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르익은 칠월 오후의 햇살이 거리에 화살처럼 내리 꽂혔다. 덩달아 과녁이 되어버린 피부에서 따끔거리는 작열감이 느껴졌다. 다영은 오븐 속에서 익어가는 바비큐가 된 것 같아 걸음을 떼기도 힘들었다.
‘살아남아야 해…….’
이럴 때는 생체 내비게이션이 되어 빠르게 주변을 스캔한다-
그리고 현재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카페로 돌진한다-
“여기 아아 하나 주세요!”
카운터에 사납게 달려들어 냅다 주문부터 하고 보는 다영. 그것은 바로 직장인의 생명수,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다. 다영은 무려 벤티 사이즈를 한 방에 원샷하고 나서야 간신히 놓칠 뻔한 정신 줄을 다잡을 수 있었다.
‘…내가 미쳤었지….’
남은 얼음을 오도독오도독 씹다가 다영은 갑자기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주머니 속에 고이 넣어 두었던 휴대폰의 통화 목록을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 32개, 발신지는 모두 학교였다.
일단 질러 놓고 튀기는 했지만, 근무지 무단이탈을 어떻게 수습한단 말인가-
심지어 내 교실, 내 수업에서 그렇게나 해괴한 일이 일어났는데-
다영은 다시 한번 몸부림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주변 사람들이 그런 다영을 이상하다는 눈치로 힐끔거렸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다시 살아나긴 했는데 더 깊은 나락에 떨어지고 말았다.
시무룩해진 다영은 테이블에 엎드려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거리의 사람들은 모두 제각각 생기 넘치는 표정으로 하루를 살고 있었다.
서류 가방을 들고 바삐 횡단보도를 건너는 세일즈맨,
선글라스를 끼고 도도한 걸음을 걷는 모델,
백팩을 메고 지하철역을 향해 질주하는 동아리 학생들,
푸들과 함께 장바구니를 들고 마트로 향하는 아주머니,
그리고 도로를 달리는 수많은 자동차의 향연…….
문득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까지 들어가서 죽네 사네- 난리인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누구에게 털어놓지도 못하고 가슴앓이만 하며 끙끙대는 신세라니. 어느새 다영의 눈동자에 촉촉한 기운이 어리고 있었다.
끼이익-
쾅!
우울을 모조리 날려버리는 엄청난 굉음이었다. 마치 지진이 일어난 양 건물조차 뒤흔드는 소리에 사람들의 비명들이 잇따랐다. 커다랗고 무거운 물체가 미끄러지고 어딘가에 부딪힌 듯했다.
사고 발생.
흰색 SUV 한 대가 인도로 달려들어 행인들을 덮친 것이다. 네 명의 사람들이 그로 인해 심하게 다친 듯했다. 한 명은 차 밑에 깔렸고, 또 한 명은 차와 건물 벽체 사이에 끼이고 말았다. 나머지 두 명은 차에 치여 튕겨 나갔는지 길바닥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진 상태였다. 어쩌면 다들 사망했을지도 모르는 위중한 상황.
참혹한 현장에서 모두들 ‘어떡해….’ 만 중얼거리며 어찌할 바 모르고 있었다. 카페에 있던 사람들과 함께 거리로 뛰쳐나간 다영의 얼굴 역시 새파랗게 질렸다. 어제 내가 선택했던 죽음이란 바로 이런 모습인가, 하는 자각 때문에 두려움이 밀려왔다. 저 멀리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다영은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실비실 카페로 돌아가려는 찰나, 무엇인가 결심한 듯 다시 몸을 사고 현장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나직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휘잇!”
지금까지 다영이 분 휘파람 중 가장 짧고 단호한 울림이었다. 모든 상황이 순식간에 30분 전의 모습으로 정렬되었다. 걷고 있는 거리의 인파, 도로 위 수많은 차, 상점 안의 붐비는 사람들까지도 모두 그대로 멈추었다. 그 누구도 다치지 않고 평온했던 오후의 풍경이었다.
‘그 차를 찾아야 해!’
휘파람을 분 순간부터 다영은 인도로 돌진했던 흰색 SUV를 30분 안에 찾고 말겠다는 목표가 분명했다. 조금도 지체할 수 없었다. 다만 큰 사고 현장에서 충동적으로 결정한 시간의 회귀인지라 차량 번호가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그것은 워낙에 덜렁대는 다영의 성격 탓이기도 했다. 결국 일일이 비슷한 차들을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영은 헉헉거리며 도로를 뛰어다녔다.
“아오, 왜 차들이 다 하양 아니면 검정이냐!”
대한민국 차주들의 획일적인 취향에 분개하며 다영은 흰색 SUV를 발견할 때마다 차량의 상태와 차창 너머 운전자의 컨디션을 일일이 확인했다. 그러나 특이 사항을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렇게 몇 대나 지나쳤을까. 교차한 도로가 만나는 지점에서 좌회전 중인 차량의 창문 안을 들여다볼 때였다. 60대 정도로 보이는 남성 운전자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오른손으로는 가슴팍을 움켜쥔 채였다. 한눈에 보아도 건강에 이상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다영은 차 문을 열기 위해 잡아당겨 보았다. 그러나 잠겨있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오, 제기랄!’
문득 차체 위에 시선이 쏠렸다. 다영은 슬쩍 까치발로 지붕을 올려다보았다. 다행히 선루프가 조금 열려있었다. 다영은 옳다구나, 싶어 보닛을 밟고 깡충 뛰어올랐다. 이런 비상시국에 차체가 좀 찌그러지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에고, 날도 더워 죽겠는데 왜 이리 안 열리냐!”
한참을 구시렁댄 끝에야 간신히 몸을 구겨 넣을 수 있을 만큼 선루프의 틈을 벌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좁다란 사이로 다영은 진입에 성공했다. 이것이 그동안 아파트 문화센터에서 월 35,000원을 내고 주 3회 수강했던 에어로빅의 효과다!
차 안에는 회색 자욱한 담배 냄새가 진동했다.
“으아, 부디 앞으로는 금연하시옵소서.”
다영은 운전자의 손과 발을 조심스레 옆으로 치워- 아니, 옮겼다. 그리고 자기 손과 발을 핸들과 엑셀, 브레이크에 요렇게 조렇게 끼워서, 돌리고, 밟아가며 차를 갓길에 세웠다. 그리고 비상등을 켰다.
“유후! 제가 구급차는 금방 불러드릴게요.”
다영이 차에서 빠져나왔을 때는 어느새 시간이 28분이나 흐른 뒤였다. 다영은 ‘LUCKY’라는 의미로 참았던 호흡을 깊게 내쉬었다.
그리고 정확히 2분 뒤, 시계가 내려준 마법이 풀렸다.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차들은 도로를 달렸고, 사람들은 인도를 걸었다. 남은 일은 멈춰 선 흰색 SUV 안에서 가슴팍을 부여잡고 고통을 호소하는 운전자를 병원으로 이송하는 것뿐이었다.
“하… 하, 하하하… 하하하하…….”
모든 것을 마무리한 다영은 그저 웃었다. 거리에서 실없이 큰 소리로 웃는 다영을 사람들이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았지만, 아무렇지 않게 웃고 또 웃었다.
다영은 그곳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구급차가 와서 헐떡이는 운전자를 실어 가는 모습을 보고도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불화살 같은 여름 햇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늘 다영은 처음으로 세상에 승리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으로 타인을 구한 값진 일을 하며 말이다. 교사가 되어 첫 수업에 들어가기 전, 그때도 딱 이런 마음이었더랬지. 자신이 그동안 공부했던 것들을 학생들과 나누며 함께 성장하고 싶다는 꿈을 꾸었었다. 덧없는 꿈이었지만…….
“오랜만에 쓸모 있었네, 주다영.”
다영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다독였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집으로 향하는 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