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경기도 수원시.
망포역 5번 출구 인근 번화한 건물들 사이에 우뚝 선 시영 타워.
그리고 1층 101호에 위치한 ‘시영 부동산’. 짙은 갈색의 가죽 소파에 마주 앉은 두 남녀에게 회색 정장 차림의 여성 중개인이 계약에 대한 설명을 마무리하는 중이었다.
“그럼, 이제 임대인과 임차인 분께서는 각각 이곳에 날인하시기 바랍니다.”
중개인의 손이 가리키는 곳에 두 사람은 손에 쥐고 있던 도장을 찍었다. 임대인은 세련된 은발을 틀어 올린 트위드 원피스 차림의 60대 여성, 임차인은 물결치는 머리카락 사이로 날렵한 눈매가 엿보이는 30대 남성이었다. 이로써 계약이 성립하였다. 계약금을 주고받고 ‘수고하셨습니다.’란 의례적인 인사말이 오고 간 후 자리가 파하려는 찰나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202호가 좀 시끄러울 수도 있어요. ‘현 유통’이 무슨 일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전 계약자들이 소음 때문에 민원 전화를 종종 해서― 그런데 그건 뭐 제가 어떻게 해드릴 수 없는 부분인 건 알고 계시죠? 서로 둥글게 알아서들 해결 보시고…….”
임대인은 사람 좋은 미소를 샐쭉 지어 보이며 건물주의 위엄을 가장한 무책임한 문장을 쏟아냈다. 옆에서 중개인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임대인의 입을 당장에라도 틀어막고파 손을 공중에서 어찌할 바 못하고 있었다.
그때 임차인은 한쪽 입꼬리를 씩 올리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마치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듯. 그는 임대인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런 건 걱정 마십시오.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뮤직 카페를 운영할 계획이어서요. 음악을 매장에 틀 거라 약간의 소음 정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공동 건물에 입점하면 그쯤은 미리 염두에 두어야 할 문제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
“오, 외모도 훤칠하신 분이 역시 마음 씀씀이도 남다르시네. 그럼 그렇게 생각해 주시리라 믿을게요. 저도 사소한 문제를 크게 만드는 분들과는 계약 지속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요. 이번에 정말 좋은 분을 만난 것 같아 기쁩니다. 잘 부탁해요.”
임차인의 시원스러운 답변이 꽤나 마음에 든 눈치였다, 임대인은. 그녀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임차인과 악수를 나누고 중개인에게는 턱을 까딱하며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만화의 한 장면처럼 건물 앞에 불법 주차해 둔 핑크색 컨버터블 카를 타고 사라져 버렸다.
“계약하시느라 이것저것 신경 많이 쓰셨죠? 건물주도 아주 편한 분은 아니시고……. 그런데 요즘은 뭐 다들 그렇죠. 도움이 필요한 일 생기시면 저를 통해 말씀하시면 됩니다.”
임차인은 임대인을 바라보며 지었던, 조금 전의 그 미소로 중개인을 바라보았다. 순간 사무적이기 이를 바 없던 중개인의 표정도 슬며시 녹기 시작했다. 마시멜로처럼 한결 말랑말랑해진 공기―
“마음 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또 뵙겠습니다.”
임차인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