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 우는 소리만 하자

by 심바

연휴는 달리기에 위험하다. 이곳저곳 방문을 위한 장거리 이동에 지난한 음식 준비 대장정이 기다리고 있다. 교대근무는 주말도 공휴일도 따로 없이 내 근무패턴대로 일하기 때문에 명절이라고 해서 따로 쉬지는 않는다. 최근 들어 미혼이든 기혼이든 차라리 일하는 걸 선호하는 쪽으로 더욱 바뀌어가는 것을 느낀다. 나 또한 마찬가지, 정말로 출근을 해야 함이기도 하니까. 이번 설날에도 저녁근무가 잡혀있지만 해외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동서네와 오랜만에 함께 할 수 있는 명절이라 동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휴가를 썼다. 7~8시간이 걸려 번갈아 운전하며 차로 가는 대신 새벽마다 취소표를 찾아 잠을 설친 덕에 KTX를 타고 시댁으로 갈 예정이다. 여행이라고 생각하자, 마인드컨트롤!






연휴가 끝나자마자 32.195km의 마라톤 대회가 기다리고 있다. 연휴 동안 러닝클래스가 없는 대신 코치님은 필수 달리기 숙제를 내주셨다. 15km를 속도를 점점 올려가며 달리는 것이 첫 번째 숙제. 같이 수업을 듣는 크루 운영진이 같이 달릴 사람을 모집했고, 연휴 동안 달리기 어려울 것이 이미 정해진 나는 번쩍 손을 들었다. 달려야만 해.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출전하는 대회다 보니 작년보다 조금은 더 잘 뛰어내고 싶다. 그러려면 숙제를 꼬박꼬박 잘해야지.



목표 기록이 정해지면 목표 페이스도 정해진다. 어느 정도의 속도로 뛰어야 내가 정한 시간 안에 들어올 수 있을지 가늠해 본다. 오늘 내가 뛰어야 하는 속도와 유사하게 32km를 달려야 작년의 기록을 경신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의 달리기 숙제는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 15km는 내 평소의 훈련에 견주면 힘들어 달리지 못할 거리도 아니니까.

누구나 완벽한 계획은 있다, 달리기 전에는.




토요일 아침 8시 20분, 트랙이 있는 운동장에 둘이 모였다. 나보다 빠르게 달리는 분이라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페이스로 혼자 15km를 달려내야 한다. 굳이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모두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분명히 잠들기 전에는 너무 달리고 싶었는데,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나간다고 번쩍 손을 든 것을 후회했다. 이놈의 설레발. 설렁설렁 몸을 풀며 A님이 푸념을 늘어놓았다. 매일 뛰어도 매일 뛰기 싫다고, 참 신기하다고. 걱정 마요, 나도 너무 같은 마음이에요. 잘 뛰는 사람도 같은 생각을 공유한다니 얼마간 마음이 놓였다.



평소에는 스트레칭을 꼼꼼히 한 다음 트랙을 5바퀴쯤 돌고 난 후 본격적인 훈련을 하지만 오늘은 둘이서 적당히 서로의 의중을 살핀 후 조심스레 2바퀴만 몸을 풀고 숙제를 마치자는데 동의했다. 날씨가 제법 많이 풀려 싱글렛에 반바지를 입고 달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미세먼지 공격 속에 달리는 게 몸에 좋을까, 밖에 안 나오는 게 몸에 좋을까 이런 잡생각을 하며 설렁설렁 뛰었다. 시계를 정비하고 각자 15km의 주어진 숙제 달리기를 시작하기 전 파이팅을 외쳤다. 이 아침에 뛰는 나를 칭찬해!





오늘은 뭘 할 수 있고 그딴 소리는 하지 말고 우는소리만 하자.
우는 소리만 하자, 됴아됴아.
만나서 우울하자는 이 계획이 멋져서 덜 우울할 위기에 봉착했어.

< 친구의 표정 > - 안담


이직 준비를 하고 있다는 A님, 그리고 나는 숙제를 다 해내지 못했다. A님은 새로운 신발에 적응을 아직 못해서인지, 몸을 덜 풀어서인지 발목 쪽에 미세한 통증이 느껴져 달리기를 멈추었다. 대회가 코앞이라 무리하다 부상을 입으면 안 되니 현명한 판단이다. 속도를 점점 올려 달리는 것을 빌드업이라고 하는데, 나는 빌드다운(?) 달리기를 했다. 너무 힘들어서 신기할 정도였다. 요즘 훈련을 좀 따라가며 자신감이 붙었었는데, 역시 난 아직 멀었나 보다.


"나오지 않았으면 0km니까요!"

우리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서로를 위로했다. 매일 나아지고 발전하고 목표를 갱신하는 건 너무 비인간적이잖아요. 달리기는 왜 이렇게 힘들고, 회사일은 왜 이렇게 많고, 사는 건 가끔 왜 이렇게 구질구질한지 우는 소리를 주고받았다. 바닥이 어딘지 모를 몇 마디 대화를 나누며 묘한 안정감이 들었다.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 게 우리 삶이다. 이렇게 또 하루 살아내었으면 됐지. 위안하고 위로했다. 가끔 이런 미완의 날도 좋구나, 이렇게 글감까지 주는 걸 보니.

이전 08화[ep.8] 드디어 알아봐 주는구나