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히 계세요.’라는 여자의 인사말과 함께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라는 익숙한 목소리가 뒤따랐다. 그리고 딸깍, 문이 닫혔다.
“계약서 작성 마치고 돌아가셨습니다.”
지수가 현의 곁에 다가와 말했다. 걱정스러운 목소리였다.
“고마워, 아침부터 고생했어. 이제 좀 쉬자.”
고맙다는 인사치레가 무색하게 현은 지수 쪽으로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진짜 그 말도 안 되는 계약이 성사된 것이다. 죽은 아들을 만들어 달라는―
“대표님은 아이 없으세요?”
귓가에 맴도는 그녀의 울부짖음. 머리가 지끈거렸다. 현은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보았다. 열은 없었다.
*
아이.
불현듯 현은 자신이 아이였을 적이 떠올랐다. 아니, 아이였던 적이 있었던가. 10살의 현은 분명 몸은 아이였지만, 삶은 어른만큼이나 지난했다.
6살이나 어린 남자와 눈이 맞아 훌쩍 집을 나가버린 엄마. 동네 아줌마들은 그 남자가 트럭을 모는 바람잡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엄마도 바람이 나서 나가버린 거라고.
목수로 일하는 아버지와 살기 위해서 현은 엄마 몫을 대신하는 딸내미여야 했다. 그래서 학교가 파하면 서툰 손으로나마 부지런히 집을 쓸고 닦으며 밥을 지었다. 반찬은 시골 사는 작은엄마가 보내준 시어 빠진 김치뿐이었다. 세탁기 돌리는 법도 물론 작은엄마가 알려주었다, 엄마가 떠난 다음 날.
현은 밤이 싫었다. 아빠는 종종 얼큰히 취해 동료의 어깨에 기대어 밤벌레가 쌕쌕 우는 소리가 날 때에야 집에 돌아오곤 하였다. 방은 두 개였지만, 그런 날은 꼭 현을 불러서 함께 자는 아빠였다. 빨지 않아 눅눅한 이부자리, 꼬롬하게 방 안을 가득 채운 술 냄새, 아빠가 입은 메리야스의 까칠한 감촉이 싫어서 등을 돌리고 누우면 아빠는 잠버릇인지 꼭 현의 팬티 속에 손을 넣고 아래를 더듬곤 했다. 예민한 부위인지라 불쾌하기 짝이 없었지만 잠에 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아 현은 숨을 죽이고 그저 가만히 있었다.
첫 생리를 시작하고 아빠와 현이 함께 이부자리에 눕는 일은 없어졌다. 그리고 삐그덕거릴 때도 있지만 제법 평범한 한부모 가정의 부녀가 되었다. 어차피 아무도 모르는 일, 모두 없었던 기억이었던 것처럼. 아빠는 현이 알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니까. 아니,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걸지도―
세월이 흐르고 둘의 사이는 사람들로부터 때때로 찬사까지 받게 되었다. 목수 일을 하며 홀로 딸을 키워낸 눈물겨운 부성애. 자녀의 성장 후 청천벽력처럼 찾아온 폐암. 그리고 극진히 그를 간병하는 딸의 효심까지……. 모든 생애가 잘 짜인 한 편의 드라마 같았다, 현이 꼭꼭 감춰둔 비밀만 끄집어내지 않는다면.
*
“인터뷰하면서도 많이 우시더라고요, 아까 그분.”
지수가 무거운 침묵을 깨뜨렸다. 그래, 이제는 고객이 된 그녀에 대해 생각할 때다. 현은 머릿속을 점령한 상념을 쫓기 위해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식이라면 누구든… 이해해.”
현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대표님께서 이 주문을 수락하실 줄 몰랐어요.”
지수가 책상 위로 시선을 돌렸다. 필시 펜의 잉크가 채 마르지도 않은, 따끈한 계약서를 검토하는 중이리라.
“나도 내가 그 순간 오천을 부를 줄 몰랐지. 그럼, 계약서 좀 살펴볼까?”
드디어 이성을 되찾은 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