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아침! 지수 씨, 오늘 일찍 출근했네.”
“네, 아침에 지난달 출고한 상품 만족도 체크할 게 있어서요.”
“벌써 고객님께 회신이 왔어? 결과 확인 후 나도 보고해 줘. 지수 씨, 커피는 뭘로?”
“이미 마시고 있습니다.”
“아, 그럼 내 거만 내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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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 30분, 시영 타워 202호에 자리한 현 유통도 업무를 시작하는 시간.
불투명한 검정 필름이 온통 빛을 차단한 창문 때문에 조명의 연 노란색이 은은하게 사무실을 감싸는 아침. 파스텔 톤의 보라색 페인트가 점점 낮은 채도로 떨어지는 벽에는 제각각 개성 있는 옐로를 뽐내는 별들이 당장에라도 쏟아질 듯 박혀 있다. 입구의 천장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영롱한 비즈 커튼 사이로 보이는 사무실 중앙의 패브릭 소파는 현이 야시장에서 구입한 빈티지 타피스트리가 덮고 있다. 소파 앞 테이블에는 여러 권의 책이 쌓여있고, 그 옆으로 퀴퀴한 냄새를 감출 디퓨저와 말린 꽃병이 놓여 있다.
사무실 입구에 서서 소파를 가운데에 두면 북향과 동향, 정확히 90도의 각도로 파티션이 두 개. 바로 사무실의 대표인 현과 사원인 지수의 자리다. 오늘로 만 33세 공대 나온 이혼녀 현의 책상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반면, 만 27세 미대 나온 솔로남 지수의 책상은 혼잡 그 자체다. 질서와 무질서가 ‘파티션’이란 안전장치를 두고 공존하는 모양새랄까.
그리고 서향에는 멋들어진 포스터를 몇 장이나 마스킹 테이프로 붙인 까만 가벽으로 구획을 지은 작업실이 있다. 포스터들은 전부 지수의 취향이다. 작업실에서는 고객의 주문대로 상품을 제작한다. 그래서 주문서, 도면, 여러 장치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책상, 그리고 기계들만 제외하면 사무실로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이곳은 원래 타로 카페였다. 2년 전, 지하철역 대로변에 자리한 상가임에도 점괘가 신통치 않아선지 적자만 남기고 폐업한 카페를 현은 보자마자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으로 낙점했다. 그리고 ‘인테리어는 별로 중요치 않은 일이라서요.’라는 말로 내부 공사 업체를 소개하는 시영 부동산 중개인의 권유를 단호히 거절했다. 그런 다음 최소한의 가구만 챙겨 들어와 사무실을 오픈한 것이다. ‘현 유통’이라고 간판을 바꿔 단 것도 사업 시작 후 두 달이나 지나서였다. 아마 타로 카페가 폐업한 줄 모르고 찾아오는 손님들이 아니었다면 영원히 바꿔 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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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무역 회사의 경리로 근무하다가 경단녀로 살던 3년의 결혼 생활, 그리고 이혼 후 도전하는 첫 사업이었음에도 현은 성공할 자신이 있었다. 기혼녀로 살던 시절 동안 주변으로부터 본의 아니게 듣게 된 성생활에 대한 이야기들, 그리고 지방대긴 하지만 공순이였던 이력을 살린다면 충분히 경쟁력 있는 시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꼬박 두 달에 걸쳐 자신만의 비밀스러운 작업실을 사무실 한쪽에 뚝딱 만들어냈다. 뜻을 함께 실현할 인재도 영입했다. 그는 미대에서 조각을 전공한 지수였다.
이렇게 모든 준비를 마치고 현은 스마트 스토어를 오픈했다. 이름하여 ‘MY DoLL’. 고객이 AI를 기반으로 원하는 인물의 이미지를 창조하면, 그것을 3D 프린터를 이용해 실물 크기로 맞춤 제작하는 사업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리얼돌을 주문받아 제작하는 일. ‘My DoLL’은 다른 업체와 달리 인체와 가장 가까운 촉감을 구현하기 위해 수술에도 사용한다는 최고급 인조 피부 ‘실링 바이오텍스’만을 사용하며, 체모가 필요한 부위에는 오직 인모만을 사용하는 고급화 전략을 채택했다. 그곳의 디테일한 감각을 고객의 니즈에 맞춰 살리는 것은 물론이며, 목소리와 체취까지도 실물처럼 입힐 뿐 아니라 이 모든 내용이 분기별로 업데이트된다는 장점은 가히 혁신적이었다. 이에 그치지 않았다. 기술적으로 채워지지 않는 부분을 미학적으로 완성하기 위해 순수 미술을 전공한 예술가가 제작에 참여하고 검수한다는 사실은 리얼돌 시장에서 ‘MY DoLL’을 최고라 인정받게 하는 타이틀이 되었다. 아쉬운 점이라면 비정기적으로 오직 한 건만 주문을 받으며 가격이 상품마다 천차만별이지만 수천만 원은 기본이라는 사실이랄까.
“이번에도 만족도 조사 결과 괜찮네. 모두 지수 씨 덕분이야. 고객님께서‘남기고 싶은 말’에 색감 구현에 대한 사항을 언급하셨어. 까다로운 요청 사항이었는데 지수 씨가 고생한 보람이 있네. 역시 미술 전공자 눈은 탁월해.”
“뭘요, 최종 검수는 대표님이 하셨는데요. 감사합니다.”
현과 지수가 손발을 맞춰 일해온 기간은 2년. 둘은 언제나처럼 업무에 대한 보고와 짧은 칭찬을 주고받은 후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성향이 너무 다른 그들이 비좁은 공간에서 오직 둘만이 보조를 맞출 수 있는 이유는 적당한 거리 유지, 바로 그것이었다.
친구들이 지수에게 ‘요즘 무슨 일해?’라고 물으면 그는 ‘온라인 유통업 쪽에서 일해.’라고 대답했다. 자랑할 만한 일도, 부끄러울 일도 아니지만 딱히 터놓을 생각은 없었다. 함께 입학했던 동기들보다 연봉을 2.5배는 더 받는 현실을 겸손하게 여겨서는 물론 아니었다. 아무튼 탄력적인 근무 시간, 성과에 따른 보수, 능력을 인정해 주는 상사, 작품을 완성했다는 성취감 등을 고려했을 때 이만한 직장은 없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지수는 현을 대표로서 존중했다.
*
그렇게 오전 11시가 되어 가고 있을 때였다.
“쾅쾅쾅!”
누군가 주먹으로 사무실 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에어팟을 낀 채 깜박 잠이 들었던 현, 콧노래를 흥얼대며 그림을 그리던 지수는 깜짝 놀라 문 쪽을 바라보았다. 모처럼 작업을 내려놓고 점심 전에 휴식을 취하는 시간― 불청객의 방문이었다.
“누구십니까?”
지수가 문을 열었다.
“아래층입니다. 개업 떡을 준비해서요. 잠깐 들어가겠습니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기다렸다는 듯 지수를 밀어붙이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시영 타워 102호에 새로 입점한 뮤직 카페 ‘낮 그리고 밤’의 사장이었다. 뽀얀 기정떡을 한 접시 손에 받쳐 든 그는 현 유통이 자기 집이라도 되는 양 소파에 걸터앉았다.
“커피 같은 건 없나요?”
너무나 천연덕스러운 그 태도에 지수가 잠깐 할 말을 잃은 사이, 파티션 뒤에서 정신을 가다듬던 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네, 여기는 카페가 아니라서요. 아래층이 바로 그곳이라고 들었는데 아직 커피가 준비되지 않은 모양이죠?!”
“맹물도 괜찮은데요.”
현은 어딘지 낯익은 손님의 실루엣을 눈으로 더듬으며 얼굴을 판독하기 시작했다. 맙소사, 이렇게 귀에 콕콕 박히는 얄미운 말투라니, 그리고 저 쭉 째진 눈매까지― ‘낮 그리고 밤’의 사장은 2년 전에 이혼한, 자신의 전 남편 용이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야?”
“우연, 100% 우연이지.”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거야?”
“안 그러면?!”
점점 험악해지는 분위기를 보며 지수는 얼른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임을 직감했다.
“저는 점심 먹으러 갑니다.”
둘만 남은 사무실 안은 한참 동안 침묵만 흘렀다.
“… 회사는 어쩌고 갑자기 카페를 한다는 거야?”
“나 한동안 아팠어. 그래서 사표 쓰고 좀 쉬다가 퇴직금으로 창업한 거야. 네가 지금 네 사업하는 것처럼.”
“카페가 마진이 많이 남을까?”
“이제 뭐 서로 그런 걱정할 사이는 아니잖아, 우리.”
현의 걱정스러운 말에 용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현의 얼굴에 웃음기라곤 없었다. 2년이란 시간 동안 더욱 벌어진 둘 사이의 거리만 실감하고 말았으니. 그래, 우리는 이렇게 공감할 수 없었기에 이혼한 것이다.
“아무튼 서로 마주칠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그래. 나도 간판 보고 혹시나, 해서 들어온 거지. 알잖아. 내 성격.”
“이제 가줘. 떡은 먹었다고 칠 테니 가져가.”
“그건 서로에게 너무 야박한 거 아냐? 개업 떡 정도는 먹어주라.”
결국 맹물 한 모금도 못 얻어먹고 내려가는 용이었다. 남자의 뒷모습을 점점 가리며 닫히는 문을 응시하던 현은 다시 책상에 고개를 파묻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