도 큰 돈을 벌려기보다 내 연구가 사업화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다. 그래서 열 명 남짓한 직원에게는 재택근무 및 출퇴근 시간을 유연하게 조절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다고 성과가 나오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알 정도로 깨어 있는 사람이다.

학교에서 교수로 있으면서 사업체를 운영하려니 나 역시 많이 출근해야 주에 3일 정도다. 사실 이 사업체는 내 제자였던 부사장이 거의 운영하고 있다. 그만큼 믿고 맡겼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지난 주는 학교 일로 바빠 출근을 하루도 못하는 바람에 오래간만에 회사에 출근했는데, 내가 문을 따고 들어와야 했다. 11시가 가까워오는 이 시간에!

자유 출퇴근 제도를 실시한 장본인이 나였기에 기분은 나빴지만 일단 참기로 했다.

사무실에 들어가니 모니터 두 대가 빛나고 있다. 뭔가 렌더링을 돌리고 있는 건지 어쩐 건지 알 수가 없다.

내 자리로 돌아가서 가지고 온 노트북을 세팅했다. 회사에 매일 오는 게 아니라 내 자리에는 컴퓨터가 따로 없다.

혹시나 하고 회사 메신저에 들어가 봤다. 아직까지 아무 대화가 없다. 재택근무를 할 때는 이 메신저를 이용해 업무 대화를 나누는데……. 일단 사정을 모르니 아무 말 하지 않기로 했다. 어디선가 열심히 일하고 있을, 아니 일하고 있을지도 모를 직원들에게 부담 주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이건 너무했다. 데이터 등을 정리하고 있으니 1시가 넘어가고 있다. 혹시나 해서 벽에 걸린 달력을 봤다. 자동차 영업사원이 준 달력인데, 스마트폰 달력보다 난 이렇게 시각적으로 한눈에 보이는 달력을 선호해서 벽에 붙여 놓은 것이다. 아무튼 일요일도, 토요일도, 공휴일도 아니다. 분명 평일, 목요일이다.

오래간만에 직원들과 점심을 먹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겠다는 내 소박한 희망은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기강을 잡아야겠다는, ‘꼰대’스러운 발상이 머리를 스쳐갔다. 스탠포드에서 공부하며, 절대 꼰대는 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는데, 그 결심은 점심 때문에 날아가 버렸다.

난 전화를 걸고야 말았다.

“부사장? 지금 어디야?”

“앗, 대표님…… 지금 집에 있는데 어쩐 일이십니까?”

놀란 목소리였다. 나도 부사장 목소리를 오래간만에 들으니 놀랍기는 했다.

“어쩐 일? 하…….”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집에 있다는 게 저렇게 당당할 일인가? 하지만 마음을 최대한 추스렸다. ‘난 합리적인 사람이다’라고 주문을 세 번 정도 외우고 차분히 말을 이었다.

“회사 운영에 대해 긴히 할말이 있으니 사무실로 좀 나와주었으면 하는데…….”

“지금이요?”

“그래, 지금!”

난 단호히 말했다. 더 여유를 주었다가는 대표 말을 아예 무시할 기세였다.

“네, 대표님…….”

부사장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한 시간이 좀 넘게 지나고 나서 부사장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부사장의 집은 일산이라 이곳 강남구까지 오려면 꽤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걸 봐주고 있을 때가 아니다. 엄연히 지금도 업무 시간이다.

부사장과 회의실에 들어가 내가 왜 이 회사를 창업했는지, 그리고 직원에게 어떤 미래를 실현시켜주고 싶은지, 그러려면 어떤 행동 지침이 필요한지를 이야기했다.

꼭 정시에 출근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일을 하고 있다고 모두 믿을 수 있도록, 성실의 의무를 다해야 하는 이유도 설명했고, 성과평과에 그런 점을 KPI로 적용하겠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원래 우리 회사 규정에 성실의 의무가 KPI란 말은 없지만, 그건 회사를 다니는 사람의 기본 아닌가?

부사장은 불만이라는 듯, 뭔가 입을 열었다가도 다물었다. 아무래도 과거에 내가 부사장의 교수였기 때문에 말을 참는 듯도 했다.

말을 하다 보니 어느 덧 5시가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너무 말을 많이 해서 그런가 목도 아팠다. 그래서 부사장에게 말했다.

“오래간만에 일찍 끝내고 삼겹살에 소주나 한잔하지.”

부사장은 시계를 한번 흘깃 보더니 대답했다.

“그러시죠.”

노트북을 챙겨 사무실을 나와 카드키를 이용해 문을 잠그고 있는데, 뒤에서 부사장이 말했다.

“대표님, 그런데 오늘 창립기념일이란 건 알고 계신거죠?”

카드키를 놓칠 뻔했다.

물론 알고 있었다. 창립기념일에 다른 행사를 하느니 쉬는 게 좋겠다고 말한 것도 나였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렇지만 잊어버렸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갑자기 부사장과 술을 마시기 싫어졌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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